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앞서나가던 A이 우뚝 멈췄다. 엠과 재잘거리던 B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등에 부딪쳤다. 아야,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작게 났다. A이 힐끔 뒤를 곁눈질했다. 조금 벌게진 코를 문지르고 있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기에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신경을 날카롭게 벼렸다.
라노시아와 검은장막 숲을 잇는 골목과 같은 숲이었다. 검은장막 숲 출입을 거부당한 사람들이 떠돌아다니는 곳이기도 했다. 근방은 쌍사단과 흑와단의 관할 구역에 교묘히 걸쳐 있었다. 두 총사령부가 모두 신경 쓰는 지역이라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흑와단 측에서는 검은장막 숲 출입을 멋대로 재단하는 쌍사단을, 쌍사단 쪽에선 허가받지 않은 사람을 드나들게 하는 흑와단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쪽 관할이라니 이쪽 관할이라니 알력 싸움만 심하다는 뜻이었다. 서로에게 책임 소재를 떠밀려는 두 총사령부 덕분에 이곳은 역설적으로 둘 모두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일종의 공백 구역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잘 활용하는 건 역시 떠돌이들이었다. 개중에서도 질이 나쁜.
A, 하고 B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A은 손을 내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골목은 검은장막 숲으로 들어가려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구간이었다. 악명에 관해선 직전의 마을에서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A이 천천히 몸을 낮췄다.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풀잎이 흔들릴 때마다 누군가의 몸에 닿아 꺾이는 소리였다. 이런 면에선 잔뼈가 굵은 미카가 낮게 울었다. 경고가 담긴 울음소리였다. A이 고개를 반쯤 돌렸다.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는 B의 옆에 엠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A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어딘가 맹하던 엠의 커다란 눈에 일순 빛이 깃들었다.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검은 초코보가 깃털을 부풀렸다. 그리고 셋, 둘, 하나.
“뛰어!”
“에, 악!”
B의 반응이 끝나기도 전에 엠이 움직였다. 단단한 부리에 B의 옷을 당겨 물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 가벼운 몸이 풍선처럼 나풀거렸다. 잠까, 아, 아, 아, 안……. 비명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빠르게 멀어지는 B와 엠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A의 고함과 함께 수풀 속에서 날카로운 화살이 쇄도한 탓이었다. 몸을 젖혔다. 유연한 허리를 틀어 화살을 피했다. 곧장 자리를 박찼다. 근처 나무를 붙들고 곧장 올랐다.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한 즉시 활을 꺼냈다. 화살을 단단히 먹이고 있는 힘껏 시위를 당긴다. 쏜살같이 튀어나간 첫 화살은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말마가 터졌다.
A은 지체하지 않았다. 다음, 그 다음 화살을 먹였다. 시위를 당기고 놓는 손길에 망설임은 없었다. 다섯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었을 때였다. 커다란 창이 발밑을 꿰뚫을 것처럼 솟았다. 동시에 수풀에서 사람이 나왔다. 살아있는 놈은 총 셋. 한 놈은 어깨에 화살을 맞았고 다른 놈은 얼굴에 미카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창을 든 사람만 멀쩡하다. 아마도 저 사람이. 활을 등에 이고서 A이 훌쩍 자리를 피했다. 자리가 발각되었다. 궁사는 제 위치를 숨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법이었다. 나무와 나무를 능숙하게 오갔다. 나뭇가지나 이파리를 던져 위치를 혼란시켰다. 숨을 죽이고 몸을 숨겼다. 이곳저곳을 찔러보던 도적들이 저들끼리 욕지거리를 씨부렁거렸다. 그냥 두고 간 거 아무거나 주워, 하고 말하던 바로 그 순간. A이 느리게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어깨에 활을 맞은 사람이 두고 간 게 없는데 어떡해, 하고 신경질을 부리던 바로 그 찰나.
명쾌하게까지 느껴지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맹렬한 속도로 쇄도하더니 우두머리의 어깨를 정통으로 파고들었다. 우두머리가 단말마 같은 비명을 꽥 내질렀다. A이 씩 웃었다. 한 발 더. 정확하게 조준하던 바로 그때였다. 우두머리 옆에 서 있던 남자의 활 시위가 정확하게 A을 향했다.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착각에 차올랐던 그 순간. A이 몸을 바짝 틀었다. 재빠른 속도로 쏘아진 화살이 A의 어깨를 찢고 지나갔다.
“뭐에 맞은 것 같은데.”
“어디다가 쏘는 거야! 조준 좀 제대로 하란 말이다, 이 쓸모없는 자식아!”
우두머리가 벌컥 화를 냈다. 지금이다. A은 본능적으로 손으로 환부를 감쌌다. 핏방울이라도 떨어졌다간 완전히 낭패였다.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는 팔을 틀어쥐고서 그가 이를 짓씹었다. 짐이 없다면 한 손으로도 나무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기가 필요했다. 활과 화살을 든 채 나무와 나무를 오가는 건 적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내리기 적합한 상황은 아니었다. A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차라리 다른 쪽으로 유인을 해볼까? 일부러 먼 곳을 조준해 쏜다면? 하지만 B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은 지금 섣불리 유도했다가 그들이 만나기라도 한다면 정말 곤란했다. B는 심지어 몸을 보호할 만한 무기도 마땅찮았으니까. 눈을 찌푸리던 순간이었다.
어느 순간 사라졌던 미카가 수풀 속에서 괴성과 함께 튀어나왔다. 용맹하게 돌진한 초코보가 화살이 꽂힌 우두머리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우두머리가 숨 넘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저 망할 초코보 새끼!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육두문자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부하들이 미카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 누군가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A은 몸을 한층 낮췄다. 발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걸 보아 초코보, 혹은 다른 탈것을 탄 모양이었다. 미카를 잡으려 날뛰던 부하 하나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가 큰소리로 우두머리를 불렀다.
“누가 오는 것 같은데!”
“초코보 새끼는 해체하고 도망치든 말든…….”
“도망을 치긴 뭘 쳐?”
A이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부상 때문에 힘이 덜 들어갔다. 어느 정도 지혈되었던 환부에서 울컥 피가 터지는 감각이 생생했다.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통증이나 두려움보다는 숨길 수 없는 불쾌감에 시달리며 A이 상대를 조준했다. 빠르게 날뛰는 미카가 순간 펄쩍 뛰었다. 미카를 뒤따라 우두머리가 뛰어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A이 시위를 놓았다.
A이 밧줄로 우두머리를 꽁꽁 묶고 있을 때 쌍사단 대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선 A에게 대뜸 물었다. 부모님 어디 있니? A은 대답했다. 없는데요. 대원들의 낯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멍청한 얼굴들을 비웃으며 A이 우두머리를 툭 찼다. 우두머리의 허벅지에 화살이 박혀들자마자 부하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 쳤다. 혼자 남은 남자가 악을 쓰는 것을 무시하고 묶어두었다. 대원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같이 가주어야겠다는 말이 나오면 나도 튀어야겠다고 다짐하는데 그들이 물었다.
“혹시 B라는 애를 아니? 그 애도 비에라족이었는데.”
그 이름이 왜 거기서 나와?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물건들을 챙기다 말고 A이 허리를 폈다. 날카로운 시선이 대원들에게 닿았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매서운 눈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A은 B에게 쥐어뜯기듯이 안겨 있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B가 A의 옷자락에 냅다 눈물을 닦았다. 야, 하고 아무리 불러봐도 꺼이꺼이 흐느끼느라 대답도 없었다. 그러니까 요지는 이거였다. 엠이 B를 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을 때. B는 A이 죽을 줄 알고 울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허겁지겁 달려온 미카가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돌아갔다. 그 지점에서 A이 미카를 바라보았다. 중간에 어디로 샜나 했더니 B에게 다녀온 모양이었다. 초코보 주제에 뿌듯함과 오만함이 드러나는 표정으로 미카가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A이 한숨을 푹 쉬었다.
B의 말은 이어졌다. 미카가 제 엉덩이를 차고 돌아간 것에 관하여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미카가, 그 콧대높은 초코보인 미카가, 주인 곁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거라면, 어쩌면 A이 아직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씩씩하게 눈물을 닦고, 비록 하나도 닦이지 않은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말하고서, B는 비장하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서 근처 쌍사단 보초에게 찾아갔더니 수색대를 내어주었다는 거였다. 알고 보니 그들을 습격한 오합지졸 도적단이 요즘 길목마다 기승을 부려 곤란하던 참이었다나 뭐라나.
말을 마치고 나서 B는 시원하게 코를 풀었다. 그리고 팅팅 부운 눈을 문질렀다. A은 어색하게 B의 머리를 몇 번 헝클였다. 좀 길고 장황한 내용이긴 해도 결과적으로 쌍사단의 도움을 받기는 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없었더라면 A은 상처를 입고서 부하들과 싸워야 했을지도 몰랐다. 고맙다는 말을 툭 내뱉고서 A이 등을 돌렸다. 의도치 않은 사건에 발목이 잡히긴 했지만, 슬슬 잘 곳을 찾아야 했다. 시간을 너무 잡아먹힌 탓에 곧 있으면 저녁이었다. 숲은 해가 빨리 졌다. 어둠 속에서 마땅한 장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서둘러야 했다.
미카의 등에 짐을 실을 때 미카가 부리를 부딪히며 딱 소리를 냈다. 불만을 표하는 행동이었다. 성질 더러워 보이는 눈으로 미카가 A을 올려다보았다. A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뭐. 왜. 뭐. 적반하장으로 나가자 미카가 부리를 한 번 더 딱 소리나게 부딪혔다. 그리고는 고개를 팩 돌렸다. 이유 모를 행동에 A이 미카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칭찬 안 해줘서? 고기를 안 줘서? 이렇게 까탈스럽게 구는 초코보도 없을 거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A이 주머니를 뒤적이던 때였다.
“어! A, 너 팔!”
멀지 않은 곳에서 엠과 드잡이질하던, 정확하게 말하자면 엠에게 왜 나를 끌고 갔냐고 일방적으로 화를 내던 B가 외쳤다. 눈 깜짝할 새 그가 코앞에 있었다. A이 뿌리칠 틈도 없이 팔이 잡혔다. B가 피에 젖은 옷을 찢었다. 환부가 드러났다. 간신히 멎었던 얼굴이 다시 울상이 됐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괜찮다고 대답하기 전에 A은 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깊이 찢어져 있었다. 피가 말라 딱지가 붙어 있었다. 의식하지 않았을 때는 괜찮았는데. 뭐랄까, 한번 상기하고 나니 괜히 욱신욱신 화끈화끈 난리도 아니었다. 습관처럼 한숨을 내쉰 A이 B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그가 우는 소리를 냈다.
“괜찮아. 피도 멎었고. 자고 일어나면 낫는다.”
“그렇지만…….”
“그렇지만은 무슨 그렇지만이야. 약초 바르고 푹 자면 나아. 시간 없으니까 빨리 준비해. 마을로 돌아가기라도 해야지. 여기서 자다가 또 습격당한다.”
B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A은 B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고서 그는 미카를 툭툭 쳤다. 가자는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A과 미카가 먼저 발을 뗐다. 엠은 두어 걸음쯤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우두커니 서 있던 B가 소매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리고 나도 같이 가, 하고 외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거쳐 왔던 마을로 돌아간 그들은 여관에 방을 잡았다. 여관에 딸린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올라갔다. A은 그날 밤부터 열이 올랐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눈꺼풀 안쪽에서 일렁이는 열감에 몸이 찝찝했다. 이리저리 뒤척일 때 B가 깼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그가 A을 흔들었다. 너 열나, 하고 속삭이는 잠긴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속상함이 느껴졌다. 혼곤한 정신으로 A은 중얼거렸다. 약초 바르면 나아. 자라. B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우물거리다가 도로 닫았다.
열은 다음날 새벽에 내렸다. 그날 아침 A은 환부를 확인했다. 약초를 치덕치덕 발라두었던 곳이 반쯤 짓물러 있었다. 아무렇게나 뜯었던 약초에 독초가 섞여 들어갔거나, 화살에 독이 발려 있었거나. 둘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낮게 혀를 차고서 그는 붕대를 갈았다. B는 근처에 쭈그려앉아 일련의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눈동자가 언뜻 울렁였으므로 A은 B의 걱정이 생각보다 큰 모양이구나, 하고 추측했다.
미카와 엠을 축사에 맡겨두고서 그들은 시장으로 향했다. 도적떼와의 조우로 식자재가 상당히 상한 탓이었다. 군것질거리를 대신해서 샀던 사탕과 건과일이 무뢰배들의 발굽에 짓이겨진 채였다. 저잣거리를 돌며 A은 B를 힐끔 곁눈질했다. 여전히 다소 울적한 낯이었다. 어쩌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게 입에 단 것을 물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문득 생각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군것질거리는 필수적이었다. B의 입을 다물게 하고 생각을 끊는 데에 그만 한 것이 없었다.
“야. 이거 어때.”
오렌지필을 말려 만든 사탕을 집어들며 A이 물었다. 대답이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간식에서만큼은 호불호가 뚜렷한 B였기에 이건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A이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 B가 없었다. 얘 또 어디 간 거야, 하는 생각을 끝맺기 직전 시야 저편에 B가 잡혔다. 대여섯 걸음쯤 떨어진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언가에 완전히 정신이 팔린 것처럼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A이 사탕을 내려놓았다.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B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막 꿈에서 깬 사람처럼 B가 몸을 흠칫 떨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 카엘, 하고 중얼거리던 얼굴에 순식간에 빛이 깃들었다.
“너 여기서 뭐…….”
“이리와!”
“엉? 야!”
B가 A의 소매를 대뜸 잡아 끌기 시작했다. 뿌리치지 못할 만큼 힘이 센 건 아니었다. 하지만 A은 그러지 않았다. B의 얼굴이 환해진 채였다. 다치고 나서 이렇게 밝은 낯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래도 어느 정도 어울려줄 수는 있었다. 어디 가는데, 하고 투덜거리면서도 A은 B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B는 망설이지 않고 앞장 섰다.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A이 눈을 찌푸렸다. 괴상한 소리가 잇새를 새어나갔다. 멀리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북적이는 인파 안에서부터 진한 약초 냄새가 흘러나왔다. 설마, 하는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A을 잡고 사람들을 꿰뚫고 들어간 B가 줄을 서며 말했다.
“약초사 분이래! 네 상처 보여주고 치료받으면 좋을 것 같아서.”
A은 잠시 고민했다. 나도 어지간한 약초는 다룰 줄 안다고 하는 게 좋을까? 여기서 사람들한테 돈 뜯기는 것보다 내가 혼자서, 알아서 치료하는 게 훨씬 이득이라고 말하는 건. 고심하는 찰나에 B가 보였다.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숨기지 않는, 혹은 숨기지 못하는 뿌듯함이 얼굴에서 흘러넘쳤다. A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얌전히 줄을 서기로 했다.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상처를 치료하는 건 똑같다고 그는 스스로 위로했다.
줄은 생각보다 빠르게 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약초사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약초사는 생각보다 어린 환자의 나이에 놀란 건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A의 환부를 보았을 때는 심각한 표정으로 혹시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냐고 물었다. 숨죽인 질문에 A은 코웃음쳤다. B는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괴롭힘 당하는 쪽보다는 괴롭히는 쪽에 가까우니 걱정 말라고 말했다. 약초사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A은 B의 옆구리를 한번 툭 치고서 약초사의 손길을 피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약초사의 손길은 능숙했다. 이 마을에서 날붙이에 다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는 말했다. A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기실 날붙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A은 약초사가 쓰는 약초에 엄한 짓을 하지는 않는지, 약초가 아닌 그냥 풀을 붙여놓고 돈을 떼어먹으려는 게 아닌지 감시하느라 바빴다. B만 안절부절못했다. 다치는 사람이 많나요, 하고 묻는 목소리는 분명하게 주저하고 있었다. 진통 효과가 있는 풀을 환부에 덧바른 약초사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하고 묻는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호기심이 언뜻 묻어났다.
“비에라족은 처음 보는데요. 몇 살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알아서 뭐하게.”
“열넷이요.”
A과 B가 동시에 말했다. A이 고개를 돌렸다. 가늘어진 눈과 동그랗게 뜬 눈이 마주쳤다. 앗.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눈만 끔뻑이는 바보를 향해 A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약초사는 짐짓 놀란 낯이었다. 하기야, 아직 성인도 안 된 열넷짜리 비에라족 둘이서 팔을 다쳐오면 정상적인 어른이라면 대개 놀랄 터였다. 상대가 놀란 지점이 어디인지 알 방도는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약초사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A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챘는지 더는 캐묻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과 간간이 들어오는 B의 질문 속에서 치료가 마무리되었다. 깨끗한 붕대로 환부를 질끈 묶은 약초사가 빙그레 웃었다. 다 됐습니다, 하자마자 A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 멀어졌다. 거리를 두고 상대방을 지그시 노려보는데 옆에 서 있던 B가 대뜸 물었다.
“저기, 하나만 여쭤봐도 되나요?”
“네, 물론이요.”
“붕대는 주기적으로 갈아주면 좋다고 들어서요. 그래서 말인데요, 붕대를 갈아줄 때 쓸 수 있는 약초 같은 게 있나요? 열을 내려준다거나, 치유를 촉진한다거나 하는 그런 거요.”
“야. 나도 알거든.”
A이 B의 옆구리를 툭 쳤다. B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 그 낯을 바라본 A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고집스러운 낯이었다. 저런 표정을 한 B는 포타주가 되든 수프가 되든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A이 한숨만 푹푹 쉬는데 약초사가 말했다.
“음, 상처는 기본적으로 아물고 있었어요. 상처 치유를 촉진하는 약초 중에서 이 근방에 나는 건 등불 꽃인데, 그건 마비성 독초인 레몬양초 풀하고 생김새가 유사해서 권하지는 못하겠고요. 진통제 역할을 하는 바람초가 있기는 한데, 그것도 참…….”
“바람초요?”
“바람풀이라고도 불러요. 환자분은 아시는 것 같기도 한데요. 지금도 쓰였거든요. 대중적으로 많이들 쓰는 진통소염제 같은 곳에 들어가요. 그냥 빻거나 짓뭉개서 즙을 바르면 되거든요. 간단하지요.”
약초사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A은 B의 옆구리를 한번 툭 쳤다. 바람풀의 존재는 A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냉정할 수밖에 없었다. 들뜬 B에게 섣불리 기대하지 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에 약초사가 말했다.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라노시아 숲과 검은장막 숲의 길목 말이에요. 거기서 자라거든요. 비교적 손쉽게 얻을 수 있기야 하지만…….”
“하지만?”
“몇 달 전부터 포악한 마물이 둥지를 틀었어요. 지금은 솜씨 좋은 사냥꾼 없이는 힘들 거예요.”
A은 B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광경을 보았다. 희망에 가득 차 있던 낯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울상이 되었다가 얼굴을 푹 수그려 보이지 않게 되는 모습까지. 전부. 그리고 생각했다. 쟤는 감정이 진짜 풍부하네. A이 태평한 동안 B는 제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부서지는 듯한 절망에 빠져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기는 했는데, 생각에 몰두하던 B는 그게 지나가던 어린아이가 가판대를 밀어 넘어트리면서 난 소리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고심하던 그는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약초사에게 물었다.
“그래서 거기가 어딘데요?”
저녁나절쯤에 그들은 숲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구덩이를 파고 불을 붙였다. 미카와 엠이 도왔다. A은 피운 불씨를 모닥불로 옮겼다. 그러며 B에게 심부름 하나를 시켰다. 근방에서 제일 큼직한 풀을 여러 장 뜯어오라는 것이었다. 비틀비틀 떠나는 B의 등을 지켜보던 엠이 A을 아련하게 응시했다. 대화는 없었지만 A은 어쩐지 엠이 하려는 말을 알 것 같았다. 제 심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기에 그는 손을 휘적였다. 가라, 한 마디에 엠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B를 향해 날아갔다.
숲을 휘적휘적 걸으며 B는 생각하고 있었다. 약초사가 전해주었던 정보들이 온종일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A의 부탁은 어느새 기억 저편에 묻혀 있었다. 적당한 자리에 쭈그려앉고서 B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A의 팔에 남아 있을 상처가 떠올랐다. 그들은 제법 오랫동안 함께 모험했다. 시간이 쌓일수록 다치는 횟수도 늘었다. 필연적이었다. 다쳐가면서 사람은 성장하지 않는가. A과 B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뭐랄까. B가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마냥 미안하기만 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어렸다. A이 다쳐가면서 자라는 동안 B는 다치지 않았다. 항상 다치는 건 A이었다. B는 어느 순간부터 제 배 속에 자리잡은 부채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죄책감과 비슷한 형태로 뭉치더니 A을 볼 때마다 묘한 박동으로 울렁거렸다.
때때로 B는 두려웠다. 제가 짐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 명확해질 때마다. 동등한 동료라기보다는 A이 제 보호자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발목을 잡을 때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때마다 그는 A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두려웠다.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A에게 활도 배웠다. 그런데 정말 결정적일 때 A은 B를 도망가게 했다. B는 그 선택에 거리낌 없이 협조한 엠을 찌릿 노려보았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초코보는 순한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모르는 척하지 마, 하고 B가 중얼거렸다. 엠은 낮게 울더니 깃털을 파르르 떨었다.
돕고 싶었다. 많은 것을. B가 말하는 도움이란 커다란 이파리를 구해온다거나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는 사주 경계를 한다거나 같은 게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조금 더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종류였다. 눈에 보이는, 정말로 의미가 큰, 그런 도움.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도움. A이 덕분에 살았다며 기뻐할 만큼의 도움 말이다. 그래야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이 부채감, 죄책감, 혹은 불안감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 듯한 감정을 억누를 수 있을 것 같았다. B가 입술을 질끈 사리물었다. 주먹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마음 속에서 굳은 결심이 느리게, 그러나 단단하게 싹텄다.
“나, 바람풀 찾으러 갈 거야.”
B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위대한 선언이라도 하는 듯 당당한 목소리였다. 부리를 쩍 벌려서 하품하던 엠이 펄쩍 뛰었다. 그가 빠르게 웅얼거렸다. 다급한 초코보의 목소리를 어째서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너 미쳤어, 거기 마물 서식지라잖아, A한테 혼나, 그러다가 죽어, 어쩌고 저쩌고. B는 개의치 않았다. 굳센 얼굴로 엠을 보았다. 그리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나는 이미 결심했어. 네가 뭐라고 말하든 나를 막을 수는 없어! 바람풀을 찾아서 A에게 가져다줄 거야. A을 기쁘게 해줄 거야.”
초코보가 왁왁 소리를 질렸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냐는 윽박처럼 들렸다. B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태평하게 말했다.
“거참, 괜찮을 수도 있지 뭘. 지난번에 A 못 봤어? 도도 서식지에서 안 들키고 알을 슬쩍해 오던 그거! 나도 할 수 있어. 내가 괜히 붙어다닌 줄 알아?”
엠이 부리를 딱 소리가 나도록 세게 다물었다. 차분하기도, 어쩐지 조금 신경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시선이었다. B가 휘파람을 불었다.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에 손을 짚으며 그가 말했다. 어때. 너도 같이 갈래?
그 결과 B와 엠으로 이루어진 결사대는 아닌 밤중에 숲을 들쑤시게 되었다. 약초사가 알려준 위치는 상세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애꿎은 숲을 헤집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헤매고 헤매며 엠은 몇 번이고 B를 말렸다. 당연하지만 B는 듣지 않았다. 거의 다 왔을 거야, 거의 다 왔어. 거듭 중얼거리던 B는 숲 중심부에 다다랐을 때가 되어서야 우두커니 멈췄다.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다가 눈을 갸웃 기울였다. 그리고 잠시 후 말했다.
“여기가 어디지?”
옆에서 엠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그를 질책하는 듯했다. B는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화를 낸담. 소꿉친구나 다름없는 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엠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부풀렸다. 짐짓 능청스럽게 사과하며 B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깜깜했다. 빽빽하게 웃자란 나무들 덕에 하늘도 잘 안 보였다. 이러면 곤란한데, 하고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돌아갈 방도야 엠이 있으니 어떻게든 찾는다손 치더라도, 솔직히 B는 어둠과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빈말로도 밤눈이 좋은 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불을 지필 만한 도구도 없었다. 눈을 끔뻑이던 B가 문득 손을 떨궜다. 휑한 바람이 불었다. 뼛속까지 시리도록 꿰뚫고 지나갔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급작스럽게 을씨년스러워진 분위기에 B가 더듬더듬 뒷걸음질쳤다. 엠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은 그가 중얼거렸다.
“엠, 바람풀 냄새 같은 건 안 나? 좀 도와주라. 나 진짜 길 잃은 것 같아.”
엠이 짧게 울었다. 킁킁거리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B는 차분하려고 애쓰며 기다렸다.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났다. 엠이 느리게 걸음을 뗐다. 발맞추어 B도 함께 걷기 시작했다. 잔뜩 움츠린 어깨를 엠에게 딱 붙인 채였다. 느릿느릿 걸으며 B가 중얼거렸다. 졸리다. 그러자 엠이 핀잔이라도 건네듯 또 꽥꽥 울었다. B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하자 엠은 부리를 딱 소리 나도록 세게 닫았다.
얼마 가지 않아 B는 희미한 발광체를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걸음이 빨라졌다. 처음엔 잰걸음이었다가 나중엔 거의 뛰고 있었다. 서둘러 다가간 B의 눈앞에 발광하는 풀밭이 펼쳐졌다. 얼기설기 쌓은 나뭇가지들이 풀밭을 보호하듯이 감싸고 있었다. 가지들을 훌쩍 뛰어넘고서 송늘 뻗었다. 이파리가 푸르게 빛나는 풀을 조심스럽게 뽑아 들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추 바람풀과 비슷해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B가 고개를 돌렸다. 엠, 하고 그가 큰소리로 불렀다.
“이거 봐! 바람풀을 찾은 것 같아!”
기뻐하며 B가 벌떡 일어났다. 나뭇가지들이 만든 장벽을 다시 겅중 뛰어넘었다. 무르팍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얜 왜 이렇게 안 와?”
A이 작게 투덜거렸다. 곁에 앉은 미카가 동의하듯이 몸을 떨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 두어 개를 던지며 A은 고개를 쭉 뻗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상처에서 일어나는 열감에 몸도 머리도 어지러웠다. 혼곤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뺨을 툭툭 때리던 A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키고 있어. 다녀올게.”
미카가 꽥 울었다. 활과 화살을 챙기고서 A은 설렁설렁 걷기 시작했다.
숲에서 길을 잃었겠거니 싶었다. 또 대왕 사슴벌레에 현혹돼서 따라가다가 그랬거나. 아니면 큰 이파리에 집착하다가 그랬거나. A이 상상도 못할 만큼 바보 같은 이유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이렇게까지 안 온다는 건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봐야 타당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그가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먼 곳에서 메아리 같은 무언가가 울렸다. A의 고개가 팩 돌아갔다.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렸다. 비명 같았다. 높고 찢어지는 듯한, 그리고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꽉 찬 비명. A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어쩌면, 하는 가정에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A이 땅을 박찼다. 망설임 없이 달려나가며 그는 속으로 외쳤다. B 애쉬드, 이 바보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오래 걸리지 않았다. A이 우뚝 멈췄다. 저편에서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누군가들이었다. 사람 하나와 까만 초코보 하나. A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두운 숲을 가르고 B와 엠이 불쑥 튀어나왔다. 얼마나 오래 달린 건지 축축한 땀투성이였다.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채였다. 소리 높여 울던 B가 A과 눈이 마주쳤다. A, 하고 B가 불렀다. 그리고는 단박에,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울상이 되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미안해애애애애애!”
뭐가?
묻기도 전에 A은 발견했다. B와 엠을 뒤따라 어둠 속에서 튕겨져 나온, 거대한 라노시아 곰을.
A이 얼굴을 찌푸렸다. 등에 매고 있던 활을 단숨에 꺼냈다. 시위에 활을 먹이고 그가 외쳤다. 엠의 이름을 불렀다. 미친듯이 달리던 엠이 대답이라도 하듯 꽥 울었다. B와 엠이 지척이었다. 곰은 그들 뒤를 쫓고 있었으나 간격이 있었다. 활을 단숨에 당겨 조준하며 A이 외쳤다. B를 데려가라고 할 셈이었다.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데리고 숨으라고 외치려고 했다. B의 돌발 행동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눈이 마주쳤다. B의 낯이 일그러졌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뭐하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죽을 힘을 다해 달리던 그가 멈췄다. 눈을 감은 채로 그가 등을 돌렸다. A을 등진 채로 팔을 쫙 벌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외쳤다.
“더는 못 가!”
“이 바보야!”
A이 뛰쳐나갔다. 활과 화살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곰과 A 사이를 가로막은 B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엠도 마찬가지였다. 곰을 위혐하듯이 꽥꽥 울며 달려나갔다. 모든 게 아주 느리게만 보였다. B의 등이 아득히 멀게만 보였다. 악문 이가 아팠다. 몸이 떨렸다. B, 하고 외쳤다. 그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것과 거의 동시에 곰이 앞발을 휘둘렀다.
그리고 쓰러졌다.
A은 B를 끌어안은 채 눈을 끔뻑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명확하게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는데 수풀 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여기에 웬 애들이람, 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누그러졌던 경계가 다시 바짝 몸을 일으켰다. A은 B를 잡아 제 등 뒤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상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어둠 속에서 사람 넷이 주르르 나왔다. 미코테 둘에 엘레젠 하나, 라라펠 하나로 이루어진 4인 파티였다. 그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검은 머리 엘레젠이 한 걸음 나서더니 물었다.
“저 곰한테 용건이 있니? 없다면 우리가 가져가도 될까? 다른 게 아니라 저것, 우리 의뢰였거든.”
A이 눈을 찌푸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등장한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어른. 눈을 부릅뜬 채 A이 천천히 물러났다. 뒤에서 B가 낮게 괜찮다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B를 한번 곁눈질하는데 엘레젠이 다시 한번 말했다.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어. 근방에 마물들이 많아져서 토벌 의뢰를 받았을 뿐이거든. 너희가 가지고 싶으면 가져도 좋아.”
“…….”
“어린애가 곰에 쫓기고 있길래 좀 도운 것뿐이니 그렇게까지 날을 세우지는 않아도 되는데.”
“그렇대.”
등 뒤에서 B가 속닥거렸다. A은 여전히 B를 등 뒤에 둔 채로 모험가들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의심을 거두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특히나 이런 어둠이 깊은 숲속에서는. 고민은 짧았다. 그들을 여전히 노려보던 채로 A이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털을 부풀린 엠을 달래는 B를 한번 힐끔 곁눈질하고서 그는 말했다.
“가지고 먼저 가.”
“그러지, 뭐.”
엘레젠의 손짓에 모험가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곰의 가죽과 살과 뼈를 분리하는 손길들이 퍽 능숙했다. 완전히 해체한 후 잔여물들을 땅에 묻고 난 후에야 그들은 떠났다. 밤이 깊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서.
둘만 남은 후에야 A이 완전히 B를 향해 섰다.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건지, 조는 건지, 둘 다 하는 건지 모를 엠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B가 태평하게 헤죽 웃었다. A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발을 구르며 그에게 다가간 A이 B를 내려다보았다. 분위기가 묘해졌다는 걸 기민하게 알아챈 엠이 고개를 돌렸다.
“야.”
“응?”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