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1만 1천 자, 실제 작업물, 1차, 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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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4:22



“어때?”


“완전 결딴 났네. 여기서 고치는 건 무리.”


잠깐 뜸을 들였다가 그는 선고한다.


“그럼, 앞으로 백 일이네.”




*




D-100


우주선 동력원이 파손되었다. 알 수 없는 결함 때문이었다.


미지의 별, 폴라리스라고 이름 붙인 신생 행성으로 향하는 함선이었다. 과거 어떠한 결투의 무대가 되었다던, 목숨을 건 전투가 표면을 바싹 불태운 탓에 백색왜성이라고 불리게 된 별, 폴라리스. 오른 사람은 정확히 일백 명으로 지원자 중 무작위로 뽑은 것이라고 했다. 우주선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력을 제하면 모두가 여행객이라고 불리는 민간인이었다. 준비되었던 여정은 대략 일 년 하고도 반 광년. 하지만 우주선 결함은 지구를 떠난 지 일주일 만에 발견되었다.


B는 벽면에 기대어 선 채로 우글거리는 아흔아홉의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소식을 들은 그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격렬하게 불태우고 있었다. 이 여행에 얼마를 쓴지 아냐고 분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음의 공포에 떠는 사람도 있었다. 당장 우주선을 돌려 지구로 돌아간다는 의견과 한번 떠난 이상 돌아가는 건 무리라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주먹질이 시작되기 직전 B는 기댔던 벽에서 몸을 슬그머니 뗐다. 등받이 역할을 톡톡히 해준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소행성 하나가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갔다.


“자자, 다들 진정하시고. 싸워봐야 좋을 거 없죠? 그렇죠? 이런 때일수록 힘을 합쳐야지.”


“힘을 합치기는 무슨.”


“자네는 뭐가 좋다고 웃어!”


“좋다고 웃은 거 아닌데. 나 참. 분위기 어떻게든 풀어보려는 거죠.”


인파를 뚫고 나타난 남자가 손을 내젓는다. 몸에 알맞은 점프슈트를 입고 얼굴에 숯검정을 묻힌 모양새는 결벽스러울 정도로 깔끔한 우주선 내부에서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B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거친 숨을 씨근거리던 사람이 머리를 한번 털고서 물은 건 바로 그때였다.


“자네는 뭐야. 이 우주선 엔지니어인가? 그렇다면 고쳐!”


우악스러울 정도로 성마른 고함이었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어깨를 한번 으쓱이곤 그렇게 보여요, 하고 넉살 좋게 묻어갈 뿐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꽂힌 것을 깨달았는지 얼마 후에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인파가 우글거리며 남자를 가렸기에 B는 조금 더 허리를 곧게 세웠다. 사람들 위로 툭 튀어나온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기실 B는 저 남자를 알았다. 그는 우주선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결함을 발견한 사람인 데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다.


“자자, 여러분. 아직 너무 상심하진 마시고. 이게 다 방법이 있어요.”


손을 내저으며 대화하는 남자, A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B는 가만히 생각했다. 남은 건, 일백 일.




D-98


사람들은 떠났다. 만일을 위해 우주선과 동행한 무인 정찰기와 구조선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구조선은 며칠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동력원이 고장 난 우주선은 일종의 난파 상태였으며 경로를 조율하는 것 외의 조종이 불가능했다. 표류와 다름없는 상태로 우주를 떠도느니 하루빨리 지구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들이었을 것이다. B는 그들을 이해했다. 우주여행이 유명한 관광의 일종이 된 지금 시대에서도 우주 미아와 실종, 난파선이 일으키는 폭발 같은 대형 사고는 번번이 일어났다.


이튿날이 되었을 때 우주선에 남은 사람은 서른 남짓이었다. B는 그들이 어째서 떠나지 않았는지 묻는 대신 자신의 일상을 보내기로 했다. 그는 긴 여행에 지칠 여행객들의 정신 건강을 대비해 우주선에 오른 상담사였으며 자신이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엔 지금보다 적기가 없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B는 옳았다. 상담실 팻말을 오픈으로 바꾸어 걸자마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를 찾았다. 불안감과 공포, 답답함과 두려움, 슬픔과 좌절 등을 아낌없이 늘어놓다가 그런데도 자신이 머물러야 하는 까닭을 거칠게 토로하고는 떠났다.


A이 찾아온 건 난파로부터 이튿날 점심쯤이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바깥에 펼쳐진 광막한 우주를 들여다보는데 누군가가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대답도 없었는데 그가 불쑥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하는 목소리에는 이젠 드물어진 가벼움이 깃들어 있었다.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괬던 B가 자세를 바로 했다. 털레털레 들어온 A에게 자리를 권하고서 가볍게 인사했다.


“글쎄, 옆 방에서 지내는 멜이 한 번쯤 권하더라고. 이런 때일수록 상담과 정신 건강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나 뭐라나.”


“틀린 말은 아니네. 사람들은 마음을 터놓을 구석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변화를 보이니까. 그러지 않는 경우도 꽤 있지만…… 밑져야 본전이지. 잘 왔어. 좋은 친구를 두었군그래.“


“동감. 나도 그리 생각해. 상담사 선생님.”


A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방 깔끔하니 좋네, 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곧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A은 곧 말했다.


“그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지?“


“뭐, 그렇긴 하지.”


“그럼, 정식으로 통성명이나 하자. 난 A. 선생님은?“


“…….”


B가 반응하지 않자 A은 재치 있게 눈을 찡긋거렸다.


”백 일 동안 같이 죽고 살 동료에게 이름 하나 안 알려주는 건 좀 섭섭한데? 설마 이대로 바람맞힐 생각인가. 빨리 잡아 줘. 손 시려.”


“……허. 어울리지 않는 말을 잘도. 차라리 쇼를 벌이는 게 낫겠어.“


A이 어깨를 으쓱였다. 장난스러움에 화답하듯 B가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웃으며 말했다.


“시라고 불러.“




D-87


사람들은 친해졌다.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우주선에 남은 서른 남짓한 사람들은 서로 다투고 싸우기를 거듭하다가 나중에는 기묘한 연대감이 싹 튼 것처럼 보였다. 끈끈한 동료애를 가지고서 서로의 것을 나누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했다. 환난을 맞닥뜨린 인간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구나, 하는 건조한 감상평과 별개로 B는 그 분위기를 다소간 꺼렸다. 고난을 마주하고서 급속도로 가까워진 사람들은 상대의 반경에 발 들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은 전부 말없이 불쑥 접근했다가 불편함을 내비치면 당혹스러워했다. 제 손으로 자신을 상처 입히는 사람 특유의 당혹스러움을 품고서 B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들은 마치 거리를 잊은 사람들 같았다. 지나치게 거리낌 없는 이들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환영할 수 없는 일이었다. B는 자신이 상담사이기에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고, 그러면 사람들은 대개 이해했다. 서른 남짓의 사람들은 저들끼리의 단단한 연대감에 뭉쳐 지냈으므로 B를 찾아오는 사람은 점점 줄었다.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 상담실로 향하던 발길은 거의 끊겼다. 열리지 않는 방문을 들여다보며 B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스스로 뇌까렸다.


그런 와중에도 B를 꾸준히 찾아온 건 A이 유일했다. A은 사람들과 뒤섞이기를 거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스물여덟의 단단한 유대에서 탈피하지도 않은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B를 찾았다. 식사를 마치고서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그들은 매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이 커피나 한잔 마시자는 A의 권유를 거듭 거절하면 그는 과장되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오렌지맛 사탕이 사탕 통 위에 한 겹 덮개처럼 보일 즈음이었다. 그들이 질문받은 건.


“왜 떠나지 않았어요?”


멜이었다. A에게 처음 상담실로 가라고 제안했다던 그의 옆방 엔지니어. 그들은 고장 난 동력원을 가지고 어떻게든 구색을 맞춰보겠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멜의 질문은 뜬금없었고 어딘가 당혹스럽게까지 느껴졌다. 글쎄, 하고 얼버무리고 있을 때였다. A과 시선이 마주쳤다. 불현듯 서로를 쳐다본 그들은 곧 약속한 것처럼 킬킬 웃었다. 


“그러게.”


먼저 입을 연 건 시였다. 공구로 볼트를 적당히 조이면서 그는 물었다.


“왜 안 떠나?”


“그러는 너는?”


“나야 뭐.”


“나도 뭐.”


“뭐예요, 둘 다. 싱겁게.”


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호기심을 잃은 사람처럼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볼트와 나사를 꼼꼼히 확인하던 멜은 곧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십여 년 전 별 폴라리스를 통째로 불태웠던 전설적인 싸움을 기억하냐는 물음부터 그 싸움의 주인공이 이십 년 만에 부활했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이야기들. A은 대체로 웃으며 침묵했고 B는 기계적으로 호응했다. 점검이 끝났을 때, 그러니까 구색 갖추기조차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공구를 정리하고 동력실을 나왔다. 그리고 미련없는 걸음으로 흩어졌다.




D-87


그날 저녁 B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항로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으로 표류하고 있었기에 전파가 약했다. 하지만 어찌저찌 검색기가 돌아가기는 했다. 그는 이십 년 전 폴라리스에서 일어났다는 사고를 찾아보았다.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히어로 집단과 성간 전쟁을 꾸몄다던 악당들의 마지막 싸움이 있었던 장소, 라는 설명이 떴다. 글로써 접한 과거는 유치하게 느껴질 만큼 전형적이었다. 거대한 악을 맞닥뜨린 영웅이 모든 걸 바쳐 최후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이야기. 이것 뭐예요? 기사에 달린 장난식 댓글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B는 창을 닫았다.


글이나 사진 같은 매체는 모든 걸 전할 수 없다. 가공을 거치면 전하고자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깎이고 마모된다. 이십 년 전의 싸움 또한 매한가지일 것이라고 B는 직감한다.


기사 마지막에서 보았던 익숙한 이름과 근황은 생각하지 않기로 하며 B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속절없는 잠에 빠졌다.




D-76


“항성을 지나게 될 거야.”


A이 그렇게 말했을 때 B는 직감했다. 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스물아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저들끼리 둘러앉아 저들끼리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A이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고, 그는 이 우주선의 궤도가 항성의 궤도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으며, 동력원이 망가진 고로 발진할 수 없어 궤도를 틀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절대영도보다 서늘한 침묵이 서렸다. 팔을 쓸어내리며 B는 그도 모르게 멜을 보았다. 창밖에 고개를 돌린 채로 한참 말이 없던 멜이 가장 먼저 일어났다. 비척비척 발을 끌며 걷더니 A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모퉁이를 꺾어 돌아 사라졌다. 멜이 사라지자마자 다른 사람들도 몸을 일으켰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한날한시에 걷기 시작했다.


“넌 안 가?”


A이 물었을 때 B는 창문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창에 몸을 기댄 채로 팔짱을 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본다면 그 끝에서 저들이 스쳐 지나갈 항성이 보이리라 믿는 사람처럼. B가 글쎄, 하고 어깨를 으쓱이자 A이 걸어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벽에 등을 기대고서 창문 밖 우주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외우주는 어두웠다. 소리 한 점 전해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빛은 아득히 먼 곳에서 점멸하는 과거 또는 미래의 전유물이었다. 우주의 억겁 같은 침묵이 우주선 안까지 침투하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무형의 존재여야 할 공기가 이다지도 무겁게 느껴질 리가 없으니까. B는 천천히 손을 들어 어깨를 주물렀다. 오랜 표류로 인해 비축해 둔 산소가 점점 닳고 있었다. 먹고 마실 물자 또한 줄어들었다. 모든 게 부족했다. 하지만 항성을 스쳐 지나게 된다면 걱정도 염려도 공포도 전부 무용해진다. 항성의 열기가 우주선을 녹일 것이다. 그들의 우주선은 애당초 들끓는 별을 견디도록 설계되지 않았기에.


“구호정 말인데,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아, 봤지. 기껏해야 두세 대 정도였던가?”


“서른 남짓이면 그 두 개에 나눠 타기 알맞지. 그나마 다행이야.”


“자리가 부족했으면 무슨 난리가 났을지 감도 안 잡힌다.”


B가 실없이 킬킬거렸다. 웃음을 건네받듯이 A도 함께 웃었다. 그 순간 B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웃을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A의 옆얼굴을 타고 먼 우주에서 쏘아 보낸 과거의 빛이 희끄무레한 장막을 만들었다. 빛살을 품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B는 며칠 전 보았던 기사를 떠올렸다. 그곳에 있던 앳된 얼굴, 맹렬한 불꽃에 휩싸여 있던 남자애를 생각했다.


궁금했다.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기실 B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천천히 웃음기를 지우고서 B가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창문에 손을 올리고 거기에 비치는 제 낯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사탕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


바닥이 미세하게 덜컹거렸다. 마지막 남은 구호정 중 하나가 사출되었다는 알람이 텅 빈 우주선 내부를 울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백색 구호정이 소리 없이 멀어지는 광경을 응시하며 B가 나지막이 물었다.


“고쳐볼까?”


“뭘?”


“동력원. 그게 아니라면 조종 시스템이라도 건드려보면…….”


“으음.”


A이 애매한 소리를 냈다. 짧은 침묵 끝에 그가 말했다.


“점검 정도는 해봐도 되겠지.”


팔짱을 푼 A이 훌쩍 멀어졌다. 기지개를 한번 켜고서 유유자적 떠나는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B가 몸을 일으켰다.


“다 하면 말해. 밥이라도 먹자.”


“오, 드디어 옆자리를 허락해 주B는 건가?”


“어차피 둘만 남았는데.”


B가 씨익 웃었다. 손을 내저으면서 공구 가지고 뒤따라갈게, 하자 A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D-75


동력 시스템이 파손된 부분이 발진을 담당하는 사출구인데 말이야. 사출구에는 자원이 적정 온도가 될 수 있도록 달구어서 추진력을 얻게 하는 장치가 있는데, 그 장치가 어째서인지 고장이 났어. 온도가 일정 이상으로 오르지 않는 상태야. 이 발진 사출구를 어떻게 달굴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보통 불로는 안 된단 말이지.


달구기만 하면 되는데. 달구기만…….




D-63


항성까지의 거리는 약 이십 일.


사람들은 모두 떠나지 않았다. 열댓 명이 그들과 함께했다. 떠나지 않은 까닭을 물었을 때 그들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자기 자신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낯이었다. 상담실에서 끊겼던 발걸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B는 그들을 환대했고, 대화를 나누었으나, 대개 그들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속내를 파헤치지 않았다. 단순한 말동무였다, 그는. 그 이상의 역할이 자신에게 준비되었다고 B는 믿지 않았다. 기실 말이란 변화의 도구였다. 영향을 끼치는 건 지나치게 손쉬웠다. 그리고 타인이 자신에게 감화되어 모습을 바꾸었을 때의 책임은 온전히 B의 몫이다.


B는 그런 무거운 것을 떠안고 싶지 않았다. 일부분일지라도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건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B는 자신에게 답답함과 공포, 때때로 환각과 절망을 이야기하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정해진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그것을 마무리할 때 사탕을 한 알씩 쥐여주었다. B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게 전부라고 믿었으며, 그 믿음은 일부분 진실이었다.


그렇지만 B는 A을 기다렸다.




D-58


불안해하던 사람들은 알지 못한 까닭으로 되레 차분해졌다. 그들은 저들끼리 둘러앉아 불을 끄고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B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A은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으나 B는 그것을 참여 의사라고 볼 수는 없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B는 묻지 않기로 했다.


항성은 지척이었다.


타오르는 열기가 우주선 외벽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D-44


“별이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우주선에 있던 열댓 명의 사람은 전부 관측실에 모인 참이었다. 사방이 탁 트여 있었고 모든 가구는 투명한 아크릴로 제작되었기에 그들은 우주 한복판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B는 모두가 그렇듯 관측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섰다. 벌어진 입을 닫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바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주에서는 보기 드문 주홍색 빛살이 맹렬하게 들이치는 탓에 눈이 시렸음에도.


그들은 막 항성을 지나치고 있었다.


거리로 따지자면 가깝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주라는 광막한 공간이 으레 그러하듯 그들은 지금 우주선이 항성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한 착각에 휩싸여 있었다. 눈이 멀 것 같은 빛과 진땀이 나는 열기였다. 자그마한 점보다도 작은 존재, 흩날리는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가 된 것 같다는 생각에 손끝이 저렸다. 항성은 그만큼 컸고, B는 그만큼 작았다. 홀린 듯이 한 걸음 내디뎌 창문을 쓸어내리는데 누군가 곁에 다가왔다. A이었다. 마찬가지로 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주홍 파장이 그 위에 함빡 떨어졌다. 피부와 눈, 머리칼이 온통 주홍으로 젖었다. 잘 어울린다고 B는 무심코 생각했다. 저런 빛을 띤 적이 있었으리라고 확신하게 할 만큼, 그는 주홍과 불과 어울렸다. A에게 준비된 것 같았다. A의 것이었다. 벌어졌던 입이 닫혔다. 가만히 시선을 돌려 항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와 닮았어, A.


A에게는 속내를 간파하는 능력이 없었으므로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D-43


항성은 우주선에 돌이킬 수 없는 자상을 남겼다. 사출구만이 말썽이던 우주선은 항성의 열기를 직격으로 맞고 완전히 결딴났다. 주 시스템 접합부가 녹아내린 것이다. 주 시스템을 통해 자동으로 이루어지던 압력 조절과 산소 투여를 포함한 모든 것이 멈췄다. 사태를 깨달은 A이 발 빠르게 대처한 탓에 모두가 잠든 새 몰살당하지는 않았으나 그뿐이었다. 죽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선택해야 했다.




D-39


마지막 남은 이들이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말을 전해왔다. 엿새라면 차라리 오래 걸린 것이라고 B는 생각했다. 마음을 정하자마자 그들은 움직였다. 마지막 탈출정은 운 좋게도 열기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었다. 한번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은 탓이었다. 시와 A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사출구 앞까지 나왔다.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으나 그뿐이었다.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왜 떠나지 않아요?”


멜이 물었다. A은 어깨를 으쓱였고 B는 손을 내저었다. 진심이에요, 하고 상대가 덧붙이고 나서야 그들은 조금 진지해졌다.


“별에 닿지 못해요. 이 우주선은 망가졌어요. 한참을 더 가야 하는데, 표류하는 우주선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으음.”


“자리는 남아 있어요. 그러니 함께 떠나요.”


A과 B는 서로를 힐끔 곁눈질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킬킬 웃었다. 그리고 약속한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D-32


“왜 떠나지 않아?”


탈출정 하나 없는 사출구에 우두커니 서 있던 A에게 B가 물었다. 질문만으로도 제게 허용된 선을 넘은 것처럼 느껴졌음에도. A은 몸을 반쯤 돌려 손을 휘저었다. 환영하는 것 같기도, 만류하는 것 같기도 한 몸짓.


“글쎄다.”


“둘만 남았는데. 말해줄 수 있지 않나?”


“커피 한 잔 마셔주면?”


뜸을 들였다가 B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그럼.”


“오. 예상치 못했는데.”


“그래서?”


B가 물었다. A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먼 우주를 쏘아보는 것도 같더니 곧 천천히 말했다.




D-32


내기했어.


이 우주선을 반드시 별에 가져가기로.


지고 싶지 않아서. 떠날 수 없어.




D-32


떠나지 않으면 죽을 텐데도?




D-32


너도 여기에 있잖아.


떠나지 않고 여기에 남았잖아.




D-23


물자를 모으기 위해서 B는 우주선 곳곳을 뜯어 살폈다. 그는 누군가가 숨겨둔 마른 과자 몇 개와 초콜릿, 소시지 두 종을 발견했다. 창고를 찾았을 때 그는 밑바닥이 살짝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 또한 열기가 남긴 흔적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열었다가, 그는 발견했다. 창고 아래 숨겨진 곳, 커다란 공간 안에 온갖 씨앗들이 있었다. 깨지기 쉬운 유리 안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심긴 채였다. 이곳은 적절한 온도와 습도, 그리고 조도까지 맞춰져 있었기에 주 시스템이 고장 난 지상보다도 쾌적한 느낌을 주었다.


B는 A을 생각했다. 떠날 수 없다던 그를.


이것이 그의 내기였을까?




D-14


동력이 고장 난 상황에서 어떻게 별에 다다를 수 있을지, B는 알 것 같았다. A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하지만 그것을 막아서는 건 엄연한 월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B는 이를테면 방관자였다. 말이란 변화의 도구였다. 영향을 끼치는 건 지나치게 쉬웠다. 변화한 사람을 감당하는 것 또한 온전히 B의 몫이 될 테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섣불리 건네지 않았다. 하지만.




D-11


하지만.




D-7


멀리서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희끄무레한 장막에 사로잡힌 것 같은 행성이었다. 한때 영웅과 거대한 악이 맞섰던 무대는 이제 새까맣게 타올라 잿더미를 휘날렸다. 멀리서부터 그게 보였다. 하얗게 얼어 있는, 생명 한 줌 없는 별. 그곳이 바로 그들의 목적지다.




D-6


네 결정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B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옳지 않다고, 네가 죽는다면 그 모든 내기가 무슨 소용이냐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A에겐 의미 없을 말들이니까. 변화에의 두려움은 이제 무용하다.




D-5


동력이 떨어졌다. 하루 정도는 표류하게 내버려둬도 괜찮지 않냐고 B는 말했다. A은 눈을 굴리더니 그것도 그래, 하고 순순히 수긍했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관측실 정중앙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B는 그 옆에 앉았다. 우주에 휩싸인 채로 그들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고, 어떠한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D-4


A.


떠나면 안 돼?




D-3


A은 웃었다. 불변하는 존재도 있다는 것을 B는 그날 깨달았다. 그는 미약한 씁쓸함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고민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애당초 변화하지 않는 존재가, 고작 말 몇 마디로는 거둘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B는 간과하고 있었다. 손끝을 가만히 문지르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 모든 고민은 어쩌면 제 아집이었을지도 모른다고.




D-2


A은 B에게 우주복을 주었다. B는 그것을 입었다. A은 B가 입은 우주복을 꼼꼼하게 점검하고서 엄지를 척 들었다. 잘 어울린다는 실없는 소리에 B는 그냥 웃고 말았다.




D-1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인사했다. 안녕 다음에 안녕이 뒤따랐다. B는 A이 등 돌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손을 흔들었고, 두어 번 정도 뒤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걸어간 A은 동력실 문을 닫았다. 이윽고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급작스러운 발진으로 인해 B가 비틀거렸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는 옆에 있던 지지대를 붙잡았다. 창문 너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