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퀘스트 : 바바 가누쉬의 선물
“오랜만이야, 나의 어린나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미안하지만, 부탁이 있지 뭐야?”
*
“으응? 부탁?”
“네!”
자신을 바라보는 린의 눈이 결사적으로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A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되물었다.
“뭔데?”
린의 안색이 밝아졌다. 열심히 설명을 시작한 그를 두고서 A가 뺨을 긁적였다. 조금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시 크리스타리움의 광장, 오늘따라 유달리 북적이는 사람들 틈바구니로 예술품 같은 커다란 전등이 보였다. 저들끼리 삼삼오오 떠들며 물건을 운반하는 사람들도 한가득이었다. 크리스타리움은 평소와는 확실히 달랐고, A는 지금부터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될 참이었다.
조금은 아깝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기꾼, 아니, 어쩌면 빛의 전사의 뛰어난 직감으로 보건대, 이것은 적어도 몇 시간 단위로 이루어져야 할 부탁일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별다른 생각 없이, 차라리 기쁜 마음으로 부탁을 승낙했을 테지만 하필이면 오늘이었다. A는 제가 오늘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하나하나 셈해보다가 관뒀다. 애초에 엎어진 물을 다시 잔에 담는 건 아무리 빛의 전사이자 영웅, 혹은 손재주가 뛰어난 A래도 불가능했으므로.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별수 없었다. 오늘은 산크레드가 A의 집에 놀러 오는 날이었다!
“그래서……, A 씨? 듣고 계세요?”
“냐?”
헐레벌떡 고개를 끄덕이자 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뺨을 긁적인 린은 곧 작게 웃었고, 어딘가 불편해하는 기색으로 머리를 한번 넘겼다. 희한한 일이었다. 영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잠시 원초 세계로 날아갔던 A의 이성이 린의 수상한 움직임에 재빨리 복귀했다. 가늘어진 눈으로 A가 린을 바라보았다. 린은 수줍음이야 많았지만 그 지난한 여정을 함께 해쳐온 전사였다. 심지가 굳건했고 필요할 때면 얼마든지 강건했다. 그런 린이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건 즉……. 헉, 설마 심각한 일에 연루되었다거나? 무럭무럭 자라나는 상상력을 억제하는 대신 단숨에 얼굴이 까매진 A가 린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진지한 낯으로 되물을 때 속으로는 숫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린만큼은 안 돼!
“왜 그래?”
“으음, 부탁이기야 했지만……. A 씨에게 의존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역시 이번만큼은…….”
부탁 때문이었군. A가 눈을 한번 굴렸다. 생각도 함께 굴러갔다. 부탁이라는 게 뭐길래 이렇게 망설이는 걸까. 린이 제게 할 만한 부탁을 몇 가지 꼽아봤지만 그다지 어려울 건 없었다. 그렇다면 머뭇거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일 텐데. 마침내 눈과 고민이 한 바퀴를 돌았을 때 A는 여전히 망설이는 린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영 마주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A가 충동적으로 외쳤다.
“할게!”
“네?”
“부탁!”
“네에?”
“그런데 무슨 일 하면 돼?”
A가 되묻자 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다 듣지도 않고 수락해도 괜찮냐는 질문에 염려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A는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그러고도 린의 걱정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에 넌지시 한 마디를 던졌다.
“세상 구하는 것만 아니면 되지, 뭐! 냐도 그건 혼자서는 무리.”
“그, 그런 건 아니에요!”
마침내 린의 망설임이 끝났다. 그러면 뭔데, 하고 묻는 A를 향해 고개를 든 린이 슬쩍 몸을 비켰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린을 지나쳤다. 그의 뒤에는 크리스타리움 광장 정중앙, 보석과 덩굴로 화려하게 꾸민 예술품 같은 전등이 있었다. 때마침 짐을 운반하던 사람들이 근처에서 멈춰 섰다. 그들이 내려놓은 궤짝이 열렸을 때 A는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 안에 가득 들어찬 건 작은 등이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공터 가장자리에 매달고 있었다.
A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것과 동시에 린이 말했다.
“크리스타리움에서 점등식이 열릴 예정이에요.”
“오!”
“재해를 이겨냈다는 증거 같은 거예요. 주기적으로 지역마다 돌아가면서 도맡는데, 이번에는 크리스타리움 차례가 되었어요. 라이나 씨로부터 조력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는데……, 그걸 같이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심부름 같은 것이렷다. A는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종류의 잔심부름은 자주 해봤다. 게다가 오랜만에 일 세계에 온 김에 숨이라도 돌리기 제격이었다. 원초 세계에서 겪은, 그리고 앞으로도 겪을 수많은 냥잔판들을 떠올린다면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일 세계가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하고 주먹을 불끈 쥐는데 린이 덧붙였다.
“그, 이게 원래는 가족 단위의 행사라서요! 그래서…….”
“냐?”
“아, 아니에요. 잊어주세요!”
린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언뜻 붉어진 귀를 내려다보며 A의 입꼬리가 주욱 올라갔다. 이거 이거, 뭔가가 있었다. 뭔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냄새가, 사건의 냄새가 아주 폴폴 풍기는군. 여기까지 본 이상 결정은 빨랐고 또 거침없었다. A는 산크레드를 향해 내심 굿바이를 선언했다. 금방 갈게, 산. 아마도. 해 지기 전까지는?
황당함을 금치 못할 산크레드의 표정을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허리에 손을 짚고 힘껏 킬킬거릴 때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린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더니 마찬가지로 웃으면서 말을 거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일 세계 오시기 전까진 뭐 하고 계셨어요?”
“산이 집들이 와서 같이 놀고 있었어.”
“집들이요?”
“냐 얼마 전에 집을 샀거든. 무려 대형! 산이 그때 많이 도와줘서 한번 초대했지.”
린의 눈이 단박에 커졌다. 대단해요, 하는 목소리가 제법 만족스러웠다. A도 마찬가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후후후, 하고 잔뜩 목소리를 깔자 제법 사악하게 들렸다. 의도한 대로였다.
“산한테 밥해달라고 졸라서 간신히 승낙해 준 참이었는데 불려 왔어.”
“헉…….”
“하지만 괜찮아. 냐한텐 린도 중요하니까.”
장난스러운 대꾸였지만 반응은 그렇지 못했다. 린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언뜻 숙이자 머리칼에 가려 표정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이번엔 A 차례였다. 뜻밖의 반응에 당황스러움보다 걱정이 먼저 솟았다. 숙인 고개에 얼굴을 들이밀어 볼까 고민하는데 린이 다시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A가 고개를 내저을 즈음 멀리서 라이나가 다가왔다. 위병 대장은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A와 린에게 가볍게 경례하고서 그는 곧장 입을 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간단했다. 일 세계 전역을 돌며 점등식이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이전에 공문과 사람으로 한 차례 공지했으므로 말하자면 이건 단순한 재검토 수준이라고 라이나는 설명했다. 위병 대장은 이런 사소한 일에 A를 부려 먹는다는 사실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으므로 A는 더욱 자신 넘치게 웃어주었다. 그라하는 잘 지낸다는 소식까지 전하자 라이나는 아주 작게 웃었고, 곧 미약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준비할 건 없었으므로 채비는 간단하게 끝났다. 정오를 막 지날 무렵 린과 A는 크리스타리움을 떠났다. 수정공 대문을 나서며 그들은 위병들의 배웅을 받았다. 둘이서 막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A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맑았다. 짙푸르게 청명했고 드높았다. 어쩐지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이렇게, 동료들과 함께 걸었던 것이 꼭 엊그제 같은데. 그는 이제 원초 세계에서 절망과 맞서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린도 마찬가지라는 듯 곁에서 중얼거렸다. A는 되묻는 대신 기다렸지만 린은 머뭇거릴 뿐 말을 이어가진 않았다. 마침내 린이 우물거리던 입술에서 힘을 빼고 약한 한숨을 내쉬었을 때 A는 눈을 굴리며 결심했다. 내버려두자. 린은 분명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분명히. 그러나 채근이 그럴싸한 선택지로 보일지언정 현명한 방법이 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A는 직감했다. 무슨 말을 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격언은 옳았으니까.
그들은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세계를 구한다는 거창한 포부를 안고 걸었던 그 길을 그대로. 익숙한 얼굴들을 만났고 짧게나마 근황을 주고받았다. 점심쯤이 되었을 무렵 그들은 율모어에 도착했다. 차이 누즈는 그들의 방문을 익히 들었다는 양 익숙하게 환대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고, 맡겨진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으며, 아내와 함께 크리스타리움에 방문할 예정이라는 차이 누즈의 확언까지 들은 이후에야 대문을 나섰다.
이제는 거의 철거된 폐촌을 지나면서 A는 린을 힐끔 곁눈질했다. 옆얼굴은 거짓말을 못 한다던 옛말을 새삼스럽게 되새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어르신들의 지혜는 제법 대단하다는 생각이나 무심결에 하며 A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시선은 내리깔았고 입술은 감쳐물었다. 늘어트린 두 손을 간혹 세게 쥐었다가 펴는 린이 바로 그의 곁에 있었다. 린이 제 시선을 눈치채기 전 A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하늘이 참 맑다, 그치, 하고 실없는 소리나 하자 약간의 뜸을 들이고서 그렇네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침묵은 길게 이어졌다. 그래서 A는 느리게 궁금해졌다. 린의 고민과 이 여정에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동시에, A는 원초 세계에 두고 온 산크레드를 떠올렸다.
식사 준비 막바지였다. 바바 가누쉬를 끓이는 산크레드를 뒤로 하고서 수저를 놓고 있을 때 페오가 나타났다. 린의 부탁이라고 요정왕은 말했다. 린은, 비록 나이야 어렸으나 어지간한 전사들보다도 험준한 운명을 맞닥뜨리고 이겨낸 존재의 특성처럼 누군가에게 부탁을 꺼내는 일이 지극히 드물었으므로, A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산,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하고 외쳤던 게 마지막 인사였다. 너는 그 말을 나 밥 볶을 때 하냐며 황당해하던 산크레드의 얼굴이 일그러지기도 전에 A는 일 세계에 도착했다.
조금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그다지 서글프거나 우울하지는 않은 말끔한 심정으로, A는 스스로 되물었다. 이곳에 있는 게 산크레드였다면 조금 더 효과적으로 린의 고민을 끌어낼 수 있었을까.
산크레드와 린의 유대감에 관해서 모르지 않았다. 기실 A 또한 그들 곁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으므로.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야 가족이었다. 린은 산크레드의 가족이었고, 산크레드는 린의 가족이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선택한 만큼 세계가 다시금 열네 쪽이 난다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리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A가 입술을 한번 우물거렸다. 산크레드와 린이 서로의 가족이라면. 그 새삼스러운 사실을 다시 한번 낱낱이 파헤치려는 마음으로 되짚자 그는 속절없이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린과 냐는?
산과 가족이 되고 싶기 때문에, 오로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린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금 더 개인적인…….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A는 고개를 내저었고, 고민을 이어가는 대신 충실하게 발을 옮겼다.
크리스타리움으로 돌아가는 아므 아랭의 길목에서 그들은 비구름을 마주쳤다.
후끈하던 사막에 단숨에 물안개가 피었다. 열기로 인해 내리는 돌발성 폭우였다. 모래가 진흙처럼 변하는 바람에 도무지 걸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잠시간의 휴식을 결정했다. 비가 들이치지 않는 바위 아래에 몸을 숨기고 젖은 몸을 말릴 수 있도록 모닥불을 피웠다. 공기에 어린 농도 짙은 습기 때문에 몇 번이고 발화에 실패해 결국 서툰 마법으로나마 불을 붙여야 했다.
“쏟아지네요…….”
모닥불을 쬐며 린이 중얼거렸다. 침침한 오렌지빛을 받은 얼굴이 어둡게 빛났다. 커다란 바위가 만든 틈에 몸을 기대어 누운 A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뻗었다.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쨍쨍했는데. 단숨에 몰려오더니 순식간에 퍼붓기 시작하는 통에 몸을 제대로 피할 수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발을 묶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하고 농담을 던지자 린이 잘게 웃었다. A는 그 작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산을 생각하고 있어?”
웃던 린이 잠시 멈췄다. 순간적으로 굳었던 표정을 문지르고서 아이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직전과는 달랐다. 어색한 상황을 타파하려는 낯이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A가 뺨을 긁적였다. 슬그머니 린의 곁으로 조금 더 가깝게 붙어 앉자 린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자주 해요. 산크레드뿐만이 아니에요. 함께 여행했던 모두를…… 그 시간을…….”
린의 목소리가 언뜻 낮아졌다. 모닥불을 들여다보는 눈동자도 함께 깊어졌다. A는 저 표정을 알았다. 과거를 그리는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떠올리는, 되짚는, 그렇게 그리워하는 표정이었다. 린은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조금 더 끌어모았다. 얼굴을 무릎에 묻고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외롭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에요. 그냥, 특히 이렇게 돌아다닐 때면 종종 떠올리게 돼요. 모두와 함께 여행하던 때 말이에요.”
“시끌벅적했으니까. 응.”
“시끌벅적했으니까요. 산크레드도 그렇고. A 씨도 그렇고.”
“냐는 조용했는데.”
“설마요.”
그렇게 말하며 린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A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이야, 하고 짓궂게 덧붙이자 웃음소리는 조금 더 커졌다.
“요새 그쪽은 조금 어때요? 그러니까, 원초 세계 말이에요.”
“완전히 냥장판이야.”
“앗.”
“냐를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냐가 너무 유능한 탓이지. 누굴 탓하겠어. 그렇다고 포기하긴 싫어. 냐는 이미 악의 세력으로부터 세계 정도는 훔쳐주는 훌륭한 사기꾼이 되어주겠다고 마음 먹었는걸.“
“A 씨는 강하니까요.”
“린도 강해.”
거기서 린은 잠깐 뜸을 들였다. 말과 말 사이에 짧은 여백이 생겼다. A의 시선이 린을 향해 느리게 구부러지던 그 찰나에 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가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린이 몸을 조금 더 파묻었다. A는 그런 린을 보고 있었다. 일렁이는 주홍을 따라 깊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지기를 거듭하는 낯을. 가족과 헤어진 어린 여자아이의 침묵하는 상을.
비 내리는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요란했다.
별수 없이 A는 다시 입을 열었다.
퍼붓는 빗줄기와 함께 침묵이 씻겨 내려갔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들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작은 모닥불이 몇 번이고 꺼질 뻔한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돌풍을 타고 작은 도마뱀이 날아왔을 때는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 이윽고 불을 피웠던 장작들이 차츰 부스러지기 시작했을 때 뺨을 적셨던 습기가 함께 말랐다. 매섭게 쏟아지던 폭우가 무색할 만큼 빠르게 잦아들기 시작한 빗줄기를 손바닥으로 받으면서 A는 가뿐히 말했다.
“금방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에요.”
린이 덩달아 고개를 기울였다. 하늘을 뒤덮었던 먹구름은 이제 거의 옅어진 참이었다. 줄기라기보다는 방울에 가까운 비가 드문드문 떨어졌다. 슬슬 떠날까, 하며 A가 모닥불에 모래를 부었다. 잠시 요란하게 몸을 떠는가 싶더니 곧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가 길고 얇게 하늘을 향해 꼬불거리는 광경을 빤히 올려다볼 때였다. 슬슬 떠나자는 말이 혀끝에 걸려 있던 순간 A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려던 몸에 힘을 주었다.
린이 묻고 있었다.
“그리울 땐 어떡하나요?”
목소리가 얼핏 떨렸다. 거기에 묻은 습기는 쏟아진 돌풍 같은 폭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A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몸을 돌려 린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그가 지었을 표정을 상상했다. 질끈 쥐었을 두 손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마땅한 말을 골랐다. 까다로운 일이었다.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 편했다. 곡해받지 않고 제 마음을 전하기에 문장과 언어는 지나치게 꼬불거렸다. 제대로 닿지 못한다면 그것대로 낭패인 일이었다.
고민이 깊어질 때쯤 뒤에서 린이 걸음을 뗐다. 모래를 밟으며 일어나는 서걱임과 함께 린이 A를 지나쳤다. 반걸음 정도 앞장섰던 그가 몸을 돌렸다.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뙤약볕이 린의 뺨을 스치고 A에게 기울었다.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들을 스쳐 지나갈 때 린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린.”
“어서 돌아가요. 라이나 씨가 기다릴 거예요.”
A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의 린에게 전할 말을 단숨에 찾기 힘들었다. A는 고개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리면서 신음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린의 시선에 제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였으며, 이내 힘차게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그러지, 뭐.”
린은 단지 웃었다. 대화를 잇는 대신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므 아랭의 사막 길은 폭우를 만나 질척거렸지만 맹렬하게 내리쬐는 뙤약볕에 또 금세 말랐다. A가 앞장섰고 린이 뒤따랐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랫길을 걸으면서 그들은 다시 한번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주체는 A와 린이 번갈아서 맡았다. 돌아가는 길목에서 A는 원초 세계가 처한 위기와 산크레드의 활약, 혈맹원들이 함께 힘을 합쳐 이겨낸 지난한 전투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린은 가이아와 함께 일 세계 전역을 여행한 일, 각종 도시와 협력해 죄식자 잔당을 토벌하러 떠났던 모험담을 이야기했다. 린도 참 바쁘게 보냈네, 하고 A가 말하자 린은 부정하는 대신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힘들진 않았어? 냐는 진짜 고되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으음, 그래도 다들 편의를 많이 봐주셔서 괜찮았어요. 물론 전투는 언제나 힘들고 또 두렵지만…….”
린이 말끝을 흐렸다. 이어지는 말이 없어 A가 힐끔 어깨너머를 곁눈질했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걷고 있었다. 발치로 향한 시선이 깊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낯이었다. A는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말을 걸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은 빠르게 섰다. 구릉을 타고 길어지는 그림자만큼이나 침묵은 깊어졌다. 린은 돌아가는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A도 매한가지였다. 산등성이 같은 모래 둔덕을 오가며 A는 대신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기 시작한 태양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크리스타리움에 다다랐을 때 하늘은 검붉었다. 교대하던 위병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반겨주었다. 날이 밝을 때 나섰던 대문을 그대로 통과해 광장으로 향했다. 어김없이 라이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려 섞였던 낯은 A와 린을 발견하자마자 다시 밝아졌다. 기다렸다고 서두를 뗀 라이나는 가볍게 경례하곤 말했다.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오는 길에 폭우를 마주쳐버렸어. 완전히 쏟아지는 바람에 그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었지 뭐야.”
“저런, 갈아입을 옷을 마련해 드릴까요?”
“냐는 부탁해. 린은?”
“앗, 그럼 저도 부탁드려요!”
라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 걸음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A와 린이 위병 대장의 뒤를 따랐다. 광장을 향해 걸으면서 라이나가 말을 이었다.
“점등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그동안 펜던트 거주관에서 조금 쉬고 계시는 게 어떠신가요? 옷은 마련하는 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현명한 제안이었다. A는 순순히 승낙했다. 라이나는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겠다며 걸음을 옮겼다. 남은 건 A와 린뿐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그러면 갈까, 하고 펜던트 거주관 쪽으로 발을 돌렸다.
펜던트 거주관으로 향하며 그들은 광장을 스쳐 지나쳤다.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던 탓에 A는 순간 그곳이 광장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둥근 공간을 따라 뼈대를 세우고 전등으로 장식한 공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A가 먼저 멈춰 섰다. 린은 뒤따라 멈췄다. 그들은 잠시 약속한 것처럼 광장을 바라보았다.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한 공터를 뛰어다니는 숱한 사람들, 무리끼리 공유하는 둥그런 미소 같은 것을 관찰했다.
묻지 않아도 알았다. 모습이야 제각각이었지만 저들은 가족이었다. 피나 선택으로 이어진 가족.
“신기해요.”
그때 린이 입을 열었다. A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린을 바라보았다. 두어 걸음 뒤에 선 채로 광장을, 그곳을 채운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요한 시선은 심장께까지 가라앉은 듯했기에 비로소, A는 아므 아랭의 사막을 지나치는 내내 린을 침묵하게 했던 고민과 현재가 맞물리고 있음을 알았다.
“가족이라는 것 말이에요. 때로는 싸우고 부딪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가족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게.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속절없이 그들을 떠올리게 된다는 게.”
“…….”
“그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힘낼 수 있다는 게, 정말로…….”
이보다 더 동의할 수 없었다. A는 천천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쥐었다가 펼 때마다 이 손이 붙잡았던 일원을 떠올렸다. 제각기 달랐지만 어찌 되었든 모두 가족이었다. 피로 이어지지는 않았어도 그보다도 질긴 인연이 그들을 성기게 엮었다. A에게 가족이란 차라리 조밀하게 짜인 태피스트리 같은 것이었다. 제가 선택한 뼈대와 그림을 제 손으로 그려내는 행위 그 자체였다. 아마 린에게도 매한가지이리라.
이윽고 A는 천천히 알아차렸다. 린을 위해서 제가 해줄 수 있는,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린!”
A가 거침없이 린을 불렀다. 꿈결에서 단숨에 깨어난 사람처럼 린이 순간 몸을 떨었다. 동그랗게 뜨인 눈이 제게 향했을 때 A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린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고서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러고는 확실하게 말했다.
“냐, 잠깐 원초 세계 좀 다녀올게.”
“네, 네?”
“점등식이 시작하기 전까진 돌아올게! 조금만 기다려!”
“어, 잠깐…….”
A는 곧장 걸음을 돌렸다. 북적이는 광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을 때 그는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린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얼떨떨한 낯은 점차 내리기 시작한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잘 보였다. A는 린을 향해 힘껏 손을 내저어주었다. 금방 올게, 기다려, 하고 외치자 린이 손을 마주 흔들어주었다. 저도 모르는 새 얼결에 흔든 것처럼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눈에 오래 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목표는 성견의 방에 있는 차원의 틈새, 목적지는 원초 세계였다.
“아까는 대뜸 사라지더니, 이제야 나타나서 하는 말이 그거냐.”
어쩐지 시선이 따가웠지만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A는 힘차게 엄지를 척 내세우고는 말했다.
“냐의 부탁!”
“너란 녀석은 정말이지…….”
산크레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A는 산크레드의 등을 토닥이면서 되풀이했다.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 산. 최대한 빠르게, 신속하게!
원초 세계에 돌아오자마자 집 나간 산크레드를 붙잡아 다시 부엌으로 끌고 온 참이었다. 밥 좀 해줄 수 있냐는 질문에 산크레드는 황당함을 금치 못한 낯으로 물었더랬다. 너 내가 밥 볶을 땐 집 나갔으면서? 물론 거기엔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고 돌아온 이유도 바로 그 사정 때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A는 어디까지 간결하게 축약해서 설명해야 산크레드에게 효과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곧 결론을 내렸다.
“산의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 있어!”
훌륭한 설명이었다. 산크레드처럼 눈치 빠른 사람에게는 더더욱. A가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폈을 때 산크레드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지만 곧 말했다.
“얼마나?”
“한 오 인분 정도?”
“……기다려라.”
거절하지 않을 줄 알았기에 놀라지도 않았다. A는 대신 기다렸다. 물론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 산크레드의 밥을 담을 도시락을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과일을 씻어 함께 담았다. 일손이 부족하지 않도록 재료 손질을 도왔다. 손질한 채소와 갖은양념을 섞는 산크레드 옆에서 곁들여 먹을 빵을 구웠다. 남은 건 푹 끓이는 일뿐이야, 하고 산크레드가 말했을 때 A는 두어 걸음 물러났다. 약간은 초조한 마음으로 바바 가누쉬가 끓는 솥을 빤히 바라보았다. 노려본다고 저게 끓지는 않는다며 산크레드가 핀잔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집안 가득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을 때 산크레드는 통을 꺼냈다. 바바 가누쉬를 적당히 나누어 담고서 뚜껑을 닫았다. A는 마치 전투를 앞둔 전사처럼 움직였다. 산크레드로부터 바바 가누쉬를 담은 수프를 전해 받고는 단숨에 도시락에 담았다. 다섯 층을 켜켜이 쌓고 쓰러지지 않도록 커다란 보자기로 묶었다. 완성된 도시락을 품에 끌어안자마자 A는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났다. 그리고 산크레드를 향해 외쳤다.
“설거지는 냐가 할게! 고마워!”
“잠깐, 너 또 그냥 가는…….”
거기까지 듣고서 A는 눈을 감았다. 지맥을 더듬고 흐름에 몸을 내맡겼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성견의 방 앞이었다. 일 세계와 원초 세계의 시간차가 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모락모락 풍기는 도시락을 품고서 A는 힘껏 차원의 틈 너머로 몸을 던졌다. 약간의 어지럼증이 일었다. 행여나 도시락을 잃어버릴까 품에 힘껏 끌어안은 채로 A는 차원의 틈을 넘었다.
틈에서 그는 옛 기억을 엿보았다. 일 세계를 구하기 위해 분주히 모험하던 시절이었다. A는 미숙했고 린도 마찬가지였다. 기억 속에서 그들은 아므 아랭 사막 속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바위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야영 중이었다. 산크레드는 커다란 솥 앞에 앉은 채 분주했고 린과 A는 뒤에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산크레드가 말했다.
다 됐다. 와서 먹어.
린이 밝은 얼굴로 일어나 다가왔다. A는 그들 자리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바짝 구운 빵에 수프를 찍어 먹으면서 그들은 대화를 나누었다. 린이 웃음을 터트렸을 때 기억 파편이 훌쩍 멀어졌다. A를 스치고서 아득히 먼 곳으로 쏘아져 나갔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억을 돌아보던 A가 도시락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운 기억이었다. 가족 모두가 모여 있었던.
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전해야 했다. A는 숨을 골랐고, 그만큼 굳게 다짐했다.
이윽고 눈앞에서 빛이 번졌다.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A는 뛰쳐나갔다. 문을 열고 재빠르게 크리스탈 타워를 뛰어 내려갔다. 대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가장 먼저 뺨을 스쳤다. A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밝았다. 별이 보석처럼 흩어진 밤이었다. 전등은 아직 켜지지 않았다. 광장을 메운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곳에 뭉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늦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었다. 전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린!”
A가 단숨에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원체 많았지만 그들은 대체로 앉아 있었다. 사람 하나 찾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가쁜 걸음으로 A가 광장을 들쑤셨다. 린은 없었다. 저 멀리서 커다란 불빛을 든 라이나가 나타났을 때 A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지금은 안 돼! 다행스럽게도 라이나는 불을 든 채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A가 다시 한번 외쳤다.
“린! 어디 있어!”
“여기 있어요!”
목소리가 들렸다. A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러자 인파 속에서 단숨에 보였다. 린이었다. A가 떠났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A가 날 듯이 린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린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그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앉자! 배고프지?”
“네?”
“냐가 도시락 싸 왔어.”
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거수일투족 설명하는 대신 A는 자리를 정돈했다. 도시락을 묶었던 보자기를 펼쳐 그 위에 앉았다. 옆자리를 두드리자 린이 덩달아 몸을 앉혔다. 저기, A 씨, 하고 우물쭈물 묻는 린을 향해 A는 고개를 내저었다. 길고 번잡한 설명보다 알맞은 선택을 A는 알았다. 그는 도시락을 거침없이 보자기 위에 펼쳐놓고 뚜껑을 열었다. 바바 가누쉬의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물씬 풍기기 시작했을 때 린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산이 만든 거야. 아, 물론 냐도 도왔어.”
“이건,”
“짜잔! 바바 가누쉬!”
A가 도시락에서 수저를 꺼내 건넸다. 사방이 어두웠는데도 보였다. 산크레드의 이름을 발음할 때 린의 눈동자가 크게 울렁였다. 린이 머뭇거리더니 수저를 건네받았다. 질끈 쥔 채 한참을 망설이다가 도시락 하나를 집었다. 수프를 먹는 대신 그는 오랫동안 멀거니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을 들여다보려니 괜히 웃음이 났다. 때마침 가족 하나가 그들을 우르르 지나쳤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그들을 감싸안을 때 A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네가 맞아, 린.
“가족이라는 건 참 신기해. 싸우고 부딪히지만 결국 돌아가게 되잖아. 그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힘내게 되고. 냐는 너무 힘내는 바람에 세상을 구해버렸지만.”
가볍게 농담을 던지자 린이 웃었다. 도시락을 손에 질끈 쥔 채였다. 세오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손을 뻗어 도시락 한 칸을 가져왔다. 제 몫의 수저로 바바 가누쉬를 한 입 듬뿍 떴다. 수프는 여전히 따뜻했다. 입안에서 매콤한 향신료 향과 달큼한 채수 맛이 오래도록 맴돌았다. 수프를 꿀꺽 삼키고서 A는 다시 말을 이었다.
“냐도 마찬가지야. 냐가 선택한 가족을 위해서 이 여행을 시작했어. 그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힘낼 수 있지.”
“A 씨…….”
“하지만, 역시 가족이 직접 해준 밥을 먹거나 얼굴을 맞대고 만났을 때 받는 힘은 훨씬 커!”
린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사위가 밝아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라이나가 등불을 쥔 채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고요해졌다. 열띤 목소리가 곳곳에서 숨죽여 속삭였다. 침묵 속에서 라이나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며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런 의미에서 린은 대단해. 항상 힘내고 있잖아.”
“아니에요.”
린이 중얼거렸다. A는 잠시 말을 멈췄다. 떨군 고개 너머로 등불 빛이 비쳤다. 질끈 사리문 입술과 떨리는 속눈썹이 거기에 있었다. 린이 숨을 들이켰고, 또 잠시 참았다가, 이내 말과 함께 내쉬었다.
“저는 아직 한참 어린 것만 같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돼요. 여러분이 도와주신 세계를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A 씨, 저는,”
린이 고개를 들었다. 등불이 스쳐 지나가며 얼굴을 적실 때 어린 린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저는 모르겠어요. 그리움이라는 건 원래 이렇게 외로운 건가요?”
그 얼굴이 정답이었다. 이것이 린의 마음속에서 내내 그를 괴롭혔던 응어리였다.
A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을 지나친 라이나는 어느샌가 광장 정중앙으로 향하고 있었다. 등불이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사방에서 기대 어린 숨소리가 들렸다. 공터 중앙을 장식한 커다란 등 앞에서 라이나가 멈춰 섰다. 잠시간 사위가 긴장감 어린 침묵으로 물들었다. A는 등불의 박자에 맞추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라이나의 몸짓에 따라 등불이 천천히 하늘로 솟았다. 그리고 그 끝에서 구부러진 촛대와 마주치기를 수 초.
빛이 튀었다.
“린을 볼 때마다 동생들 생각이 나.”
사방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커다란 등에 빛이 들어옴과 동시에 광장을 둘러싼 장식들이 일순 켜졌다. 어둡던 공터가 단숨에 밝아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에 맞추어 흥겨운 음악이 끼어들었다. 박자와 함께 몸을 흔들고 뛰어다니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의 그림자가 A와 린 위로 함빡 쏟아질 때 A가 말했다.
“걔들보다는 철이 들기야 했지만 냐가 보기엔 린도 영 야무지지 못해. 아마 산이 보기엔 냐도 마찬가지일 거야. 어디에 두고 와도 계속 신경 쓰이고 걱정되겠지. 떠올리며 아무리 힘내려고 해도 곁에 없다는 사실에 슬플지도 몰라. 기껏 기합을 넣어봤자 옆자리를 보고서는 도로 힘이 빠질 수도 있고.”
린의 고개가 떨어졌다. 질끈 주먹을 쥔 두 손이 눈에 들어왔다. A가 손을 뻗었다. 린의 머리 위에 제 손을 얹고서 힘껏 쓰다듬었다. 그러며 힘차게 말했다. 명확히 들리도록. 그들을 둘러싼 환호성에서도 뭉그러지지 않도록.
“하지만 가족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
린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린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눈이 마주쳤다. A는 일부러 얼굴을 구기며 웃었다. 머리를 한 번 더 헝클이고는 손을 거두자 린이 한숨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보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아. 냐도 마찬가지야.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 그들을 좋아하니까!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어. 이를테면 직접 표현한다거나.”
“…….”
“그런데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분명히 있을지 몰라. 그럴 땐 냐한테 말해. 세상도 구했는데 말이지, 차원의 틈 하나에 산 하나 끼워오는 건 일도 아냐.“
넌지시 던진 농담도 제법 성공적이었다. 웃음을 터트리는 린의 낯을 보면서 A는 서서히 깨달았다. 이건 즉 제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들을 좋아하는 이상 보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것. A는 다시 한번 바바 가누쉬를 떠 입에 넣었다. 그리고 수프를 꿀꺽 삼킨 후 말했다.
“그래도 자주 올게. 린이 외로워하는 건 냐도 싫으니까.”
바바 가누쉬는 여전히 따뜻했다.
오래도록 침묵하던 린이 수저를 들었다. 빵을 집어 바바 가누쉬에 푹 찍었다. 그대로 입에 힘껏 욱여넣고는 열심히 씹기 시작했다. 음식을 전부 삼켜냈을 때 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듣지 않아도 대답을 알았다. 하지만 A는 기다렸다. 린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수프를 다시 한번 입에 넣었다. 꾹꾹 씹고는 다시 삼켰다. 그러고는 그들을 둘러싼 모든 환호성과 빛을 등진 채 웃으며 말했다.
“아주 많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