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victus
일기를 써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라하 티아가 말했다. 낮의 엷고 희끄무레한 햇살을 뺨 위에 투명하게 올린 채로.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A에게 기록의 대상이란 곧 탐구의 대상이었다. 제게는 아직 미지한 세계를 낱낱이 뜯어 살핀 후 그 흔적을 남기는 것이 행위의 이유였다. 미약한 의무감과 절제된 호기심의 합작이랄까. 하지만 동시에 A는 탐구할 대상에 자신을 넣은 적 없다. 주체가 대상자가 될 수 없는 법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그라하 티아는, 약간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로, 난감해하는 것처럼도 보이는 특유의 표정을 지은 채, 또다시 말했다. 일기를 써보는 건 어때.
“개인적인 사심 때문만은 아니야! 나는 단지…….”
“단지?”
“사람에게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해. 이때 휴식이라는 건 비단 육체적인 안정만을 뜻하는 게 아니지.”
그라하가 어색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A는 대답 대신 잠시 눈을 깜빡였다. 뜸을 들이고서 그가 반박했다. 나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말에 그라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뜻이 아니었어, 하고 그라하가 부정했다. 그럼 무슨 뜻이었냐고 A가 되물었다. 그라하는 잠시 고민하는 듯 나직이 앓는 소리를 내다가 곧 멋쩍게 말했다.
“네가 차분하고 단정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어서 그래.”
“…….”
“사람이라는 건 시간을 따라 변질되고 깎여. 가장 단단한 물성을 가졌어도 거침없이 마모되지. 특히 마음이 편치 않을수록 사람은 가파른 속도로 자신을 깎아내. 겪어봤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아.”
이번엔 그라하 차례였다. 숨을 고르는 것처럼 그가 틈을 두었다. A는 기다렸다. 제 눈앞의 젊은 미코테가, 어울리지 않는 시간의 겁을 뒤집어쓴 채 머뭇거림을 씹어 소화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연륜이라는 것이 총명한 눈동자에서 반짝 빛났을 때 그라하 티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손실되지 않았으면 하는 대상이라는 건 항상 있기 마련이잖아.”
생각할 수 있는 걸 생각한다면. 가라앉힐 수 있는 걸 가라앉힌다면. 그렇게 남길 수 있는 걸 남긴다면. 적는다면. 기록한다면. 엮을 수 있는 것을 엮는다면, 적어도 그 소실을 최소화할 수 있을 거라고 그라하 티아는 말했다. 부끄럽다는 듯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그러나 눈을 마주칠 때마다 상냥하고 굳건한 미소를 지어주며.
살랑살랑 흔들리는 빨간 꼬리를 바라보며 A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숙제라는 거지.
A는 제 앞에 펼쳐진 공책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수첩의 가장 앞 장이었다. 입에 문 담배에서 희끄무레한 연기가 빙글빙글 꼬여 하늘로 올라갔다. 검은 잉크가 묻은 깃펜을 손에 쥔 채로 A는 흰 종이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펜이 채 흡수하지 못한 잉크 두어 방울이 종이 위에 떨어져 번지고 있었다. 동그란 물방울 같은 그것들이 슬금슬금 영역을 펼치는 것을 구경하며 A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
그라하 티아는 일기라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기록물이라고도 했다. A가 알기로 두 가지 글은 성질이 달랐다. 일기는 보다 개인적인 면을 담는 사적인 글이었다. 그러나 기록물은 기록자의 사견을 배제할수록 좋았다. 어느 쪽에 맞춰야 하지? 그라하가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아니, 애초에.
어떤 주제를 골라야 하지? 어떤 이야기를?
무엇을 써야, 훗날의 제가 이야기 속에서 손실되지 않을 수 있을까?
A는 조금 더 고민했다. 자리에 앉았을 때 불을 붙인 담배를 반쯤 태웠을 무렵 그는 결정을 내렸다. 일기는 쓰지 않을 것이다. 비록 상대가 종잇조각일지라도 어떠한 대상에게 제 사적인 영역을 드러낸다는 건 다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A는 제 개인적인 내면을 기록한다고 ‘자신’이 소실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신 A는 모험에 관해 쓰기로 결심했다.
옳은 선택이었다. 적어도 A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게 모험이라는 건 사적과 공적 영역 모두에 발을 걸친, 일종의 중립 지대였다. 자신을 부르는 여러 칭호, 빛의 전사나 에오르제아의 영웅 같은 것들의 기저는 모두 모험가라는 명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이보다 잘 어울리는 주제는 없을 것이다. A는 반쯤 태운 담배를 크게 들이켰다. 연기를 머금었다가 천천히 내보냈다. 그리고 펜을 들었다.
‘A. 직업은 모험가.’
첫 문장을 끝으로 그는 다시 깃펜을 내려놓았다.
메마른 종이에 잉크가 번지듯 말랐다. 심장께에서 희미한 일렁임이 얼룩처럼 퍼졌다. 거대한 벽 같은 무엇인가가 펜촉을 단단히 틀어막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몇 번이고 다음 말을 떠올렸으나 무의미한 행위였다. 기어코 펜을 대에 걸쳐 내려놓고서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울였다.
그는 직감했다. 더는 쓸 수 없다.
자신이 멈춘 까닭을 알지 못했다. 어떤 까닭이 자신을 머뭇거리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번지는 마침표를 들여다보며 A는 자문했다. 모험을 시작한 이유를 쓰지 못하는 까닭은, 흉 진 상처가 다시 벌어질 것을 우려한 탓일까?
이야기의 시작이 으레 그러하듯 A의 것 또한 고통과 두려움과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실을 빼놓고서는 어떠한 얘기도 시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을 칭할 때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큼, 혹은 그보다도 많게, A는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꼈다.
어떤 사랑과 어떤 상실은 꼭 닮은 면이 있어서 입에 올리는 것, 펜 끝에 고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서글프게 한다. A의 시작 또한 그렇다.
아주 오래전부터 A는 E와 D의 이야기를 상처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붙었다. 새살이 돋았고 끈끈해졌다. 갈색 흉터가 남았지만 그뿐이다. 문장에 마침표를 찍듯 상처를 마무리하는 건 흉이었다. 온점을 찍는 순간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다. 상처도 마찬가지다.
이미 흉 진 지 오래된 상처였다. 가끔, 아주 간혹 엷은 통증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렸으나 그건 괴로움이나 고통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종류였다. 극복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환부임이 확실한데, 어째서 그 자신은 망설이는가.
한숨 대신 연기를 내뿜었다. 타들어 간 담뱃대를 재떨이에 비비고 자리를 정리했다. A는 생각에 빠져 한 자리에서 골머리를 앓는 것보다 현명한 선택을 내릴 줄 알았다. 기실 모험가란 몸을 굴리는 존재였다. 육체를 움직여 문제의 근간을 해치우는 부류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모험가 특유의 거침없는 시선으로 A는 제 문제를 순식간에 해부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재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이참에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A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지맥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미약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가장 먼저 들린 건 파도 소리였다. 감았던 눈을 뜨기도 전 짠 소금 냄새가 훅 끼쳤다. 반사적으로 굳었던 몸이 느리게 풀릴 때 축축한 바닷바람이 전신을 휘감고 지나갔다. 바닷사람 특유의 거친 말씨가 돌풍을 타고 귀를 간질였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무인도 담당자가 손을 흔들었다. 무인도에 갈 거냐는 친근한 질문에 A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역시, B 씨?”
간격을 두고서 A는 머리를 주억거렸다. 다음번엔 꼭 무인도에 들러달라는 부탁을 뒤로하고서 그는 걸음을 옮겼다.
모라비 조선소는 오늘도 평화로웠다, 라는 상투적인 문장을 속으로 뇌까리며 A는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 흑와단, 특히 림사 로민사와 항로를 운영하는 이곳에서는 특유의 경계가 시끌벅적함 사이에 소리 없이 녹아 있었다. A는 자신을 힐끔거리는 무형의 시선들에 개의치 않았다. 그것들은 오히려 익숙하다.
대신 그는 지나가며 길드 의뢰장에게 고개를 한번 까딱였다. 초보 모험가 시절 몇 번 들르며 길드 의뢰를 도왔기에 서로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였다. 눈을 가늘게 떴던 의뢰장이 A를 알아보듯 얼굴에서 힘을 풀었다. 미묘하게 따끔거리던 시선은 거기서 사라졌다.
조선소를 향해 걸어가며 A는 막연히 생각해 보았다. 그는 분명 빛의 전사요 동방의 해방자이며 에오르제아를 비롯한 세계를 구한 영웅이다. 하지만 존재가 하나의 개인으로서 작용할 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뒤섞여 그들의 경계 어린 시선을 받아내는 순간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분노할 수도 있겠지. 서러울 수도 있겠고. 하지만 A는 아니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다만…….
“A?”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A의 걸음이 멈칫했다. 생각에 잠겨 발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익숙한 장소 앞이었다. 문이 반쯤 열린 조선소 앞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자신을 바라보던 B의 안색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이게 웬일이야, 하고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활짝 벌린 품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며 A가 말했다.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차 한 잔이라도 하지 않겠니? 아, 혹시 바쁜 일정이라거나…….”
“바쁘지 않아요.”
A는 말을 흐리는 B을 향해 말했다. 딱딱하다는 소리를 듣는 목소리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B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A가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얼마든지요.”
B은 A를 조선소 안에 마련된 방으로 이끌었다. 접객을 위해 만들었다고는 하나 형식만 갖추었을 뿐 오래되고 낡은 가구들과 퀴퀴하고 서늘한 금속 특유의 냄새가 진동했다. 삭은 의자 끄트머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릴 때 B이 차를 내왔다. 또렷한 붉은빛이 찻잔 안에서 둥글게 파동쳤다. 같은 찻잔을 쥐고서 맞은편에 앉은 B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조금 낡았지. 바닷사람, 뱃사람들을 알잖니. 뗏목 하나를 만들 때도 제가 사는 집을 해체하고 싶어 하는 부류지.”
누추한 곳이라서 미안하다고 B은 덧붙였다. A는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짧은 침묵이 썰물처럼 들이쳤다. 부녀는 잠시간 약속한 것처럼 찻잔을 기울였다.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그러나 서로 기민하게 알아차리고서.
먼저 입을 연 건 B이었다.
그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로 A에게 물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왔니?”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켜고서 A는 순순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일기라는 숙제, 또는 숙제라는 일기. 모험에 관해 쓰기로 마음을 먹은 자신.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 시작을 쓸 수 없었던, 마른 종이에 잉크가 번지듯 말라가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던 A.
B은 모든 이야기를 신중하고 진지하게 대했다. 길고 복잡한 대화가 오갔다. B은 질문을 던졌고 A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것들이 몇 번이고 거듭되었다가, 뒤바뀌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찻잔이 비다 못해 말라붙을 무렵 A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B을 끌어안고 감사 인사를 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들르라는 대답을 받고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모라비 조선소를 나섰을 때 맞바람이 불어닥쳤다. 정돈한 머리칼을 흐트러트리고 두 발을 우악스럽게 밀치며 A를 지나쳤다. 두어 걸음 비틀거리던 A가 능숙하게 균형을 잡았다. 고개를 들고 잠시 성벽 너머를 응시했다. 수평선 위에 반쯤 걸린 태양이 주홍빛 광채를 흩뿌리며 가라앉고 있었다.
까치놀에 젖어 들며 A는 생각했다. ‘나는 어째서 모험을 계속하고 있지?’
대화를 통한 생각 정리라는 것은 정말이지 효과가 좋았다. B과의 문답 속에서 A는 미약하게나마 정답의 실마리를 움킨 것 같다는 감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무엇인가 장벽이 그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내리깐 눈망울에 저녁놀이 맺혔다. 짙어지는 그림자가 눈그늘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순간 그는 또다시 질문했다.
애당초 모험이란 무엇인가.
어째서 시작했으며, 어째서 지속하며, 어째서 질문하게 되는가.
일기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어째서 나는 모험에 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을까?
A은 명명백백한 모험가였다. 그의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몇 가지 요소 중 모험이라는 단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다. 하지만 그렇게 큰 존재가 이다지도 미지하다는 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다.
맹렬한 바닷바람에 몸이 흔들리는 그 순간 A를 휩쓴 건 어떤 의무감이었다. 그라하가 맞았다. 하지만 틀렸다. A에게는 정말로 일기가 필요했다. 그래야 하는 의무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정보가 손실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다. 온갖 사건과 사고들로 범벅된 일상에서 나 자신을 견고히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미 너무 많은 부분이 결손되었다고 A는 느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래의 독자에게로 갈 것까지 없었다. 지그시 들어 올린 손이 심장께에 가닿았다. 옷자락과 피부 너머에서 희미한 박동이 느껴졌다.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짚으며 A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날 A는 꿈을 꿨다.
일상이 부서지던 날이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사방에서 외쳤지만 그들 자신도 제정신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혼돈의 틈바구니 속에서 A는 휩쓸리고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누군가의 손을 잡았다고 느꼈고 동시에 세상에서 탈락했다고 생각했다.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 A는 누워 있었고 오른손엔 감각이 없었으며 D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꿈이라는 허구의 한계를 증명하듯 다른 때에 일어난 사건들이 하나로 뭉치고 뒤섞여 어지럽게 재생되었다. 다만 깨어났을 때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실제와 다를 바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A는 잠시 숨을 골랐다.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시고서 세수를 했다. 잠이 오지 않아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마음으로 거실을 서성이다가 소파에서 쪽잠을 잤다.
햇볕이 뺨을 간질일 무렵 A는 깨어났다. 그러나 일어나지는 않았다. 비스듬히 소파에 누운 채 가만히 눈을 뜨고 있었다. 빛살에 비치는 먼지들, 허공을 유영하는 작은 부스러기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며 생각했다. 모험을 시작했던 이유. 잊을 수 없다고,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음에도 분명히 어딘가 빛바랜 구석이 있을 그 까닭.
마르고 따뜻한 볕을 맞으며 A는 담담히 뇌까렸다. 그때 나는 절박했다.
E가 자신을 버린 줄로만 알았다. 친모로부터 강제적으로 뜯겨나갔다는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온데간데없는 D는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었다. 상실과 공포와 허무에 빠진 채로 열여덟의 A는 떨고 있었다.
A는 그때의 시간을 선명히 기억하지 못한다. 지독한 해리였다. 아주 불분명하게, 마치 마르기도 전 누군가가 문질러버린 수채화처럼 잔상 같은 기억들만 드문드문 남았다. 세상의 끝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소화할 여유가 없었다.
세월이 지난다고 묻힐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A는 이 년 후 모험을 떠났다.
비장한 목표를 가졌다거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모험의 시작은 사소했다, 라는 판에 박힌 문구가 어울릴 만큼.
그때 A는 말하자면 악에 받쳐 있었다. 강렬한 감정들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과도하게 맹렬하면 사람은 도리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A가 그랬다. 떠나간 어머니가 싫었고, 사라진 D를 찾을 수 없다는 자책이 절절했고, 돕지 않는 이웃들이 원망스러운 동시에 그들을 이해하기에 괴로웠다. 아무렇게나 뒤섞고 뭉개놓은 찰흙보다도 엉망인 꼴로 A는 엉켜 있었다. 그 커다란 뭉치에 온몸이 짓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신을 가눌 수 없었다.
최초의 용기, 또는 최후의 체념 정도였을 것이다.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불분명한 불안과 무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공포감.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막막함과 그럼에도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약간의 도움. 그것들이 A의 몸을 짓누르던 거대한 감정의 늪을 힘껏 밀어주었을 것이다. 딱 한 걸음, 모험을 향해 내디딜 그 한 발만큼.
그 결과가 지금의 A다.
마음에 들고 말고를 입에 담을 만큼 무언가가 진정으로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훗날은 모를 일이다. 판단을 내리는 주체가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가 보기에 A가 자신을 과도하게 몰아세우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적어도 지금의 A는.
모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지금의 A’는 제게 모험이란 무엇인지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알지도 못하는 상태로 무언가를 결론지을 수는 없다. 미지의 것이 어떻게, 어느 순간에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사람을 덮쳐 변모하게 하는지 A는 잘 알았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모르는 채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잠시 숨을 들이켠다. 그리고 마침내 일어났다.
그날 A는 할 일을 마치고 라노시아로 향했다. 길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만이라는 말이 걸맞은 방문이었으나 그는 헤매지 않았다. 오두막 하나를 앞에 두고서 A는 잠시 멈춰 섰다. 동그랗게 말아쥔 손으로 나무문을 천천히 두드렸다. 안에서 잠시 인기척이 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익숙하고도 낯선 모습이 된 C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
말을 마치기도 전 C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뻗은 손이 A의 손목을 향해 쇄도했으나 그는 피하지 않았다. 기꺼이 붙들리자마자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게 웬일이야? 꼬맹이.”
“물어볼 것이 있어서.”
“물어볼 것? 아니, 이게 아니지.”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가 놓은 C이 두어 걸음 비켜섰다. 그리고 가볍게 고갯짓했다. A는 군말하지 않고 따랐다. 작게 실례합니다, 하고 말하며 들어선 C의 집안에선 메마른 들판 냄새가 났다.
그들은 거실 소파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손에는 차를 두 잔 쥔 채였다. 찻잔 안의 얼음이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거렸다. 무엇이 궁금하냐고 C은 물었다. 그 순간 A는 미묘한 향수를 느꼈다. 그는 어쩐지 이후 이어질 일들을 알 것만 같다는 기이한 환상, 혹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초월하는 힘과는 결이 다른 직감의 일종이었다.
“글을 쓰고 있어.” 하고 A가 천천히 말했다. 좋은 일을 하네, 하고 C이 대답했다. 용건을 꺼내기 전 A는 다른 것을 물었다.
“글은 항상 썼는데.”
“그것들은 기록이지. 네가 굳이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조금 더 내밀한 것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굳이 구분을 뒀을까 싶은데.”
숙련된 모험가의 예리한 직감인지 뭔지. C의 날카로운 통찰에 A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지. 가벼운 순응에 C이 씩 웃고서 물었다.
“그래서, 무슨 글이길래 그래?”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도자기 찻잔의 표면에 맺힌 찬 물방울을 손끝으로 훔치는 속도만큼이나 느리게 A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저씨는 모험가지.”
“모험가였지.”
C이 정정했다. A는 어미가 주는 차이를 가만히 곱씹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아저씨는 모험가였어.”
“그래.”
“내게 모험을 권한 게 아저씨야. 아저씨의 제안에 응해서 나는 모험을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렀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꼽을 때마다 들어가는 일이야. 자랑거리기도 하고.”
“왜 그랬어?”
C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뜸을 들이고서 그는 작게 웃었다. 그때 이미 말했던 것 같은데, 하고 중얼거리는 C을 바라보며 A는 고개를 저었다.
“D를 찾아 나서라는 말이었다는 걸 알아. 하지만 정말 그뿐인가? 왜 하필 모험이었어? 그때 나는 모험가라는 직업에 관해 제대로 생각해 보지도 않은 초짜였는데.”
“…….”
“일기를 쓰고 있어. 아니, 쓰려고 하고 있어. 단지 제대로 쓰이지 않을 뿐. 첫 문장 이후로 진도가 나가지 않아. 제안해 줬던 내 친구가 말하기를, 나의 이야기를 쓰라고 했고 나는 모험을 주제 삼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뿐이야.”
수면에 얼굴이 비쳤다. 동그란 파동과 함께 낯이 일렁였다. 찻잔을 한번 기울이고서 A는 무심히 말을 마쳤다.
“그래서 난, 아저씨에게 모험이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
글이라는 건 결국, 실체 없는 것을 물질로 남기는 작업이다.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을 기록으로써 남기고 싶지 않다. 종이에 낱말을 긁는 그 순간부터 무엇인가가 소실된다면 애당초 그라하의 바람과도 어긋나지 않는가. A는 C에게도 제 마음이 충분히 전해졌으리라 확신했다.
C은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이 없었다. 어려운 질문이네, 하고 중얼거리고서는 오랫동안 뜸을 들였다. A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바싹 마른 볕이 C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오랜 간격을 두고서 C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익히 들어본, 동시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C의 말들에 A는 귀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흔들리는 찻잔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됐을 무렵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네가 모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 못해. 네가 겪은 일들을 단순히 모험으로 치부해도 되는지부터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현관에서 A를 배웅하며 C이 말했다. A는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의 말을 들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멀지 않은 들판에서 풀잎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장대비가 내리는 것 같다. 또 어쩌면 마른 종이에 펜촉을 긁는 소리처럼도 들린다.
“하지만 나에게 그랬듯, 나는 네가 모험이라는 것을 마냥 슬프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모험은 계속 이어지는 거잖아. 서글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결국 우리는, 지평선에서 해가 떠올라 들판이 새빨갛게 물드는 광경을 보며 그 모든 여정에 가치가 있었다고 굳게 믿게 되지.”
“…….”
“모험가란 그런 족속들이 아니겠어?”
C이 부드럽게 웃었다. 마침표를 찍듯이 그가 손을 흔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A는 C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서글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끝내는 그 모든 여정에 가치가 있었다고 굳게 믿게 되는 것. 계속 이어지는 것. 언젠가, 빛으로 가득한 또 다른 세계의 친구에게서 들었던 말과 엇비슷한…….
C은 A에게 모험을 권유한 까닭이 모험 그 자체에 있다고 말했다. 모험이란 가치를 찾아내는 걸음걸음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라면서.
A도 동의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들을 되짚을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분명한 감정에 휩싸이고는 했다. 그것들은 마치 오래전 A를 짓눌렀던 뭉치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A의 심장께를 무겁게 했다. 여정 하나가 결말에 다다를 때마다 A는 다양한 감각들을, 이를테면 환희 또는 슬픔 또는 절망 같은 것들에 젖어 들었으나 그것들이 A 자신을 꺾게 두지는 않았다.
어쩌면 중독인가? 들판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A는 가만히 생각했다. 동료들과 힘을 합쳐 사건을 마무리했을 때 느껴지는 맹렬하고도 광막한 감정에 마음을 빼앗긴 걸까? 그래서 모험을 관두지 못하는 걸까?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결론은 아니었으므로 A는 몸과 함께 생각을 뒤적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째서 A은 모험을 멈추지 않는가. C이 말하는 대로 ‘그런 족속’이라서? 결말이 아름답다면 모든 고생은 차치할 수 있는,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서?
그렇지만 사람과 사랑이 남긴 상흔은 여전히 A의 심장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좋은 결말을 맺었으니 된 거야, 하고 모든 걸 뒷전으로 내던질 수 있을 만큼 태연한 사람이 아니었다.
A는 제게 초연한 면모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하지만 무작정 회피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지 않은가. 괴로운 기억을 모조리 저변으로 던져놓고 다음 모험을 준비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A의 걸음이 멈추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어째서 모험을 계속하는가. C에게 들은 이야기와 A의 이야기에는 어떠한 교집합이 있는가?
질문은 결국 처음으로 돌아왔다.
알아야 했다. 모험이란 무엇인지.
그는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다. 뺨을 간질이는 풀잎을 느끼면서. 눈을 감은 채로.
모험은 길고 지난했다.
새벽의 혈맹에 가입하는 것이 모든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무턱대고 떠났던 모험에 명확한 수단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철저히 본인의 사익을 위한 일이었으나 그 사실이 부끄럽지는 않다.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아니까. 닥치는 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을 전부 이용하려고 했고 그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등불이 꺼진 날,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어쩌면 모래의 집이 무너진 그날은 아이테리스가 그에게 남기는 처절한 전언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네가 걷게 될 길은 이만큼 지난하고도 고통스러운 길일 거라고. 그렇다고 해서 그날 희생된 사람들의 목숨을 고작 상상 속 예언 따위로 치부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그렇게 이어지는 연회. 그렇게 도피한 곳에서 마주친 이슈가르드 교황청.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