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롱 리브 더 퀸
“이대로는 안 되겠어!”
불면에 찌든 눈을 뜨며 A가 외쳤다. 거침없이 이불을 걷고 일어나자마자 그는 거울 앞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그리고 뻗친 머리와 볼품없는 마른 몸 위에 얹힌 구겨진 잠옷을 차례로 쓸어내리면서 중얼거렸다.
“스펜님께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 없어. 왕위는 너무 위험해.”
더러운 거울 너머에서 A는 자신을 뜯어 살폈다. 지나치게 자기주장이 강한 머리카락, 깡마른 몸, 오래된 잠옷. 입술을 비죽이다가 손을 들어 거울 표면을 문질렀다. 조금이라도 깨끗해진 표면에 다시 한번 자신을 비추며 그는 끊임없이 입을 움직였다.
“왕위에 오른다는 건 결국 정치에 가담한다는 거잖아. 정치는 무기 없는 전쟁이고 말은 보이지 않는 칼이야……. 말 한마디로 천하의 원수가 되었다가 수천의 사람을 구하기도 하지……. 그런 위험성을 스펜님이 홀로 떠안다니, 그건 너무 불공정하고…… 또 위험해. 응. 위험해.”
과장되게 뺨을 쓸어내리면서 A가 멈췄다. 어깨를 둥글게 말고 입술을 쥐어뜯다가 한숨을 푹 내쉰다. 그리고 순식간에 머릿속에 떠오른 스펜님이 크게 다치는 마흔여섯 가지 예시들을 옆으로 밀어 치우려 애쓰며 말을 마쳤다.
“그러니까, 안 돼. 내가 스펜님을 구해야 해.”
하지만 어떻게?
A는 입술을 비죽이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맹한 눈을 끔뻑이는 자신의 초상을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갑작스러운 피로감은 이른 기상 탓임이 명확했기에 그는 팔을 축 늘어트린 채로 침대에 가 앉았다. 곧이곧대로 눕는 대신 꺼끌꺼끌한 이불 감촉에 손을 오래도록 문질렀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퍼뜩 눈을 빛내며 결심했다.
“모셔 와야겠다.”
어디로?
“집으로!”
깔끔한 결심 직후 뇌리에 꽂히는 깨달음이 있었다. 헉, 잠깐. 이거 동거인가?
직전의 지친 몸짓이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A가 자리에서 튕겨 나왔다.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며 그가 가슴께를 질끈 쥐었다. 시선이 넓지 않은 집을 순식간에 훑어내렸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이마를 팔뚝으로 한번 훔쳤다. 울렁이는 낭패감을 억누르려고 애쓰는 애처로운 몸짓은 그다지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조촐해!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A가 제 옆머리를 손잡이처럼 쥐어뜯었다. 그를 반쯤 붕괴하게 한 문제는 간단했다. 이런 곳에서 스펜님을 모실 수는 없어!
작지 않은 공간이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깔끔하고, 엄밀히 설명하자면 생활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이곳은 본래 방공호였다. 요지는 이것이었다. 사백여 년 전에 몹시 큰 전쟁이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여유 따위는 없었으므로 간략하게 축약하자면, 예기치 못하게 A가 들어앉았다. 애당초 왕족이니 뭐니 하는 예정된 주인이 있었겠지만 전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때마침 A는 거처를 찾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좋게 보자면 아늑하고 나쁘게 보자면 답답한 이곳에서 A는 사백여 년을 보냈다. 다행스러운지는 몰라도 그는 홀로서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외롭지 않았다거나 고독을 즐긴다거나 하는 묘사 같은 게 어울리지 않기는 했지만 그건 순전히 A가 내내 바빴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쁘다는 정의가 사람에 따라 다르기야 하지만, 아무튼 A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그 자신은 바쁜 게 맞았다. 보안 카메라로 선왕 스펜님을 구경하거나 스펜님 관을 구경하다가 지쳐 잠드느라. 음, 그리고, 연애학 개론이나 관계 개선론 같은 책들도 열심히 읽었지. 아무튼 그렇게 눈코 뜰 새 없느라 혼자 지내는 것이 쓸쓸하거나 슬플 여력도 없었다.
단지 그게 문제였다. 스펜님을 관찰하는 건 뭐랄까, 시간도 공간도 뛰어넘는 위력을 지닌 일이었다.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샌가 보이지도 않는 해가 지고 있다거나 시간이 까마득하게 지나 있다거나 할 때가 많았다. 영 튼튼하지 못한 몸은 자연스레 수면을 울부짖었다. 따라서 A는 눈 떴을 때는 스펜님을 보고 눈 감을 때는 처박혀 잔다는 일차원적인 일정을 꽤 오래 소화했다. 그러자 몇백 년이 순식간에 지나버려서 방공호를 단장할 시간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몇 번 꾸며보기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펜님을 프리저베이션으로부터 훔친 이후로. 그리고 깨어난 스펜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두 시기 사이에는 정말이지 기나긴 공백이 있었고 A는 그간 무언가를 장식한다는 감각을 잃어버린 후였다. 게다가 후환이 두려워 스펜님을 언로스트 월드에서 깨운 이후 볼품없이 꾸몄던 방공호를 그대로 방치하다시피 한 탓에 작금의 꼴은 눈 뜨고 못 봐줄 수준이었다. 이런 꼬락서니로 스펜님을 맞이할 수는 없어! A는 쩌렁쩌렁 울리는 내면의 비명에 성심껏 귀를 기울였다. 정말이지 옳은 말이었다.
낡은 벽지, 어떻게 켜지는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전등, 지나치게 조촐한 가구, 그 위를 드문드문 장식한 먼지 쌓인 오너먼트들. 턱을 감싼 채 집안을 살피던 A의 낯이 서서히 하얘졌다. 이럴 수는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영 성에 안 찼는데 자세히 뜯어보니 상태가 심각했다. 전부 낡았고 유행도 지난 데다가 스펜님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어. A는 그새 버릇이 된 것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해결해야 해. 지금 맞닥뜨린 이 끔찍한 문제를.
기껏 스펜님을 모셔 오는데 이런 추레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본디 시작이 가장 중요한 법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물론 어디까지나 목적은 왕위라는 위험 요소에서 스펜님을 격리하고자 하는 것이고 동거는 그다음이지만, 결국 멀리서 본다면 공간의 쓰임새는 얼추 비슷한 셈이다. 이대로는 안 돼. A가 뇌까리며 벌떡 일어났다. 입술을 질겅거리면서 침대맡을 초조하게 오가던 그는 곧 우뚝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치들며 중얼거렸다.
“갈아엎자.”
장장 몇백 년 만에 A는 결심했다. 방공호를 갈아엎겠다. 제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인테리어를 실현해 주마. 스펜님과 어울리도록 장식한 방에 그분을 모실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기왕이면 좀 오래였으면 좋겠지만 아무튼 한동안, 적어도 위험 요소가 사라질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지내리라.
다짐이 섰으니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A는 거침없이 행동했다. 굳이 먹을 필요가 없으니 아침 식사는 건너뛰고서 그는 곧바로 채비에 들어갔다. 머리를 감고 입기보다는 걸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은 몸짓으로 몸에 옷을 꿰었다. 부산스러운 머리칼과 싸움을 벌이다가 빗이라는 무기로 반발을 잠재우고 마지막으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군데군데 얼룩이 묻은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마지막으로 훑어내리고서 A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중간에 스펜님을 마주쳐도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거울도 새로 사야지.
오랜만에 도착한 솔루션 나인은 여전히 사람으로 북적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며 A는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땅한 장터가 있던가.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소는 없었다. A는 잠시 에테라이트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 곳에 장터가 몰려 있으면 좋을 텐데. 하기야, 일렉트로프라는 간편한 물질로 집부터 가구까지 빠짐없이 만드는 세상에서 가구 장터라는 건 필요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A는 계획을 조금 바꾸었다. 어차피 방공호에 있는 가구들도 일렉트로프로 만든 것들이다. 그러니 가구 자체를 구매하기보다는 돌아가서 그것들을 재조립하겠다. 대신 꾸밈 요소, 몇 주 전에 샀다가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것들 대신 새 장식을 사야겠다. 더 세련되고 예쁘고 스펜님과 어울리는 것들로. 솔루션 나인을 그리워하실지 모르니 기왕이면 솔루션 나인이 연상된다면 더더욱 좋으리라.
그는 우선 트루뷰로 향했다. 큼직한 거리를 두고서 양옆에 드문드문 놓인 상점들을 하나씩 공략할 예정이었다. 자금이 부족할 만큼 궁핍하지 않았고 시간에 쫓기지도 않았으므로 그는 제법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어디부터가 좋을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 온갖 대화와 이야기들이 걸러지지 않고 쏟아졌다. 에버킵에 크왕크왕하는 새로운 생물이 나타났다거나, 앞으로의 계획을 세운다거나. 그리고 스펜님이 며칠 전 이곳에 들렀다거나……. 잠시만, 스펜님?
갑작스럽게 고개를 튼 탓에 목에서 우둑 소리가 났다. 욱신거리는 목덜미를 두 손으로 잡고 바들바들 떨다가 다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A가 은근슬쩍 귀를 기울였다. 모르는 남녀가 에너지 드링크를 손에 들고서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여기엔 어쩐 일이시냐고 물으니까 그냥 구경하러 오셨다는 거야. 에너지 드링크를 드시겠냐고 여쭤봤는데 거절하시더라고.”
그러며 여자가 수상한 캔을 흔들었다. 증명되지도 않은 저런 수상한 음료수를 스펜님께 권해도 되는 걸까? 때마침 같은 캔을 든 남자가 무지갯빛 오라를 내뿜으며 A를 지나쳤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A는 두 손을 질끈 쥐었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스펜님을 상상한 A의 낯이 급속도로 허예졌다. 울렁이는 속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A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였다. 대화 중이던 남자가 시원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여왕님께 그런 걸 권하면 어떡해?”
“여왕님이니까 권한 거지. 너, 내가 남한테 에너지 드링크 양보하는 거 봤어?”
거기까지 듣고 A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리를 빠져나왔다. 가까운 가게에 닥치는 대로 들어가고서 네온 등과 일렉트로프 천장 마감재 따위를 쓸어 담았다. 봉투 드릴까요, 라는 질문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내내 A는 반쯤 다른 세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왕위라는 것 말이야.
스펜님은 정말로 똑똑하시고 머리가 비상하시고 유능한 분이다. 마음씨 착한 데다가 사람을 다정히 살필 줄 아는, 훌륭한 자질을 가지신 분. 위험성을 떼어놓고 보았을 때 A는 스펜님이 성군이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분은 그럴 능력이 차고 넘치니까. 하지만 여전히, 왕위를 이어받는 건 지나치게 위험하다. 당장 저 오색 빛깔로 번쩍이는 에너지 드링크를 권한 이유가 그분이 왕이시기 때문이라지 않은가!
“손님.”
“…….”
A는 바보가 아니었다. 에너지 드링크니 뭐니 하더라도 그게 전부가 될 수 없었고, 되지도 않았다. 왕위의 위험성은 그보다 직접적이고 잔혹했다. 가장 단순히 떠올릴 수 있는 것만 하더라도 암살, 전쟁, 병마, 과도한 업무로 인한 건강 이상, 기타 등등……. 스펜님이 성군의 자질을 타고나신 것과 왕위가 위험하다는 사실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리고 A는 스펜님을 암살, 전쟁, 병마, 과도한 업무로 인한 건강 이상, 혹은 그 외의 무엇이든 스펜님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그를 지켜야만 했다.
“손님.”
“…….”
지키지 못하면? A는 유능한 의사 겸 과학자 겸 엔지니어 겸 해부학자였지만 전사는 아니었다. 그의 직업은 싸움을 대비하거나 싸움의 여파를 수습하는 것이 주력이지 싸움 그 자체를 수행하는 능력은 다소 떨어졌다. 전투와 가장 가까운 직군을 고른다면 아무래도 현자일 텐데. 하지만 현자로는 다수와 맞설 때 결정력이 부족했다. 누군가를 지키며 다수와 싸우기에는 A 본인의 몸이 약하기도 하고.
“손님.”
“…….”
그러니까, 요지는 이것이다. 사백 년이나 기다렸는데 암살, 전쟁, 병마, 과도한 업무로 인한 건강 이상, 혹은 그 외의 것들로부터 스펜님을 지키지 못한다면 슬플 것이다. 어떻게 기다린 사백 년인데. 그는 초인이나 인간 외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사백 년은 영겁 같았다. 비록 하루하루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나서 스펜님 구경하고 다시 누웠다가 일어나서 스펜님 구경하기를 거듭하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축약하고도 사백 년이란 세월은 지나치게 길었다. 손가락 끝의 거스러미를 손톱으로 헤집으며 A가 초조하게 다짐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시간이 많다는 건 제 착각이었다. 빠를수록, 가능하다면 당장에라도, 스펜님을 모셔야 했다.
“손님,”
“A?”
“스펜님?”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에 A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돌렸다. 칙칙하던 안색이 곧장 환해졌다. 몇 분 전부터 가게 주인이 내밀고 있던 봉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A가 후다닥 달려갔다. 그리고 뺨을 어색하게 붉히며 제 앞에 선 하나뿐인 여왕, 스펜을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A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스펜님이 웃으며 A의 어깨를 두드렸다. A는 옷매무시를 당겨 조금 더 단정히 했다. 가게 주인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눈 스펜님은 곧 가게를 찬찬히 둘러보다가 A에게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는 중이었어?”
“아.”
A는 잠시 갈등했다. 여기서 곧이곧대로 토로하게 된다면 스펜님이 기분 나빠하시지 않을까? 말이라는 건 인지로 인해 왜곡되기 쉽고 간단하게 그 뜻을 잃어버리기 마련이었다. 장식품을 구경하는 스펜님의 옆얼굴을 연신 힐끔거리며 A는 잠시 갈등했다. 어떻게 말해야 제 걱정스러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A, 하고 스펜님이 재차 물은 후에야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필요한 물건들을 사요.”
“장식이라도 하게?”
“집을……. 단장을 조금 하려고요.”
“그래?”
스펜님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A는 긴말을 덧붙이는 대신 입을 비죽였다. 이 정도의 비밀이 딱 알맞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당장 제 속내를 토로하기에는 가게 주인이 거슬렸다. 주인을 힐끔 곁눈질했을 때 눈이 곧바로 마주치는 바람에 A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봉투 가져가세요 손님, 하고 말하는 주인 대신 스펜님을 향해 반걸음 다가갔다.
“단장을 마치면 언제 한번 보여줄 수 있어?”
가까이 다가온 A를 향해 스펜님이 그렇게 말했을 때, A는 제 귀가 마침내 고장 났는지 의심했다. 말이 귀를 타고 뇌까지 다다라 그 뜻을 해석하는 데에 한참이 걸렸기에 그는 한동안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멍하니 스펜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 암호 같던 말을 해석하는 데에 성공한 A가 잠시 눈을 끔뻑였다. 느리게 기울며 A, 하고 부르는 스펜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A는 생각했다. 이거 동거 제안인가?
같이 살자고 제안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아니, 잠시만. 그렇다는 건 역시 스펜님도 왕위에 부담감을 느끼고 계시다는 건가. 머릿속에서 온갖 가능성과 잡념이 해일처럼 몰아쳤다.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문지르면서 A는 순식간에 생각에 빠져들었다. 단장을 마치면 보여줄 수 있냐는 건 곧 방공호에 들르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방공호는 A의 집이다. 이는 즉 스펜님이 A의 집에서 머물겠다는 의미가 된다. 논리적인 오류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추론이었다.
A가 얼굴을 굳혔다. 그렇다면 단장을 서둘러야겠다고 마음먹으며 고개를 들었다.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뜻밖의 외침에 의해 그의 목소리는 가로막혔다.
“어, 스펜님이다!”
맹랑한 아이의 목소리였다. A가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게 바깥에서 한 아이가 서 있었다. 쭉 뻗은 손가락은 정확하게 스펜님을 가리켰다. A가 잠시 눈을 끔뻑였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상과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불현듯, 일렉트로프에 감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번뜩 정신을 차렸다.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멈췄다. 스펜의 이름을 거론하며 호기심 어린 시선이 점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먹구름 같은 인파가 몰리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가게를 나서는 스펜님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A가 초조하게 입술을 뜯었다. 저기에 나가셔도 되나. 단체로 몰린 사람들은 대체로 위험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실제로 악의를 품지 않았더라도, 인파는 그 자체로 위협이었다. 손을 휘적거리자 가게 주인이 손목에 봉투를 걸었다. 이걸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자리를 뜰 셈이었으므로 A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스, 스펜님!”
힘껏 외치며 잰걸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우글거리는 인파가 마치 도넛처럼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 스펜님이 있을 게 뻔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어렴풋이, 아주 멀리서 들렸다. 곳곳에서 스펜님의 이름을 외치거나 닥치는 대로 요구사항을 읊는 이들의 목소리에 스펜님의 목소리가 연신 가렸다.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려다가 번번이 튕겨 나오며 A는 속으로 절규했다. 다 비켜. 스펜님께 대답도 못 했단 말이야!
허우적거린 보람이 없게도 A는 인파의 벽을 뚫지 못했다. 뭉게뭉게 모여든 사람들은 마치 단단하고 끈끈한 점액질 벽보다도 끈질기게 A를 밀어냈다. 스펜님을 향해 다가가려는 사람들이 우악스럽게 움직이며 서로를 밀친 탓이었다. 여섯 번째로 뒤로 밀려난 A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뻗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머리를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왕위라는 건 역시 위험한 게 맞았다!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면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간명했다!
이카로스를 타고 사람들의 벽을 뛰어넘어야 하나?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A가 연신 고개를 내밀어 기웃거렸다. 스펜님을 외쳐봤자 그를 부르는 다른 목소리에 묻혔다. 저 인파 속에서 스펜님을 빼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움직이지를 못하다니. 단련을 게을리한 벌인가? 다리를 달달 떨며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미안! 지금은 조금 바빠서. 나중에, 응, 행사는 내일이야! 그때 부탁할게!”
인파가 웅성거리나 싶더니 사람들이 쩍 갈라졌다. 누군가가 제 앞에 다가왔기에 절망하던 A는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누군가 손을 잡았다. 늘어졌던 몸을 이끄는 뒤통수와 멀어지는 인파를 번갈아 바라보던 A는 잰걸음으로 상대를 쫓으며 무심코 생각했다. 불경하지만 이건 고백인 건가?
스펜님이었다. 자신을 앞서가는 스펜님이 있었다. 무려 손을 맞잡았다. 이게 진짜라고? 얽힌 손에서는 온기가, 그러니까, 죽음처럼 차갑거나 딱딱하게 굳지 않은, 뭉근한 인간의 체온이 느껴졌다. 얽힌 손과 앞서가는 스펜님의 뒤통수. 간간이 스펜님에게 인사하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젓지만, 그들을 위해 멈추지는 않는 걸음이 거기에 있었다.
홀로베이터를 타고 거버먼트 에리어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스펜님이 손을 놓았다. A는 온기가 남은 손바닥을 들어 빤히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니까, 아들 둘에 딸 하나? 아니면 딸 둘에 아들 하나? 아니, 아니, 스펜님이 싫다고 하신다면 아이 같은 건 없어도……. 그보다 나, 손 되게 축축하지 않나? 맞잡기 전에 손 한 번 닦을 걸 그랬나?
“옷이 흐트러졌네, A.”
“아.”
스펜님이 말을 걸었기에 A는 허겁지겁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스펜님이 맞았다. 정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뻣뻣하던 옷감은 구겨졌고 곳곳에 먼지가 묻었다. 머리는 주장 강하게 제멋대로 뻗쳤는지 볼을 사정없이 간질였다. 옷매무시를 다듬으려 이리저리 만지작거리자 손바닥에 남았던 온기가 빠르게 식었다. 영 아쉬운 마음에 주먹을 질끈 쥐었다. 다시 잡자고 하면 이상하게 보시려나. 하지만 스펜님이 그 정도는 해주시지 않을까. 그보다 다시 잡게 되면 손부터 닦고 잡아야지.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고개를 들었을 때, A는 보았다. 너르게 펼쳐진 솔루션 나인의 정경과 흔들림 없는 스펜님의 뒷모습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A는 거리를 가늠했다. 그다지 멀지도 않았다. 고작 세 걸음이었다. 세 걸음 너머에서 스펜님이, 두 손을 뒤로 넘겨 맞잡고, 에어스피너와 홀로베이터가 바삐 오가는 솔루션 나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정돈한 머리칼이 흔들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에 A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왕이 되고 싶으세요?”
“응?”
스펜님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반응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탓에 A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니, 그. 갑작스러운 당황이 입을 막았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는 시선을 떨궜다. 바닥을 문지르는 제 발을 내려다보면서 A는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냥, 저라면 왕 같은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요…….”
“갑자기?”
“내내 궁금했어요. 왕이라는 건 너무……. 너무 위험하고. 또 책임질 것도 많고. 그러니까요.”
“흐음.”
스펜님이 눈을 한번 굴렸다. 바싹 마른 목구멍에 침이라도 바르며 A는 고뇌했다. 괜히 물어본 걸까, 이건? 그렇지만 묻고 싶었다. A가 오늘 본 광경은 하나같이 위험천만했다. 개개인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뭉쳐서 형성한 인파는 더더욱 통제하기 힘들고 어디로 튈지 알 수도 없었다. 왕은 통솔자에 불과했다. 다치지 않는 안드로이드라거나 신이 아니었다. 암살, 전쟁, 병마, 과도한 업무로 인한 건강 이상, 기타 등등……. 몇 시간 전 그를 괴롭혔던 생각들이 다시금 머릿속을 들쑤셨다.
그때였다. 스펜님이 웃음을 터트린 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걱정해 주는 거지?”
“아…….”
스펜님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상체를 가볍게 숙이자 눈이 맞았다. 시선을 단단히 얽맨 채로 스펜님이 활짝 웃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는 해. 절대적인 경험이라는 게 부족하니까. 게다가 내게는 선왕의 기억이 없잖아. 비교될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 보면 자연스레 불만도 생길 테고.”
“역시, 그럼…….”
“그래도 힘내보려고!”
스펜님이 두 손을 꾹 쥐었다. 뜻밖의 말에 A가 잠시 눈을 끔뻑였다. 얼빠진 A를 뒤로하고서 스펜님이 등을 돌렸다. 그는 다시 성큼 멀어졌다. 세 걸음 나아가더니 솔루션 나인을 내려다보며 멈췄다.
“계속 생각했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 걸까, 하고.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나를 사랑해 주는 이들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게 되었어.”
“…….”
“왕위를 이어받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야. 가끔 이 티아라가 나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힘껏 노력해 보고 싶어.”
“그렇지만,”
자각하기도 전에 입이 열렸다. 아랫배에서 느글거리는 불안이 역류하듯이. 두 손을 질끈 쥔 채로 A가 정신없이 말을 쏟아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위험해요.”
“…….”
“왕이 된다는 건 너무 위험해요. 오늘도 보셨잖아요. 그들을 보면서 힘을 얻으시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이제 더는 죽지 않는 몸도 아니잖아요. 왕위에 오르면 필연적으로 많은, 아주 많은 일이 있을 텐데…….”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것만 하더라도 암살, 전쟁, 병마, 아무튼 수없이 되풀이했던 생각들이 있었다. A는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가슴께를 꾹 쥐었다. 얇은 천과 거죽 아래로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목구멍 끝까지 밀려온 말이 있었다. 왕위는 위험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차라리 나랑 같이.
말을 잇는 대신 A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차가워진 손끝을 천천히 문지르면서 힐끔 눈치를 보았다. 어리둥절한 낯이었다, 스펜님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서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눈을 굴렸다. 의뭉스럽던 얼굴에는 곧 희미한 미소가 피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진심이야.”
“아니에요…….”
“하지만 정말로 괜찮을 거야. 내가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는 만큼 사람들도 나를 도와줄 거니까. 그들에게 사랑받는 이상 나는 왕위를 포기할 수 없어. 보답을, 그래,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에게 보답해 주고 싶거든.”
A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얼마나 우악스러운데요, 스펜님을 둘러쌌을 때 그들이 얼마나 맹렬했는데요, 저는 스펜님이 걱정돼요, 그러다가 다치시기라도 한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랐을 때 A는 입술을 한번 비죽였다. 그렇게 되면, 내 사백 년은. 그는 사소한 계기로 심하게 다치거나 심지어는 죽기까지 하는 스펜님을 보기 위해 사백 년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A가 발치에 꽂혔던 시선을 들었다. 반쯤 몸을 돌린 스펜님은 솔루션 나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미한 미소, 편하게 풀린 낯, 형광등에 반짝이는 눈동자 위로 머리칼이 나부꼈다. 평화로워 보이셔. 정말로 괜찮은 것 같으셔. 속으로 뇌까리던 A는 하릴없이 고개를 떨궜다.
“앗, 그러고 보니까!”
“네?”
“단장에 필요한 재료들은 전부 산 거야?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서 급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잖아.”
“아.”
A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왼팔에는 봉투가 걸려 있었다. 장식품들이 어지럽게 뒤섞인 봉투를 내려다보며 그런 것 같아요, 하고 대답하자 스펜님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다 꾸미면 꼭 알려줘. 구경 갈게. 약속이야!”
그날 A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집에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서 쉴 틈 없이 봉투를 뒤집어 탈탈 털었다. 굴러 나온 온갖 장식들을 들고서 종횡무진 방공호를 돌아다녔다. 거울을 깨끗하게 닦고 벽면에 네온 등과 테슬을 달았다. 낡은 가구들도 영 성에 차지 않았지만 당장 바꾸기에는 지나치게 피로했다. 전하지 못했던 선물의 산까지 구석진 곳에 차곡차곡 쌓아놓자, 그마저 하나의 꾸밈처럼 보였다.
어떻게 하는 게 현명한 일인지 A는 알 수 없었다. 스펜님은 분명 행복해 보이셨어, 하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행복이 곧 안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곳은 위험했다. 왕위는 더더욱 위험했다. 모든 도움이 적재적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무조건적인 안전을 보장하지도 않았다. 방공호도 나름대로 아늑했다. 꾸밀수록 사람 사는 태가 났다. 조금 좁기야 하지만 두 사람이 오순도순 살기에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고뇌는 길고 지난했다.
마지막 장식을 벽에 달았을 때, A는 마침내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