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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4:19

/ Once Upon a Winter

 

 


 

그라하 티아는 꿈을 꿨다.

 

그는 진동하고 있었다. 흔들리고 있었다. 유랑하고 있었다. 세계와 세계를 잇는 불분명한 힘에 휩쓸려 물성을 지녔다가 허무로 흩어지기를 거듭했다. 그는 이곳에 있는 동시에 이곳에 없었고 저곳에 있는 동시에 저곳에 없었다. 구태여 분류하자면 이것은 지난한 악몽이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파르란 빛이 흔들린 건 그때였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있으되 없었던 그라하 티아는 우악스러운 손짓에 뭍으로 끌려 나왔다.

 

하얀빛, 장막 같은 유백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마치 산 존재처럼 그것들은 몸을 맞추어 울렁거렸다. 여기는 어디지, 하고 그라하 티아는 질문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귀와 고개를 함께 젖히며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어디야? 그러자 이번엔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익숙한 울림을 가지고서. 얇게 저민 토르티야 같은 하늘을 두 쪽으로 결딴내며. 이리로 와.

 

얼굴을 떠올리려는 노력에도 머릿속은 뿌옇기만 하다. 희끄무레한 기억에 집중하며 그라하가 중얼거렸다. 누구였지? 그러자 질문에 대답하듯 그가 말했다.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

 

 

 

*

 

 

 

“—그라하 티아! 일어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라하가 번쩍 눈을 떴다.

 

산처럼 쌓인 책과 논문서 너머에서 그를 주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산크레드였다. 이를 데 없는 당혹감과 함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방황하던 시선 끝에 시계가 걸렸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시각으로부터 고작 십여 분이 지나 있었다. 테이블에 펼쳐진 책에 기대어 숙면을 취한 흔적이 뺨에 고스란히 남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오돌토돌한 감각에 다소간 부끄러워하며 그라하가 볼을 문질렀다.

 

잠들 줄은 몰랐다. 아니, 물론 전조는 있었다. 그는 요 며칠간 올드 샬레이안의 금서고에서 거의 먹고 자는 수준으로 들러붙어 있었다. 사료를 뒤지느라 그랬다. 얼마 전 올드 샬레이안 총회의 제안을 받아 제일 세계와 관련한 논문을 새로이 편찬하게 되며 금서고 출입 권한을 얻었다. 전례가 드물 정도로 귀한 기회였으므로 그라하는 그것을 십분 활용코자 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일주일 정도 지났나. 아니, 열흘? 사실 마지막으로 햇볕을 제대로 쬔 기억은 희미했다. 올드 샬레이안의 금서고에는 학자로서 응당 매혹될 수밖에 없는 위험하고도 아찔한 책들이 즐비했다. 타오르는 호승심과 호기심을 억누르는 대신 아낌없이 표출하기로 한 이상 휴식은 사치였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피곤했나? 그라하가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책을 읽던 그대로 까무룩 잠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잠들기 이전 존 기억도 없었다. 게다가. 그라하가 언뜻 미간을 찌푸렸다. 미심쩍은 꿈을 꿨다. 이대로 잊기엔 영 뒷맛이 찝찝한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빨리 잊히고 있었다. 이걸 어디에 적어두면 좋을 텐데. 여분의 종이라도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때였다. 산크레드가 말을 건 건.

 

“그라하. 괜찮아?”

 

“아, 응. 미안, 잠깐 정신이 없었네.”

 

“존재감이 그렇게 흐릿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말이지. 뭐, 의도하지 않는 한엔 말이야.”

 

산크레드가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그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하던 그라하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종이를 찾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고 보니까. 잠기운이 달아나자 또렷해진 이성이 물었다. 산크레드는 어떻게 들어온 걸까. 금서고 출입 권한은 쉬이 주어지지 않았다. 설령 샬레이안의 현인이라고 하더라도 까다로운 절차와 심사를 거친 몇 명에게만 한시적으로 허가가 나왔다. 요 며칠 새 금서고에 출입해야만 하는 중대한 사유가 산크레드에게 생긴 걸까? 그게 아니면.

 

설마 몰래 숨어 들어왔나. 순간적으로 눈이 가늘어졌으나 의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산크레드는 이유 없이 무모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되레 그만큼 신중한 인물은 찾기가 힘들다. 그의 언행 하나하나에는 명백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그라하는 허락되지 않았을 공간에 서 있는 산크레드를 더더욱 좌시할 수 없었다.

 

기실 온갖 이유가 아니더라도, 일단 산크레드의 안색이 나빴다. 얼마간 동고동락하다 보니 이제는 그의 낯빛 정도는 읽을 유대가 있었다. 저건 한숨을 참는 얼굴이었다. 던진 농담은 아마 심란한 마음을 숨기려는 본능 가까운 것일 테다.

 

더는 지체하지 않고 그라하가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그러자 산크레드가 괴상한 얼굴이 되었다. 일그러졌다가, 풀렸다가, 도로 구겨졌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뒤통수를 벅벅 긁은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손을 뻗어 그라하의 어깨에 툭 내려놓았다. 그리고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놀라지 말고 들어라.”

 

“응?”

 

“크리스탈 타워가 오류를 일으켰어. 세계를 잇는 문이 열린 것 같다.”

 

그라하는 잠시 눈을 끔뻑였다. 그러며 산크레드가 뱉은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몇 번이고 곱씹어도 결과는 같았다. 세계를 잇는 문이라니. 멍하게 눈을 끔뻑이던 그라하가 뒤통수를 느리게 쓸어내렸다. 그건 실로 미묘한 감각이었다. 그러니까, 낱말과 단어들이 문장으로써 유기적으로 조합되지 않고 토막 난 채 뇌수를 타고 춤추는 것 같은…….

 

“그라하.”

 

“잠깐. 미안.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라…….”

 

“아니, 이해한다. 나 같아도 그럴 거야. 솔직히 지금도 안 믿기는군.”

 

이마를 붙들고 비틀거리려는 그라하를 단단히 붙잡은 건 산크레드였다. 그는 앓는 듯한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시계를 힐끔 곁눈질했다. 이내 무뚝뚝하고 빠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산크레드의 특기인 신속하고 정확한 상황 설명이었다.

 

“십여 분 전 크리스탈 타워에서 갑작스럽게 강한 에테르 파동이 감지됐다. 지금은 야슈톨라가 확인하는 중인데, 역시 본인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해. 네가 필요하다.”

 

“세계를 잇는 문이 열린 것 같다는 건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의 의미. 에테르 파동을 감지한 순간 폭발적인 양이 내리꽂혔다더군. 지금도 그 근방은 파동의 영향 탓에 안개가 자욱해. 게다가…….”

 

산크레드가 잠깐 말을 멈췄다. 낮게 신음한 그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 너도 어차피 곧 알게 되겠지. 놀라지는 마라.”

 

“뭘…….”

 

“크리스탈 타워에서 죄식자가 나왔다더군. 정확히 말하자면 발견된 거겠지. 입구 부근에서.”

 

그라하의 몸이 순식간에 굳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산크레드에게 향했다. 크게 뜨인 눈동자가 묻고 있었다. 정말이야? 산크레드는 그렇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라하가 믿지 못하는 만큼, 어쩌면 그보다도 더욱, 산크레드 또한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뭐, 다행스럽게도 어린 개체 몇 마리뿐이었어. 상황을 살피던 야슈톨라가 안전하게 처리했다고 해. 문제는…….”

 

“……일 세계에 있어야 할 죄식자가, 원초 세계에 나타났다는 것.”

 

“그래서 야슈톨라가 임의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모종의 사유로 차원 도약이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일 세계와 연결되었다고 말이야. 뭐, 자세한 건 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그라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산크레드가 말을 마쳤다.

 

“지금 새벽에 연락이 갔어. 다른 녀석들도 모이고 있다. 네게는 도무지 연락이 닿지 않아서 내가 직접 온 거고.”

 

지체하지 않고 그라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크레드는 이런 일로 장난을 걸 사람이 아니었다. 흐트러진 책상을 한번 힐끔 곁눈질한 그라하는 미약한 죄책감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 걸음을 옮겼다.

 

“가자.”

 

산크레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렸다.

 

모르도나로 향하는 내내 그라하는 생각했다. 크리스탈 타워의 차원 도약은 막대한 에테르를 요구한다. 만일 타워가 원초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도약한 거라면 응당 그에 따른 환경 변화가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산크레드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어쩌면, 다른 세계의 크리스탈 타워가 원초 세계로 일순간 연결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제물로 삼은 에테르 또한 크리스탈 타워를 보내온 세계에서 사용했다면 겉보기엔 원초 세계에 큰 변화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크리스탈 타워 주위에 나타났다는 죄식자들. 죄식자가 나타났다는 건 즉 도약한 차원이 일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라하가 아는 한 일 세계는 어둠을 되찾았다. 죄식자들은 새로 태어날 수 없었고, 갈수록 쇠약해졌으며, 현재는 거의 토벌당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산크레드가 말한 어린 개체들은 어디서 나온 걸까.

 

이를 데 없는 불안이 목구멍 속에서 울렁거렸다. 온갖 가능성을 점치는 탓에 머리가 아팠다. 최악의 가능성은 역시 일 세계가 다시 빛에 잠식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인위적으로 에테르 불균형을 일으키는 건 몹시나 까다롭고 막대한 능력을 요구한다. 아씨엔들이 전부 사라진 이상 그럴 힘을 지닌 건 기껏해야 빛의 전사이자 영웅일 그뿐이다. 아니, 어쩌면 그조차도 불가능할지 몰라.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초조함을 숨기지 않고서 그라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이 바짝 말라가는 까닭을 알았다. 그라하 티아는 원초 세계의 새벽의 혈맹 일원인 동시에 일 세계의 수정공이었다. 일 세계, 특히 크리스타리움의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걸까. 지울 수 없는 염려가 목울대에 걸려 있었다.

 

그들의 패배를 우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하지 않았다.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기어코 일어날 것이다. 어깨를 펴고 가슴을 당당히 내밀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사랑하는 대지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겠지. 다만 그라하는 그들의 곁에서 싸울 수 없다. 그들의 싸움이 남긴 상흔과 상처를 붙들며 함께 괴로워할 수 없다. 분단된 세계라는 것은 섣불리 넘기에 지나치게 위험하고 까다로웠으며 그렇기에 그라하는 그들의 고통을 타인의 설명으로, 간접적으로, 멀어진 채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아간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라하에게도 그랬다. 소중한 이들의 상처를 직접 보듬을 수 없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그들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건, 단 한 번이면 족했다. 그는 싸우고 싶었다. 그들의 곁에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황폐해진 들판에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 한복판에서 눈을 뜨고 싶지 않다. 깨닫지도 못한 채 소중한 이들의 상실을 외면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주먹을 질끈 쥔 그라하가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모르도나는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 산크레드의 말대로였다. 순간적인 에테르 불균형이 일으킨 자욱한 연무가 발치에 가라앉아 시야를 방해했다. 그럼에도 망자의 종소리에 발을 디디자마자 그라하는 보았다. 조사단 노아의 일원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급하게 빌려온 듯한 전문 장비 수십 대를 인 단원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수십 명이 크리스탈 타워를 향해 걸어갔으며 또 망자의 종소리를 향해 돌아왔다.

 

현장을 지휘하던 관리인과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그라하와 산크레드를 알아본 것처럼 그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정중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허리를 펴자마자 다시 대원 하나에게 장비를 건넨 관리인은 곧 그가 안전하게 망자의 종소리를 벗어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라하님, 산크레드님, 오셨군요.”

 

“그래. 야슈톨라는?”

 

“야슈톨라님께선 크리스탈 타워 부근을 순찰 중이십니다. 경호대를 붙이겠다고 했는데 거절하셔서요……. 조금 걱정됩니다.”

 

“서두르는 게 좋겠군.”

 

산크레드와 그라하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번에는 그라하가 물었다.

 

“혹시 새로 알게 된 정보가 있을까?”

 

“예.”

 

관리인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마른 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그가 곧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발데시온 위원회의 협조를 얻어 에테르 감식 장비로 크리스탈 타워 전역을 둘러보고 있습니다……만, 이렇다 할 이상 현상은 없었습니다. 죄식자도 더는 나타나지 않았고요. 그런데,”

 

“그런데?”

 

“타워 자체가 문제입니다.”

 

관리인이 고개를 틀었다. 크리스탈 타워가 있을 법한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영 곤란하다는 것처럼 뒤통수를 긁적인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동 마법은 기본적으로 좌표를 기반으로 둡니다. 따라서 올드 샬레이안 대학 마법부에서는 이동 마법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좌표 계산법을 학생들의 머릿속에 단단히 박아 넣지요. 좌푯값이 틀리면 엉뚱한 곳에 떨어지니까요.”

 

생뚱맞은 이야기였다. 그라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 또한 관리인과 엇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크리스탈 타워. 그 먼 곳으로.

 

“알라그 기술의 총 집합체와 같은 크리스탈 타워는 차원 도약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몹시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고려할 점이 많은 최상급 이동 마법입니다. 즉 온갖 요소를 다 떼어놓는다면, 기본적으로 좌표 계산을 기반으로 한단 것이죠.”

 

“알고 있어. 그게 문제가 될까?”

 

“예. 현재 에테르 감식 장비를 통해 추출한 좌표가 두 개입니다.”

 

그라하가 눈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하는 반박이 뇌를 거치지 않고 불쑥 튀어나왔다. 곁에서 산크레드가 끙 앓았다. 번거롭게 되었군,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배경 삼아 그라하가 입을 열었다.

 

“그건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해. 좌표를 계산할 때는 존재의 고윳값이 들어가니까. 설령 완전히 똑같이 생긴 쌍둥이라고 하더라도 고윳값은 다르니…… 존재 하나를 감식했을 때 나오는 좌표는 두 개일 수가 없는데. 완전히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면…….”

 

거기까지 중얼거렸을 때 그라하가 아, 하고 탄식했다. 완전히 동일한 존재를 한 세계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이 가설을 성립하게 하는 존재를 알고 있었다. 동일한 차원이 마치 크레이프처럼 겹겹이 존재하며, 사건의 분기점마다 저마다의 형태로 분열한다는 다중 세계 이론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중 세계 이론에서 세계는 코스모스(Cosmos)보다는 유니버스(Universe)의 개념이었다. 평행 세계와도 비슷했다. 검증된 적은 없다. 그라하가 제8 재해에서 사용한 차원 도약이 일종의 증명일 수는 있겠지만, 그는 결국 세대를 이어 싸워온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다중 세계가 실존한다면? 크리스탈 타워의 차원 도약이 세계와 세계가 아닌, 유니버스와 유니버스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찢어버렸다면?

 

그렇다면 크리스탈 타워라는 존재 하나에 좌푯값이 두 개인 것도 이해가 간다. 차원 너머의 크리스탈 타워와 연결된 것이라면. 각 차원에서 하나뿐이던 크리스탈 타워 두 개가 이어진 것이라면.

 

“직접 확인해야겠어.”

 

그라하가 입술을 지그시 사리물었다.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태를 가장 수월하게 타파할 수 있는 존재는 아마 당신일 거라는 말이 뒤따랐다. 그라하는 오랜 동료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하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탑으로 향하는 내내 시리고 메마른 바람이 뺨을 얼렸다. 가쁜 호흡을 고를 때마다 뜨거운 날숨이 뭉게구름처럼 번지기를 거듭했다. 겨울이 왔나, 하고 그라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리고 뜻 모를 기시감에 제 혼잣말을 곱씹다가 곧 잊었다.

 

망자의 종소리에서 크리스탈 타워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성 코이니크 재단 조사지를 거쳐 크리스탈 관문으로 향했다. 초코보에서 내리자마자 그들은 거침없이 여덟 검사의 앞뜰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빛 에테르의 흔적들이 액체처럼 곳곳에 고여 있었지만 야슈톨라는 그곳에 없었다.

 

“어디 있지?”

 

산크레드가 곁에서 중얼거렸다. 그라하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질감은 확실했다. 크리스탈 타워가 어째서인지 일렁이는 것 같았다. 좌표가 연결된 탓이리라. 이 상태가 이어진다면 근방의 자연 에테르 또한 균형을 잃게 될 것이다. 술렁이는 불길함에 그라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쿵쾅거리는 심장께를 지그시 누르며 그가 깊이 호흡했다. 의미 없이 불안해 봤자 나아지는 건 없다. 좌절한 채로 주저앉아 있을 시간에 움직이며 절망을 타파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라하 티아는.

 

그라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깨를 펴고 가슴을 내밀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숨을 들이켰다.

 

“야슈톨라!”

 

산크레드가 목소리를 높인 건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 야슈톨라가 서 있었다. 닫힌 정문 바로 앞이었다. 마치 문지기처럼 굳건한 뒷모습을 하고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산크레드가 먼저 뛰었고 그라하가 뒤따랐다. 당신들 왔군요, 하는 목소리에는 미약한 환대가 깃들어 있었으나 그 얼굴만은 마냥 밝지 못했다.

 

“어때. 차도는 좀 있나?”

 

“글쎄요.”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야슈톨라가 그라하를 바라보았다. 그라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문과 야슈톨라를 번갈아 보았다. 뜻모를 침묵이 잠시간 흘렀다. 먼저 시선을 뗀 건 야슈톨라였다.

 

“크리스탈 타워를 감싸는 에테르가 이상해요. 좌푯값이 겹쳐서 그럴까요?”

 

“아마도 그런 것 같아.”

 

야슈톨라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문득 그라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대뜸 물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나요?”

 

“응?”

 

“대문 너머 말이에요. 내게는 심상찮은 소용돌이가 보여요. 빛 에테르로 가득 찬…… 마치 대죄식자 같은 것이.”

 

그라하가 얼굴을 굳혔다. 망설이는 듯 입을 열었던 그가 천천히 걸음을 뗐다. 문지기를 지나 그가 닫혔던 대문에 손을 올렸다. 주인으로 인정한 자를 인식하듯 문이 짙푸른 빛으로 빛났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대지가 미약하게 진동했고, 그 떨림에 맞추어 문이 서서히 열렸다.

 

미약한 틈새에서 섬광이 닥친 건 그때였다.

 

눈이 멀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그라하가 손을 뻗어 얼굴을 가렸다. 에테르가 아니었다. 순수한 빛의 집합이었다. 산크레드와 야슈톨라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각각 무기를 꼬나쥐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그라하는 압력에 눌려 비틀거렸다. 주술봉을 붙잡으려던 손끝을 무엇인가가 붙잡았다. 무기는 아니었다. 차가웠다. 얼어붙은 손 같았다. 이끄는 인력이 있었다. 속절없이 잡아당기는 힘이었다. 뿌리치려는 순간 그는 들었다.

 

—그라하 티아.

 

누군가가 그를 부른다.

 

의식은 거기서 끊겼다.

 

 

 

눈을 떴을 때 그라하는 혼자였다.

 

크리스탈 타워 내부였다. 아무도 없었다. 오래 묵은 적막이 발 디딘 땅에 시리게 굳어 있었다. 그라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짙푸른 크리스탈의 잔광이 사방을 감싼 채 울렁였다. 반투명한 벽면에 비치는 제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던 그라하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벽을 따라 공간을 크게 한 바퀴 돌고서 차분히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곳을 알았다.

 

언젠가 최후의 결전을 마무리한 수정공이 굳어 잠든 곳. 희망은 미래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리기 위해 굳건히 서기로 결심했던 바로 그곳. 시황제의 옥좌였다. 눈이 언뜻 가늘어졌다. 수정으로 감싸인 방, 잔광과 함께 울렁이는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정공’은 분명 이곳에서 얼어붙었다. 하지만 눈앞에 수정공은 없다.

 

마지막 기억 또한 애매했다. 기실 그는 야슈톨라와 산크레드와 함께 대문 앞에 서 있지 않았는가? 어째서 그가 크리스탈 타워의 최상층인 시황제의 옥좌 앞에 서 있는지 알 겨를이 없었다. 저리는 손끝을 문지르며 그라하가 차분히 결론을 내렸다. 우선은 움직여야 한다. 상황을 파악하고 난 후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는 타워를 걸어 내려갔다. 이동용 기구는 대부분 기능이 멈춘 상태였다. 최상층에서 입구로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던 계단이 마침내 끝났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땀투성이가 되어 마주한 육중한 대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그라하가 대문에 다가갔다. 마법적인 장력으로 작용하는 대문은 그 주인을 인식하자 파르라니 빛나기 시작했다. 대문에 새겨진 마법진이 요동치기 시작하면 많은 힘은 필요하지 않았다. 약간의 힘을 주자 대문은 묵직한 굉음과 함께 서서히 밀려났다.

 

시린 바람과 함께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건 눈송이였다.

 

그라하는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펼쳤다. 낮처럼 하얀 하늘에서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하늘 떨어진 눈송이가 손바닥에 닿은 순간 그라하의 귀가 단숨에 꼿꼿해졌다. 무언가에 덴 사람처럼 그가 재빠르게 손을 털었다. 녹지 않은 눈송이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손바닥을 붙들고서 그라하가 고개를 들었다. 일그러진 낯이 환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눈이 아니었다. 눈송이가 저렇게 단단할 수 없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눈송이를 닮은 그것은 유백색 구름에서 떨어졌다. 결정화된 에테르가 내리는 것처럼 날카롭고 단단했다. 자칫하다간 피부에 상처를 낼 것이다. 이를 데 없는 초조함에 그라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크리스탈 타워가 있다는 건 적어도 일 세계 또는 원초 세계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에테르 결정이 내리는 세계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그렇다면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인가?

 

숨이 길고 하얗게 핀다.

 

발밑에서 스멀거리는 혼란을 지르밟으려 애쓸 때, 그라하는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까만 인영이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이 아닌 줄만 알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올수록 확실해졌다. 사람이었다. 새까만 로브로 몸과 얼굴을 가린. 등 뒤에 커다란 대검을 매고 있었다. 걸음이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몸이 크게 휘청이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기를 거듭했다. 아주 느리고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점진적으로, 철컥거리는 강철 소리를 내며 인영은 다가왔다. 점차 크리스탈 타워와 그라하를 향해 걸어왔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라하가 몸을 조금 더 당당하게 폈다. 어찌 되었든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다. 이 상황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터였다. 그를 부르기 위해 그라하가 입을 열었다.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때였다. 상대가 멈췄다.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깊이 눌러쓴 로브 너머 얼핏 드러난 입이 미묘하게 뒤틀리며 열렸다.

 

“저기!”

 

그라하가 먼저 말했다. 그들 사이엔 열댓 걸음 남짓한 거리가 남아 있었다. 섣불리 다가가지 않은 채, 그러나 멀어지지도 않았다. 상대방으로부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그라하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곤란한 상황을 겪는 중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상대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서 그라하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눈이 얼핏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 가까이서 보니 어딘가 익숙하다. 두꺼운 갑주를 입어 본래 체격을 가늠할 수가 없음에도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가…….

 

그때였다. 여태껏 입을 열지 않던 상대가 움직였다. 천천히 몸을 수그렸다가 다시 폈다. 눈을 비비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들고서 상대방은 그라하를 지그시 바라보듯 목을 꼿꼿이 했다. 그를 뜯어 살피듯이.

 

진득한 시선이 불쾌하다고 느낄 즈음, 그라하는 희미한 신음 같은 혼잣말을 들었다.

 

“……그라하?”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그 순간 그라하는 벼락처럼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하고 입을 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상대가 무너졌다. 무릎이 꺾이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망설이지 않고 그라하는 뛰쳐나갔다. 몸과 얼굴에 둘둘 감긴 로브를 들췄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처음 보는 흉터와 낯선 피로가 얽힌 낯이었지만, 틀림없었다.

 

그는 영웅이었다.

 

“옮겨야 해.”

 

불현듯 그라하가 중얼거렸다. 바깥은 위험했다. 빛으로 휩싸인 세계라면 필연적으로 죄식자들이 존재할 것이다. 게다가 녹지 않는 눈은 멎을 기미가 안 보였다. 영웅의 낯은 창백했고 미약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몸이 정상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영웅을 품에 끌어안은 채 그라하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몸을 피해야 한다.

 

커다란 광장에는 온갖 병장기들이 녹지 않는 눈송이와 뒤섞여 있었다. 저곳을 뚫고 마땅한 장소를 찾느니 크리스탈 타워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할 성싶었다. 그라하는 곧장 움직였다. 의식을 잃은 영웅의 몸은 무거웠다. 최상층에서부터 크리스탈 타워를 걸어 내려온 그라하가 온전히 부축하기엔 힘이 부족했다. 갑주와 대검의 무게가 더해진 탓에 그라하는 자신이 마차를 끄는 초코보가 된 것 같다는 착각에 휩싸였다. 힘겹게 어깨에 영웅의 팔을 두르고 걸음을 뗐으나 영웅의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하지만 별다른 방도는 없다. 날카로운 에테르 결정을 고스란히 맞게 둘 수는 없었다. 등진 광장에 흩어져 있는 치열한 전투의 흔적도 영 신경 쓰였다. 밖에 내버려두었다가는 저 병기의 주인들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일은 곱절로 까다로워질 터였다. 그리고. 갖은 까닭을 차치하고서라도, 열이 오르는 상대를 외면할 만큼 그라하는 냉혈하지 못했다.

 

그가 영웅을 부축한 채 비틀비틀 걸어갔다. 열린 수정탑의 대문 안쪽으로 거의 구르듯이 기어갔다. 힘이 풀린 탓에 영웅을 거의 내팽개치듯 놓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영웅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못 본 새 억하심정이라도 생겼어?”

 

의식을 잃은 줄 알았던 영웅이 키들거리며 물었다. 그라하는 대답하는 대신 그의 로브를 벗겼다. 무겁고 헤진 천을 걷자 흠집이 나고 깨진 갑주가 드러났다. 그것들마저 능숙하게 몸에서 떼어냈다. 그러자 마침내 몸이 보였다. 몸에 달라붙는 검은 내의를 들어 올리자마자 그라하는 얼굴을 찌푸렸다.

 

엉성하게 두른 붕대였다. 그 사이에서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전문가의 손길을 탔다기보다는, 뭐랄까. 일단 지혈은 해야 하니 급한 대로 대강 묶어둔 것에 가까워 보였다. 그라하가 고개를 들었다. 영웅은 웃고 있었다. 창백한 낯을 하고서도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였다. 하지만 눈은, 그라하를 뚫어지라 들여다보는, 망막에 그를 담고서 일렁이는 두 눈동자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라하는 질문할 수 없었다. 당신이 일컬은 못 본 새라는 말은 어떤 세월을 말하는 건지. 당신의 얼굴에서 읽히는, 알지 못하는 흉터와 세월은 무엇인지. 당신은 내가 아는 영웅이 맞는지. 아니, 애당초 당신은 영웅이 맞기는 한지. 그라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렇기에 영웅은 답하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영웅이 물었다. 붕대를 풀고 드러난 환부에 치유 마법을 불어넣는 그라하를 향해서. 정말로 궁금하다는 것처럼.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손에서 터져 나오는 은은한 빛이 갈라진 살갗을 봉합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그라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며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는지.

 

“이상하네.”

 

“내가 할 말이야.”

 

“그래? 뭐가 이상한데?”

 

“전부.”

 

어느 정도 아문 것을 확인하고서 그라하가 손을 뗐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영웅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눈을 몇 번 끔뻑이더니 피식 웃었다. 일어나려는 일말의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대문 바깥을 향했다. 그라하는 그 시선을 좇았다. 눈이 오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유백색이었다. 너른 구릉과 그 너머 뾰족하게 솟은 첨탑 같은 산맥까지.

 

“설명이 필요해.”

 

그라하가 말했다. 영웅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그를 재촉하듯 그라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영웅,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야. 크리스탈 타워의 차원 도약에 휘말린 것 같아. 원초 세계로 돌아가야만 해.”

 

“…….”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