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랑
‘당신만의 휴식처를 찾아드립니다!’
B은 제 눈앞에서 팔랑이는 대문짝만한 팸플릿에서 눈을 뗐다. 화려한 동시에 어딘가 조잡하게 느껴지는 종이의 코팅이 사무실 백열등을 받으며 반짝거렸다. 눈이 아프네. 속으로 짧게 중얼거리며 그는 쥐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어때?”
종이 뒤에서 탈색모가 불쑥 튀어나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코팅된 홍보물보다도 반짝반짝 빛난다. B은 잠시 고민했다. 어떻기는 뭐가 어떻지. 무슨 반응을 원하는 건지. 갑자기 사람 눈앞에 조잡한 팸플릿을 들이미는 건 예의가 아니라거나 이런 건 여행사 측에서 야심 차게 겉을 꾸몄을 뿐 실상은 대개 단순한 패키지 여행과 진배없을 확률이 높다거나. 그도 아니면 자신뿐 아니라 네 일정도 앞으로 석 달쯤은 빈틈없이 차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거나.
B은 A가 가져온 팸플릿의 어디부터 어디까지 지적해야 하는지 짧게나마 가늠하다가 포기했다. 무의미한 소모였다. B은 고개를 저었고, 그런 광고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있다면 쌓여 있을 서류나 하라고 잔소리했으며, 동시에 이야기를 들은 A가 어깨를 축 늘인 채로 제 사무실을 떠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A는 대담하게 행동했다. 그의 손이 책상 위를 거침없이 침범했다. B의 물건들을 이리저리 밀고 재배치하더니 자리를 만들었다. 빈자리에 탕 소리를 내며 팸플릿을 내려두고는 웃었다. 강한 파도에 쓸려나간 것처럼 불규칙적으로 흐트러진 물건들을 내려다보며 B이 한숨을 쉬었다. 이건 불길하다. A는 때때로 예측하기 어려운 일을 저질렀으며 B은 그 사실을 그다지 달갑게 여기는 편은 아니었다.
“가끔은 놀러 다녀야지. 게다가 테마도 휴식처잖아, 휴식처.”
“휴식은 일을 전부 끝낸 후에 누리는 거죠. 듣기로는 A 군 책상 위에서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곡소리를 내고 있다던데.”
“아니야! 그것들은……, 그것들은 전부 처리하고 있어. 정말로! 일에 지장이 가지는 않아, 응.”
“진짜로?”
“……아, 아마도?”
B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B의 심기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A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이미 신청했다느니, 무를 수는 없다느니, 기타 등등. 어쩌면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잖아, 이 여행사가 다 후기가 괜찮았어, 아니 그리고 들어봐 삼촌 내가 진짜 힘내서 예약 잡은 거라니까…….
A의 목소리가 갈수록 다급해졌다. B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올렸다. 쨍한 빛이 눈을 쐈다. 교체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 전구 탓에 영 눈이 시리다.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리고 나서야 A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난감한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 거의 울상처럼 보이는.
“이 여행 다녀와서 자기만의 휴식처를 찾은 것 같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런 종류의 후기가 진짜 많았단 말이야.”
“…….”
“혹시 알아? 삼촌도 그런 휴식처 같은 장소를 찾게 될지!”
A가 황급히 외쳤다. 순간, 찰나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미세한 간격을 두고서 B이 멈춘다. 눈을 가린 손을 내린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눈꺼풀 뒤에 쌓인 눅진한 피로감을 단숨에 체감하며 그가 벽면으로 걸어갔다. 손끝에서 걸리는 전등 스위치를 툭 내린다. 불을 끄고 나서야 잇새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요.”
“막 던지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어, 진짜?”
“그렇게 해요. 이미 예약까지 걸어놨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순식간에 침침해진 방안에서 B이 중얼거렸다. A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 팸플릿을 아무렇게나 구겨 쥔 채 달려와서는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는 일정 빼둘게, 아니 사실 이미 빼뒀어, 따위의 이야기들을 부산스럽게 늘어놓다가 곧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며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들이닥친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무슨 해일이 몰아치는 것처럼.
B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벽면에 난 큼지막한 창문에서 가로질러 비치는 햇살이 발치에 고인다. 연주홍 빛살과 웅덩이에 걸친 발을 툭툭 흔든다. 빛과 함께 그림자가 커진다. 일렁인다. 그걸 지켜본다.
알 수 없었다. 거절하지 않은 까닭을.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거나 그것들이 자신을 압도하게 둘 만큼 무르지 않았다.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그는 현실을 사고하고 판단했다. 그런 면에서 A의 부탁은 다소 무리한 면이 있었다. 일정은 빼곡하게 차 있었고, 책상 위에 올라오는 서류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며, 단순 요원인 자신은 그렇다 쳐도 지부장인 A까지 자리를 비운다는 건 상당한 위험 부담을 떠안는 일이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승낙했다. 빛살을 내려다보던 B은 차분히 가라앉힌 마음으로 그다음 문장을 적었다. 그렇다면 어째서인가. 까닭을 알아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으므로 B에게는 이유를 캐낼 의무가 있었다.
걸음을 틀어 책상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고 종이 한 장을 꺼낸다. A라는 파도에 밀려났던 만년필을 모래사장 속에서 조개껍질을 파헤치듯 주워들었다. 그리고 백지를 내려다본다. 고민한다. 무엇을 가장 먼저 적어야 하는지 어림한다. 짧은 망설임 끝에 그는 첫 번째 정의를 적었다.
첫째. 이것은 일종의 실험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직전의 것보단 조금 더 길다.
둘째. 실험은 B이 A의 여행 부탁을 거절하지 않은 까닭을 밝혀내고자 한다는 의의가 있었다.
셋째, 넷째, 다섯째도 윗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모든 실험이 으레 그러하듯 시작하기에 앞서 계획서를 쓰는 마음가짐이랄까. 여섯째, B은 연구 윤리를 위반하지 않는 한 실험에 최선을 다해 임한다는 문장 끝 마침표를 찍고서 마침내 그는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어디에서 어떻게 공명했는지를 알아낼 것이다. 그리고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다짐하며 B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들은 낮 세 시가 조금 넘을 무렵 집에서 나왔다. 이십 인치 캐리어를 각각 하나씩 쥔 채였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거리였다. 햇살은 따사로웠고 초여름 특유의 미약한 습기가 폐부에 스미는 것 같은 감각이 생생했다.
열심히 이야기를 늘어놓는 A의 옆얼굴에서 빛이 비쳤다. 투명하게까지 느껴지는 피부 위로 특유의 검은 눈이 반짝였다. 그는 반박할 여지가 없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같이 여행이라니, 이게 얼마 만이에요, 아 처음인가, 따위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는 A에게 박자를 맞추어 고개를 끄덕였다.
A를 아주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B은 생각하고 있었다. A의 통보로부터 시작한 실험은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보지 못한 채였다. 아직 알아내는 과정이었다. A의 권유를 받아들인 까닭을.
그래도 아주 진척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몇 가지 가설은 나왔다. 첫째. 제안한 것이 A라서. 지부장인 그는 밀려드는 일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B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 이참에 도피를 꾀하는 A를 조금이나마 돕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다지 신빙성 있는 가설은 아니었다.
그보다 유력한 가능성을 지닌 건 두 번째였다. 여행사에서 내세운 표어가 B의 마음속 어딘가와 공명했다는 것.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었다. B은 언젠가 A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했다. 그는 자신들을 일컬어 다소 외로워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B은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고 A 또한 구태여 이후 같은 주제를 끌고 나오지 않았다.
완결이 나지 않은 채로, 여전히 결말이 열린 채로, 우리 다소 외롭지 않냐는 질문에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B은 존재했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여전히 불명이었다.
고독한가?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캐리어의 잔요동에 집중하며 B은 무심코 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대답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동시에 그런 자신에게 미약한 불쾌함을 느꼈다. 스스로 알지 못하던 약점을 제 손으로 파헤친 듯한 불유쾌한 감각이 발끝에서 울렁였다.
곧바로 부정할 수 없다면 그건 긍정과 다를 바 없지 않나. B은 제게 정답을 앞두고 머뭇거릴 만한 여유가 있었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놀라웠다. 그런 것이 있었더라면 왜 어렸을 적 타인에게 부여받았던 난제에선 그토록 거리낌 없었나. 이건 일종의 기망이 아닌가.
“삼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B은 서서히 상념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신호등 앞이었다. 건너편 버스 정류장 근처에는 마찬가지로 캐리어를 든 사람들이 저들끼리 모여 득시글거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조금 더 강렬한 경험이었다. 당신만의 휴식처라는 표어는 과대광고 아닐까. 어차피 단체 여행인데.
냉소적인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 그가 제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두 사람을 힐끔거리는 시선에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무심코 돌아갔다. 그림자가 진 옆얼굴에서 미약한 기대감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눈을 빠르게 깜빡인 A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가 웃는다. 잇몸이 보이도록 활짝. 그러며 말했다.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휴식처 말이야. 그렇지, 삼촌?”
곧바로 부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긍정이다. 자신이 직전 정의한 문장을 속으로 곱씹으며 B은 대답하지 않았다.
뜻밖의 일이 벌어진 건 공항에 도착한 후였다. 가이드 대신 안내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각각 일행과 함께 데스크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약간의 기시감이 일었다. 예상과 다르게 일이 흘러갈 때 돋치는 바로 그 감각이었다. B이 눈을 찌푸렸고 A는 낯이 환해졌다. B의 손을 거침없이 잡아 이끈 A가 데스크로 달려갔다.
“A 이름으로 두 명이요! A, B입니다!”
느닷없이 달려온 두 청년이 자신들의 고객임을 확인한 안내 직원이 친절하게 웃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하는 말이 뒤따랐다. 데스크 위에 항공권 두 장과 팸플릿 여러 장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것들이 동의서 아래에 가리기 직전 B은 눈에 띄는 문장을 발견했다. ‘깊은 산에서 즐기는 산장 체험’.
“팸플릿이랑 안내문 읽어보시고 최하단에 서명해 주시면 되세요. 이쪽은 티켓이고…….”
A가 팸플릿과 안내문을 B에게 넘겼다. 안내문은 그럭저럭 익숙한 낱말들의 조합이었다.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금지하는지, 피치 못한 사고가 났을 때 여행사는 어떻게 대처할지, 보상은 어떻게 받는지, 어쩌고저쩌고. 얇은 종이를 맨눈으로 한번 훑어내린 B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팸플릿이었다. 직전 B이 보았던 바로 그것. 짙푸른 산맥이 광활하게 펼쳐진 사진 위에 적당히 디자인을 가미한 폰트로 표어가 적혀 있었다. B이 읽은 문구는 그 표어였다. 팸플릿을 펼치자 안쪽에선 목적지에 관한 정보와 숙소, 그리고 숙소 근방에 돌아다닐 만한 장소 몇몇 군데를 소개하고 있었다.
먼 알프스산맥을 대신하여 당신을 위해 찾아낸 고요함의 정수, 사람과 업무에 치인 당신에게 자연이 주는 고독한 위로……. 팸플릿 소개말을 읽어내리던 B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갈 거라면 탁 트인 곳이 좋을 텐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가 A를 곁눈질했다. 이를테면 바다 같은. 팸플릿에 적힌 낱말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느릿느릿 손을 뻗었다. 그리고 볼펜을 꺼내 안내문에 서명했다.
“간단히 원하는 요소들을 적으면 여행사 측에서 임의로 배정해 주는 것 같더라고.”
A가 곁에서 말했다. 이미 제 몫의 안내문에 서명을 마친 후였다. B은 서명한 종이를 넘기고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문과 티켓을 교환하고 수속을 밟으러 향하며 그는 물었다.
“A 군은 뭐라고 적었나요?”
“응? 나?”
“팸플릿에 적힌 문구가 뭐랄까.”
B이 어깨를 으쓱였다. A의 뺨이 언뜻 벌게졌다. 낯을 가리는 것처럼, 혹은 부끄러워하는 사람처럼 슬쩍 몸을 꼰 그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곧장 대답하진 않았다. 말할 기색이 없어 보였으므로 B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탑승장으로 향할 시각을 알람으로 맞춰두었다.
B이 휴게실 근처에 앉아 급한 연락이라며 온 문자들을 처리하고 있을 때 A는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면세점에서 삼촌을 닮았다며 인형 하나를 사오더니 간식이 필요할 것 같아서, 라며 초콜릿을 한 움큼 사오기도 했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통에 제대로 집중할 새도 없었다. B은 우선 내버려두었다. 인형은 급한 대로 배낭에 달았다.
“쉴 수 있는 곳. 조용하고, 적적하고, 우리밖에 없고……. 그런 장소가 좋다고 했어.”
A가 그렇게 말한 건 편의점에서 사 온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직후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살짝 상기된 목소리는 곧 삼촌도 마실래, 하는 질문으로 끝을 맺었다. B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팸플릿을 내려다보았다. 휴식처. 팸플릿만 보아서는 여행사는 알맞은 장소를 섭외해 준 듯했다. 그렇군요, 하고 짧게 대꾸하자마자 알람이 울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아랫배 어딘가에서 불분명한 감각이 울렁거리는 듯했다. 제 실험이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는 자각이 불현듯, 그러나 예리하게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B이 걸음을 옮겼다. 카페 매대에 정신이 팔린 A를 부르고 승강장으로 향하는 내내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A가 말했던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정렬되지 않은 채 돌아다닌다. 마치 맨바닥에 아무렇게나 흩뿌린 한 움큼의 모래 같다. 자각 없이 걸었다가 모래를 밟고 눈을 찌푸리게 되는 정도의 기시감이 그의 발뒤꿈치를 졸졸 따라다녔다.
쉴 수 있는 곳, 조용하고, 적적하고, 우리밖에 없는. 그리고 팸플릿에 적힌 고독한 위로라는 말. 거절하지 않은 이유. B은, 숙련되고 능숙한 연구원의 감으로, 저 모든 단어가 연결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실험의 완성, 가설의 증명이 코앞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뿌연 안개 속에서 갈피를 잃은 듯도 하다.
흐려진 이성을 다잡아야 한다. 이런 때일수록 더더욱 실험은 이론에 기대어야 했다. 감에 의존하다 보면 기껏 성과를 앞에 두었음에도 찾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비행기에 오르고 등받이에 몸을 묻으면서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는 안 돼. 나는 알아야 해.
무엇을?
거절하지 않은 까닭을. 이다지도 마음이 혼잡한 이유를.
복잡한 머리를 안고서 그들은 날았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처음 들어보는 나라, 처음 들어보는 도시, 처음 들어보는 마을의 연속이었다. 낯선 땅에 내리자마자 A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짐을 찾고는 거침없이 차를 빌렸다. A 군한테 면허가 있던가요, 하고 묻자 그는 짓궂게 웃으며 삼촌이 운전해 줄 것 아니냐고 되받아쳤다.
산길은 까다로웠다. 한 방향으로 난 포장도로였지만 올라갈수록 길이 꼬불꼬불해졌다. 올라갈수록 우거지는 녹음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의 집중을 요구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B은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침대에 몸을 날렸다. 산길이 빨아먹은 것처럼 느껴지는 기력을 충전하려면 별수가 없다고 스스로 뇌까렸다.
“벌써 지쳤어?”
“A 군은 쌩쌩하네요. 젊음이란.”
“에이, 삼촌도 나랑 열댓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그 열댓 살이 생각보다 큰 차이예요. 젊은 A 군은 십 년 후에나 알게 되겠지만.”
A가 입을 비죽였다. 그가 입을 열지 않았기에 안방은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B은 눈만 굴려 방을 살폈다. 벽면이 커다란 통유리창으로 된 아늑한 방이었다. 통나무집이라는 주제에 맞게 바닥과 벽, 천장까지 전부 나무 재질이 돋보였다. 고풍스러운 느낌을 내는 샹들리에가 천장에 달려 있었지만 침구와 화장실은 전부 최신식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무난하다. 사면을 둘러싼 숲은 완전한 야생과 조경이 적절히 어우러진 듯한 분위기를 냈다. 여행객에게 오지에 혼자 남았다는 공포를 조성하지는 않을 만큼만 다듬어진 채였다. 근처에는 정말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긴급 상황에 대비해 현지 가이드에게 직통으로 전화를 걸 수 있다는 열한 자리 번호만이 그들을 속세와 잇게 해주는 듯했다.
고요했다, 이곳은.
희끄무레한 적막 너머에서 자그마한 새 소리가 들렸다. B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다랗고 검은 머리칼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눈가에 쏟아졌다. A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눈치를 살피는 건지, 주위를 둘러보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지. 잠긴 눈으로 사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B은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고독이란 곧 침묵인가. 이 적요함이 외로움인가.
“삼촌?”
A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B은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A를 올려다보았다. 말간 시선이 그를 향한다. 올려다본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구하고 상냥한 빛으로 반짝인다. 햇살, 멀지 않은 창문에서 기우는 녹음 빛살이 옆얼굴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 떨어지는데.
“외롭진 않아요?”
충동적으로 B이 물었다.
A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눈을 접으며 웃었다.
대답은 없었다.
시간은 무료하게 갔다.
그들은 대체로 원만하게 지냈다. 함께 지내는 데에 도가 튼 사람들이었으므로 불필요한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다. 출근을 제외한 모든 일상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감각으로 B은 하루하루를 살았다.
근방에 놀 곳은 전부 자가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내려가야 다다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정 심심하거든 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A를 설득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날 운전하던 삼촌 얼굴이 얼마나 험악했는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나 뭐라나.
그들은 여행 내내 오두막에서 지냈다. 기껏해야 산책로를 따라 밖으로 쭉 한번 나도는 정도였다. 날은 적당히 시원했고 미묘하게 후덥지근했다. 오두막에서는 이런저런 보드게임을 하고, 간혹 오는 급한 연락을 드물게 받고, 그러다가 할 일이 떨어지면 대청처럼 나온 마당에 앉아 새 소리를 들었다.
여행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B은 A에게 물었다. 이런 여행을 원했냐는 질문에는 어떠한 악의도 없었다. 그저 문장 그대로의 의미였다. 되레 그는 A가 이것을 일종의 비난으로 이해할까 단어를 고르는 일에 신중히 처리했다. 물음에 A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가, 곧 활짝 웃으며 반쯤은, 하고 대답했다.
여행 마지막 날 짐을 싸며 B은 자신이 내심 여행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씁쓸한 아쉬움이, 단순한 실망감이라고 포장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 감정이 목구멍 안쪽에서 술렁였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의문은 오히려 늘었다. 거절하지 않은 까닭도, 고독하냐는 질문도, A의 대답 아닌 대답조차도. 옷가지를 정리하고 캐리어 뚜껑을 닫으며 그는 조용히 생각했다.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므로 실험은 실패다.
슬프거나 속상하진 않았다. 실험이란 무릇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며 성공으로 나아가는 법이니까. 단지 B은 제 목구멍 안쪽에서 잉걸불처럼 울렁이는 이 실망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마지막 밤은 고요하게 갔다.
미리 싸둔 짐을 현관 앞에 밀어둔 채로 그들은 저녁을 먹었다. 시답잖은 대화를 소소하게 나누며 영화를 봤다. 밤이 깊어질 즈음 A가 먼저 일어났다. 산책 한 바퀴만 돌고 올게, 하고 그가 말했다. 삼촌은 씻고 있으라는 말이 뒤따랐다. B은 바깥을 힐끔 곁눈질했다. 어두웠다. 이곳은 밤이 이르게 찾아왔다. 저녁나절만 되어도 손전등이 필요했다.
“나가기엔 조금 늦지 않았어요?”
그렇게 묻자 A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그는 답했다. 이 지부장을 믿으라는 장난스러운 대꾸에 B의 눈이 언뜻 가늘어졌다. 아주 늦게 오지는 말라는 당부가 잇따랐다. A는 손을 흔들었고, 캐리어를 제치고 신발을 신었으며,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오두막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도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B은 무심코 깨달았다. 혼자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렸다. 이곳저곳에서 가구들이 간헐적으로 달그락거렸지만 그뿐이었다. B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문득 공항에서의 A가 떠올랐다.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제게 물건들을 한 아름 안겨주던 A. 그리고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폐부, 흉곽, 그 안쪽에서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허무를 매만지듯 명치를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는 자리는 모르지만 없어진 자리는 안다더니. 이게 딱 그런 꼴인 걸까.
캐리어에 달린 자그마한 인형이 흔들렸다. 공항에서 A가 뽑아준 것이다. 다가가 손아귀에 쥐어보았다. 말랑하고 복슬복슬했다. 그때는 온갖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던 터라 이 감촉을 느낄 재간이 없었는데. 언뜻 눈이 가늘어진다. 오두막에서의 며칠도 매한가지였다. A 하나가 일으키는 소란을 상상하며 B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A가 없는 오두막은 고요하다.
존재하지 않더라도 끊임없는 소음을 되풀이하는 곳이 좋았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를테면 바다 같은.
그는 비관주의자가 아니었다. 허무주의자는 더더욱 아니다. 세상만사가 무의미하다고 믿는 부류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감각, 몸에 부피가 사라진 것 같은 감각, 무엇이든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공란이 된 듯한 기묘한 감각은 당최 무엇인가. 이건 우울이 아니라고 김이 서린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는 생각했다. 절망도 슬픔도 아니다. 그만큼 깊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이것은 되레 갓 딴 과일을 베어 무는 듯한 날것 그대로의 감정과 닮았다.
쓴 맛이 난다. A는 어째서 대답하지 않았는가.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A는 돌아오지 않았다. 머리를 말리고 가볍게 로션을 바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둠은 갈수록 새까만 안개처럼 숲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안방에 난 창문 바깥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희끄무레한 어둠과 단단한 알맹이 같은 침묵이 사위를 틀어막았다고 느껴질 무렵, B은 일어났다. 그리고 손전등을 들고서 오두막을 나섰다.
미묘한 습기가 뺨에 달라붙었다. 시원한, 그러나 어딘가 미약한 소금기가 느껴지는 바람이 B을 부드럽게 감쌌다. 누군가 잘못 쏟은 검은 물감과 비슷한 형태로 사위가 새까맸다. B은 말없이 손전등을 켰다. 기다랗게 빛의 길이 났다. 그걸 따라 걷기 시작했다.
큰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A는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를 돌겠다고 말했으니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걱정은 되지 않았다. 말마따나 그는 N시의 지부장이었다. 고작 어둠, 다른 무엇의 비유도 아닌 그저 직관적인 어둠에 삼켜질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숲은 어둡고 차가웠다. 뜻 모를 습기가 뺨을 스칠 때마다 B은 자신이 어디론가로, 그러나 누구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은 채 홀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아, 하고 그는 스스로 중얼거렸다. 이것은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다소간 불쾌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수풀을 헤치고 나뭇가지와 마른 잎을 밟으며, 거기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사부작거림에 귀를 기울이며, B은 담담하게 또 다른 실험의 가설을 세웠다. 둘째는 없을 첫 번째.
어쩌면 B은 외로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자각 이후에 무엇인가가 뒤따라야 하지 않는가? 가설을 세웠다면 다음 단계, 이를테면 가정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적어도 눈앞에서 치우는 법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나. 내리막길을 따라 걸으며 B은 생각한다. 바람이 습해진다. 짠 내가 난다. 시끄러운 머릿속에서도 그는 문득 궁금해진다.
근처에 바다가 있던가.
심란한 마음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물음이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주위를 둘러본다. 그는 여전히 혼자다. 사위는 까맣고 어느샌가 습해진 바람이 코끝을 간질인다. A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그 사실은 B의 흉곽을 뜻 모를 방식으로 옥죄고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그는 귀를 기울인다. 냄새를 맡는다. 피부로 느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미약하게, 마치 무엇인가가 쓸려갔다가 돌아오는 듯한 소리가 난다…….
비합리적이게도 B은 그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A가 그곳, 어디인지 모를 곳, 바다인 것만 같은 곳에 있으리란 보장조차 없다. 하지만 그는 걷는다. 파도 비스름한 소리가 나는 장소를 향해서. 점차 가빠지는 숨소리가 적요하던 사위를 서서히 메운다. 거친 호흡과 씨근거림에 마치 누군가가 제 곁에 있는 듯한 착각이 인다.
가까워진다. 성큼.
가로막은 덤불을 팔로 헤치고 발을 내디딘 순간. 그는 내려다본다. 단단하게 다져진 뭍이 아니다. 물과 뭍의 경계선, 그렇기에 물렁물렁하고 푹신한 모래사장이 그 앞에 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보였다. 작은 뒤통수. 그 너머 파도치는 물을 응시하는 뒷모습이.
“A 군?”
B이 중얼거렸다. 거의 동시에 상대가 등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다. 어둠 속에서. 맞닿는다. 시선과 시선이. 조금 놀란 것처럼 동그래졌던 눈이 곧 반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꺾인다. 그렇게 웃는다.
“글쎄, 좀 걷다가 파도 소리가 들리지 뭐야. 바다가 있는지 궁금해서 왔는데, 이것 봐.”
광활한 풍경을 보여주려는 듯 A가 살짝 비켜섰다. B은 천천히 걸음을 뗐다. 느리게 나아갔다. 그러다가 멈춘다. 파도치는 물결이, 포말이, 발등을 살짝 덮을 듯 말 듯한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바다인진 모르겠어. 아마도 호수지 않을까? 그런데 그건 딱히 중요하지 않은 것 같지.”
“…….”
“봐, 끝도 안 보여.”
A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수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과 맞물린 탓에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것만 같다. 그들은 뭍에 서 있는 것도, 물에 서 있는 것도, 하늘에 서 있는 것도 같다. 머리 위에서 무수히 흔들리는 밤별, 쏟아질 것만 같은 광경, 그것들이 발치에서 철썩이며 발끝을 점점이 적신다. 바람이 분다. 머리칼을 헤집고 달아난다. 고요하다. 그리고 조금은 외롭다.
“외롭냐고 물어봤지.”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