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1만 1천 자, 실제 작업물, FF14 기반 드림, 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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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4:21

/ 이미 늦었다. 그의 모든 것이 왔다.



재가 눈처럼 내렸다. 광풍에 나부끼는 몸을 지탱하고자 그가 억지로 어깨를 웅크렸다. 여기서 넘어질 수 없었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안 됐다. 온몸을 할퀴고 지나는 눈보라가 그를 집어삼킬 듯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허리까지 차오른 눈밭을, 재와 뒤섞여 얼룩덜룩해진 산길을 힘겹게 한 걸음씩 헤쳐나갔다. 악문 입술에서 핏줄기가 흘렀다. 지릅뜬 눈은 매섭게 번뜩였다. 그때 맞바람이 그를 후려쳤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세찬 폭풍 속에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밭은 숨을 토하며 그가 헐떡였다. 두 손이 눈밭을 파고들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재와 섞인 눈 위에 수놓였다.


멈추면 안 돼,


가슴께를 짓누르는 압력에 몸을 떨며 그가 생각했고,


검붉어진 하늘과 저 멀리서 아우성치는 비명, 더는 움직이지 않는 육체와…….




*




“어라, A 씨.”


A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잠시, 그는 품에 기댄 대검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직 가시지 않은 꿈과 혼곤한 정신에 기다렸다는 듯 현실이 이지러졌다. 흉곽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들이켜고서 참았다. 한참 후에야 느릿느릿 호흡을 고를 때 쿠루루가 다가왔다. 괜찮아, 하고 묻는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염려가 묻어 있었다. A는 천천히 머리를 주억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침한 조명과 돌로 쌓은 벽이 익숙했다. 돌의 집이었다.


그제야 A는 옳게 된 의미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고서 그가 몸을 바로 했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요 며칠간 혹독하게 몸을 굴렸으니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의뢰를 연이어 처리하는 바람에 타타루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 조금 쉬면서 하시는 게 어떠세용, 하고 조심스럽게 권유하던 새벽의 금고지기가 눈에 선했다. A는 힐끔 쿠루루를 곁눈질했다. 눈치를 살피던 타타루와 같은 눈을 한 채로 쿠루루가 얼굴을 갸웃거렸다.


“타타루가 걱정이 많아. 요즘 몸을 너무 혹사하는 것 같다면서.”


“괜찮아.”


“으음,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 더 말하지는 않겠지만…….”


쿠루루가 뺨을 긁적였다.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그래도 당신이 걱정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A는 말없이 팔을 쓸어내렸다. 끌어안았던 대검을 천천히 벽에 기대어두자 쿠루루의 안색이 조금쯤 밝아졌다. A의 옆자리에 풀썩 앉고서 그가 말했다.


“집에 돌아가서 쉬지 그래? 벌써 일주일째 돌의 집에 있었다면서.”


“…….”


“에스티니앙 씨가 물어봤다고 하더라. 타타루한테. 그분이 제 발로 저를 찾아오는 일이 있을 줄은 몰랐어용, 이러는 거 있지.”


“뭘?”


되물은 직후 A는 목을 가다듬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목소리가 거칠었다. 곁에서 쿠루루가 작게 헛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하게 한 걸까. A가 목울대를 한번 쓸어내렸다. 피부에 맞닿은 손이 찼다.


“글쎄, 나도 정확하게는 몰라. 그냥 전해 듣기로는, A 씨가 여기에 있냐고 물어봤다는 것만……. 그런데 A 씨, 정말 괜찮은 것 맞아?”


A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하고 낮게 중얼거리는 쿠루루의 목소리는 반쯤 흘렸다.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면서 그가 어깨를 웅크렸다. 쌓인 피로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쿠루루가 맞았다. 일주일째였다. 그가 제아무리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은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고 맞닥뜨린 연이은 전투의 여파가 조금씩 쌓이더니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돌의 집에서 붙박이가 된 A를 위해 타타루가 휴게실을 내어주었지만 그뿐이었다. 조촐한 방 안에서 A는 도무지 휴식하지 못했다. 쉽사리 마음을 놓지 못하는 일은 이쯤 되니 그의 고질병이었다.


이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가닿았을 때 A는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깍지 낀 두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전에는, 적어도 일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제대로 휴식을 취할 줄 알았다. 그 필요성을 인정했고 성실하게 이행했다. 돌의 집에서도, 휴게실에서도 마음을 놓지 못했지만 A에게는 집이 있었다. 틈만 나면 눈보라가 치고 살이 에이도록 춥지만 난로를 떼면 금세 훈기가 도는, 제대로 된 집이.


일주일 전 A는 집에서 꿈을 꿨다. 경련하듯 몸을 떨며 일어난 순간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그는 한 번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기실 이것은 공간의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A는 내심 짐작했다. 대부분의 문제는 대상자의 마음가짐에서 출발했고 이번도 매한가지였다. A는 차가운 손으로 심장께를 지그시 눌러보았다. 천 조각과 얇은 살가죽 아래에서 약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불온한 박자였다.


“A 씨?”


이번에도 같은 꿈을 꾸었다. 일주일째 그는 같은 꿈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A는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서 잠시 들숨을 삼켰고,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입술을 머금는 탓에 어떠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금쯤 이상하게 여기면서. 숨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그는 느꼈다. 가라앉은 의식을 끌어올려 쿠루루에게, 현재의 자신에게 집중해야만 한다고. 하지만 발뒤꿈치를 맹렬히 뒤쫓은 꿈이 그의 발치에서 일렁였다.


꿈에서 두고 온 과거가 나왔다. 재가 눈처럼 내렸고 폭풍이 몰아쳤다. 삶이 말미암은 끝단에서 호흡하는 법을 잊은 채로 바르작거리던 어린 A가 있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차가운 무게에도 여기서 멈출 수 없다고, 이대로 주저앉아선 안 된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며 발을 끌던 그가 있었다. 오래 묵은 잿눈은, 지난한 도주와 기나긴 외면은 끝내 버리고 오지 못한 아우성과 함께 왔다. 잠시나마 품었던 용서와 집념과 그 모든 연약한 것의 집합을 우롱하듯.


“부탁이 있었는데……. 혹시, 다음에 오는 게 나을까?”


쿠루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A는 천천히 웅크렸던 몸을 풀었다. 무슨 부탁, 하고 묻자 쿠루루의 안색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머뭇거리듯 입을 오물거리던 쿠루루는 곧 천천히 말했다. 얼마든지 거절해도 상관없어, 정말이야, 같은 상냥한 말들이 앞장섰다.


“레포릿들에게서 의뢰가 하나 왔거든. 근래 비탄의 바다에 서식하는 마물들이 갑작스럽게 그 수를 불렸다고 말이야. 파견된 조사대의 본부와도 거리가 가까운 모양이야. 마찰의 여지가 있으니 수를 불린 마물들을 적당히 처리해 주었으면 한다고 했어.”


“갈게.”


“잠깐, A 씨!”


자리에서 일어난 A가 잠시 멈췄다. 쿠루루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저기, 하고 머뭇거리며 그가 입을 달싹였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듯 그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A는 기다렸다. 시각을 다투는 일은 아니므로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쿠루루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가도 늦지는 않을 터였다.


“혹시 에스티니앙 씨랑 무슨 문제가 있었어?”


그러나 쿠루루가 마침내 물었을 때, A는 제 결정을 조금쯤 후회했다. 이런 질문이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서둘러서 자리를 떴을 텐데. 제 후회가 얼굴에도 드러난 건지 쿠루루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헐레벌떡 다가온 그는 조금 가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라, 하면서.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억지로 추궁할 생각은 없어. 나는 단지,”


쿠루루가 입을 달싹였다. A는 두 손을 꽉 쥔 라라펠을 내려다보았다. 다급함과 절박함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얼굴에 새겨진 모든 굴곡에서 깊은 염려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푸른 눈동자가 흔들릴 때마다 A의 심장도 함께 뛰었다. 일정하지 못한 박동에 맞추어 문장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건 A의 몫이었다. 문제가 있었냐고. 에스티니앙이랑…….


“에스티니앙 씨가 한 말은 아니야. 그냥, 뭐랄까. 두 사람이 요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


“아냐, 역시 방금 말은 잊어줘. 미안해, A 씨, 갑자기 이런 질문이나 해서.”


그렇게 말하면서 쿠루루는 웃었다.


“의뢰, 잘 부탁할게!”


A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루루가 더는 붙잡지 않았으므로 등을 돌렸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비탄의 바다로 향하는 지맥을 더듬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렴풋이 목적지가 그려졌다. 약간의 어지러움과 함께 몸이 이지러졌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는 순간 A는 자신을 감싼 광막한 어둠을 느꼈다. 비탄으로 황량해진 바람이 그를 스치고 지나쳤을 때 A는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탈것 위에 몸을 싣고 전해 들은 좌표를 향해 날아가면서 A는 오래 묵은 기억을 더듬었다. 재와 눈. 피와 폭풍. 이대로 멈춰선 안 된다는 결의와 제 그림자를 향해 쇄도하는 아우성 같은 것들.


조사대 본부에 도착했을 때 A는 에스티니앙과 마주쳤다.


본부석 앞에서 그들은 한참이나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A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일주일 만에 만난 에스티니앙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주일 새 사람이 크게 뒤바뀌는 일이란 지극히 드물었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 없는 A를 바라보면서 남자는 침묵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A도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삭막한 바람이 그들 사이를 어르고 지날 때마다 A는 쿠루루의 질문을 떠올렸다. 에스티니앙. 문제. 그리고 꿈.


조사대원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본부석 사방에 켜켜이 쌓인 온갖 서류와 상자들이 A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이곳이 현실이라고. 여기가 현재라고. 그러나 고개를 돌리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스민 우주가, 그곳을 배회하는 소행성들이 있었다. 행성 아이테리스는 그림자에 서서히 뒤덮였다가 드러나기를 거듭하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A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저 커다란 행성 속에 제 삶이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눈보라 치던 아득한 먼 고향, 돌아갈 수 없다던 다짐, 삶을 부르짖던 손끝이. 결코 망향이 되지 못하는 과거의 잔재가 달에서조차 그의 발뒤꿈치를 쫓아 매섭게 쇄도하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침묵이 깨진 건 리빙웨이가 나타난 직후였다. 과장된 몸짓으로 이마를 쓸며 작은 레포릿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레포릿이 종알거리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 A는 거의 기쁨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에스티니앙의 시선이 여전히 제게 향해 있다는 사실을 구태여 인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크게 안도하면서, A는 리빙웨이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


이번에 토벌 의뢰는 총 세 가지였다. 사색가, 방랑자, 곡소리꾼이 그 대상이었다. 못해도 백 마리씩은 잡아주셔야 할 테니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자고요, 하고 말하며 리빙웨이는 두 손을 질끈 쥐었다. 최근 조사대가 파견된 까닭이 바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균류 마물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일정한 기간을 두고 비탄의 바다를 순회하며 토벌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리빙웨이가 종알거렸다.


“오늘 향하는 곳은 고뇌의 만 최남단이랍니다! 준비를 마치신다면 제게 말을 걸어주세요. 채비 단단히 하시고요!”


리빙웨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별다른 준비랄 것은 없었다. A는 들고 온 대검을 형식적으로나마 점검했다. 바바 가누쉬를 입에 욱여넣고 버디 초코보를 불렀다. 채비를 마쳤을 때 A는 리빙웨이를 찾아갔다. 에스티니앙이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짧은 시선이 오갔지만 그뿐이었다. 언어로써 정제된 대화를 주고받는 대신 그들은 침묵했다. 준비를 마쳤냐는 질문 끝에 그들은 걷기 시작했다. 고뇌의 만 최남단을 향해서.


“돌의 집에서 지냈다고 들었는데.”


돌풍이 팔뚝을 스쳤을 때 에스티니앙이 말했다. A는 힐끔 뒤돌아보았다. 조사대 본부는 이제 까마득한 점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목적지는 아직 멀었다. 느적느적 발을 끌며 걷는 마물을 제한다면 이 황량한 공간엔 그들뿐이었다.


“응.”


새카만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고 그래서 A는 한참 후에나마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림자에 젖어 드는 아이테리스를 바라보며 제 고향, 눈보라 치는 산맥이 어디쯤 있을까 가늠했다.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뼈와 피와 살을 파고드는 적막은 이곳 달의 심부에서부터 냉기처럼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했고 그는 그 근원적인 사무침이 조금쯤은 반가웠다. 다양한 의미에서 고독은 편했다.


“이번 의뢰가 끝나면 라노시아로 떠날 거다. 당분간은 거기서 지낼 거야.”


구태여 고른다면 이번의 외로움은 입을 열게 하는 종류였다. 두고 온 모든 것과 그사이에 까마득한 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비롯되는 미약한 자유였다. 달에서 그는 가뿐했고 그래서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에스티니앙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걸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돌아가거든 집에서 좀 쉬어라. 어차피 나는 거기에 없을 테니까.”


에스티니앙은 말을 마치자마자 창을 뽑아 들었다. 거침없이 훌쩍 멀어졌다. 우두커니 선 채로 A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들은 어느샌가 고뇌의 만 최남단이었다. 그들이 토벌해야 하는 마물들이 우주를 등지고 느적느적 걸어 다니고 있었다. 가볍게 뛰어오른 에스티니앙이 사색가들 사이로 내리꽂혔다. 굉음과 함께 먼지 구름이 피었다. 적개심을 감지한 마물들이 에스티니앙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검을 꼬나쥐었다. 천천히 빼냈다. 마음을 굳건히 다잡았다. 숨을 들이켰다. 참았다. 검은 밤을 두르고서 A는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사색가를 베어 넘기며 A는 에스티니앙의 말을 곱씹었다. 돌아가거든 집에서 좀 쉬라는 그 말. 어차피 나는 거기에 없을 테니까, 짧은 들숨, 이어진 이탈과 그로써 찍힌 마침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에스티니앙은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분위기를 살피는 데에 영 재능이 없는 듯하다가도 예상치 못한 어느 순간, 어느 때에 불현듯 매섭게 약점을 찌르고 들어오는. 그런 사람.


방랑가가 길게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그 사체를 뛰어넘으며 A가 대검을 휘둘렀다. 이마에서 송골송골하게 맺힌 땀방울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숨이 북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새삼스럽게 느꼈다. 두 발로 땅을 디디고서 그가 잠시 비틀거렸다. 그다지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몰아붙였던 지난 일주일의 여파였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목이 말랐다. 눈시울이 화끈거리는 탓에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있는 힘껏 찌르고 벴다. 쌓이는 사체를 뛰어넘고, 다음, 다음으로, 쇄도하고, 달리고,


멈추면 안 돼,


가슴께를 짓누르는 압력에 몸을 떨며 생각하던 그 순간, A가 멈췄다. 불현듯 에스티니앙을 보았다. 멀지 않았다. 창을 찌르고 휘두르는 몸짓은 거의 하나의 춤처럼 보였다. 꼬이지 않는 발과 정확히 디뎌야 할 곳을 디디는 발, 몸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다리, 탄력 있는 허리와 창과 하나처럼 움직이는 상체를 바라보면서, 꾹 다물린 입과 다음 목표를 향해 매섭게 집중한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A는 멈췄다. 떨리는 손과 함께 심장이 뛰었다. 밭은 숨과 함께 유류품 같은 기억이 몰려왔다. 재와 눈. 피와 폭풍. 이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결의. 그러나 그림자를 향해 쇄도하는 아우성. 고향, 눈보라, 녹지 않는 얼음에 뒤덮인 산맥, 동방, 행성 아이테리스에 두고 온 모든 것…….


“에스티니앙,”


벌어진 잇새에서 신음 같은 이름이 새어 나오던 순간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얽혔다. 입이 벌어졌다. 찰나의 순간이 길게 붙었다. 시간이 거의 정지한 것 같은 때에 A는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어쩌면. 행성 아이테리스는 까마득히 멀고 그가 제 손으로 덮은 모든 것은 달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달에서는. 비탄으로 메마른 바다에서는. 어쩌면 제 발짓은 해묵은 도망이 아닌 새로운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다음 순간 숨이 막혔다. 목덜미의 솜털이 비쭉 서는 것과 동시에 이성을 아우르는 본능이 순간적으로 몸을 장악했다. A가 땅을 박찼다. 훌쩍 물러났다. 거의 동시에 묵직한 공격이 쇄도했다. 별 표면이 쩍 갈라졌다. 직전까지 A가 서 있던 곳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A가 몸을 낮췄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떨어졌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서서히 인영이 잡혔다. 기세가 강렬했다. A에게는 느껴졌다. 정예 마물의 기척이었다.


“저건……!”


되새기는 자가 쩌렁쩌렁하게 포효했다. 그 외침에서 일어난 돌풍이 A와 에스티니앙을 황포하게 할퀴었다. 사체를 짓밟으며 정예 마물이 으르렁거렸다. 몸을 낮춘 A가 입술을 사리물었다. 리빙웨이의 말이 떠올랐다. 근래 갑작스럽게 숫자를 불린 균류 마물들. 그것들이 얽히고설켜 진화한 존재. 호흡과 함께 전신이 떨렸다. 대검을 꼬나쥔 채로 그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가능할까? 되새기는 자는 S급 정예 마물이었고 그들은 둘뿐이었다. 조사대 본부와 그들이 있는 곳은 멀었다. 지원이 온다고 하더라도 한참 걸릴 것이다. 게다가. A는 대검을 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부터 손의 잔 요동이 멎지 않았다. 대검 무게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착각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맞서야만 했다. 대검을 꼬나쥔 손이 멈추지 않고 떨렸지만. 허파가 뻐근할 정도로 숨이 북받쳤지만. 이마를 적신 땀이, 타는 듯한 목의 갈증이 그를 괴롭게 했지만. 그렇지만. 그는 영웅이었고. 재와 눈, 피와 폭풍을 등졌고. 달에는 그 어떤 것도 묻혀 있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발치를 뒤따르는 그림자가 그 갈퀴를 펼치는 듯했고.


“A!”


매섭게 벼려진 감각이 공격을 감지했다.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A가 황급히 발을 돌렸다. 범위가 넓었다. 달려 나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할지 몰랐다. 이를 악문 A가 고개를 들었다. 손이 있었다. 자신을 향해 내뻗은 손이 있었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아마도 같은 공격을 감지했을 에스티니앙이, 힘껏 손을 내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외쳤다.


“잡아!”


손을 뻗으려는 순간 멈췄다. 불현듯 A는 깨달았다. 더는 안 돼.


그러자 마주친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암전이었다.




재가 눈처럼 내렸다. 광풍에 몸이 나부꼈다. 피투성이 손바닥을 내려다보면서 A는 숨을 삼켰다. 알 것 같았다. 이건 꿈이었다. 도망쳐왔던 곳이었다. 이제는 묻었던. 또는 그렇게 생각했던. 결코 망향이 될 수 없는 고독으로 점철된.


쓰러진 몸 위로 눈이 덮였다. 차츰 무거워지더니 그를 짓눌렀다. 척추를 타고 냉기가 퍼졌다. 얼어붙는 폐부와 숨을 상상하며 A가 입을 벌렸다. 하얗게 언 숨이 위로 구부러졌다. 시야가 온통 잿빛이었다.


산 채로 묻히며 A는 생각했다. 에스티니앙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지막 기억은 내뻗었던 손과 거기서 비롯된 단절이었다. 이후의 일은 어떻게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보라가 뺨을 할퀴고 지날 때 A는 어쩌면, 하고 나지막이 생각했다. 어쩌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기억을 지워버린, 이를테면 차라리 책임 없는 망기에 가까운 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단순히 뭉뚱그린 망각이라기보다는 회수일지도 모르겠다고.


흩날리는 눈에 반쯤 파묻힌 채로 A가 눈만 굴려 시선을 옮겼다. 누군가가 제 곁을 지나고 있었다. 양동이째로 피를 뒤집어쓴 몰골이었다. 피투성이였고, 상처투성이였다. 눈보라 속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채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바람을 따라 몸이 휘꺽휘꺽 흔들렸다. 당장에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웠지만 멈추지 않았다. 재와 눈을 뒤집어쓰고 피와 폭풍을 꿰뚫고 나아가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이어진 궤도의 끝은 구태여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귓전을 타고 생생한 비명이 소용돌이치며 떨어졌다.


“……나!”


A는 제가 살해한 존재들을 기억했다. 한때 살아 숨 쉬던 심장을 꿰뚫는 감각을 기억했다. 지나치게 선명해서 손끝으로 더듬을 수 있었다. 삶을 향한 갈급 하나로 눈보라를 향해 뛰쳐나왔던 그날 발꿈치를 붙잡았던 손길, 그 사소한 떨림 하나까지. 그는 단 한 순간도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피에 젖은 눈, 발목을 잡은 손에서 흘러나온 배신감과 분노는 온몸을 살라 먹는 듯했다. 두려웠고 또 다급했다. 그 손을 뿌리치고서 달음박질칠 때 A는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하고 싶었다. 살고 싶다고. 살아남고 싶다고.


“정……려,”


그러나 어떤 삶은 그 자체로 추모여야 했다.


“……A!”


A가 눈을 번쩍 떴다. 다시 한번, 머리가 판단을 끝마치기 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내리치려던 검이 순간적으로 꺾였다. 거친 몸짓에 손목이 뒤늦게 시큰거렸다. 쿵, 하고 대검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땅에 내리꽂혔다. 동시에 첫 숨이 터졌다. 뺨을 타고 흐른 땀이 에스티니앙의 위로 떨어졌다. 눈이 마주쳤다. 똑바로 마주치는 푸른 눈동자, 그 안에 비치는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A는 차츰 깨달았다.


이미 늦었다. 그의 모든 것이 왔다.


재와 눈, 피와 폭풍, 결의와 아우성을 넘어서 그가 왔다. 결코 뿌리치지 못하는 형태로. 거절할 수 없는 모습으로. 되레 그렇기에 외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어지러운 피로가 몰려들었다.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몸을 지탱하던 대검을 서서히 놓았다. 추락이 이상하리만치 길고 느렸다. 에스티니앙 위로 풀썩 쓰러졌을 때 그는 멀리서 달려오는 쿠루루를 보았다. 그 뒤로 여상처럼 반짝이는 아이테리스를 보았다. 그들을 굽어살피는 것 같았다. 어느샌가 완전히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시야가 울렁였다. 땀과 피가 고여 눈물처럼 떨어졌다.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온 숨이 희미했다.


“혼란이었어.”


가쁘게 뛰어온 쿠루루가 그들을 지나쳤다.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주문을 영창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요란스럽게 울렸다. 무얼 하는 걸까. 되새기는 자를 처치하지 못했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에스티니앙이 이렇게 평온하게 누워 있을 리가 없는데.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그는 추측을 관뒀다. 무슨 일을 하든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몸 전체가 지끈거리는 듯한 피로는 오랜만이었다. A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에스티니앙이 되풀이했다. 혼란이었어. 그것뿐이다. A도 되뇌었다. 혼란. 되새기는 자의 공격을 피하지 못해 일시적으로 혼란 상태였나 보다. 그래서 에스티니앙을 공격한 거고. 그래서 환각을 보았고.


그가 물을까.


환각 속에서 무얼 보았는지. 어째서 손을 젖혔는지. 무슨 생각이었는지. 말단에서부터 점차 무거워지는 몸에 저항하지 않으며 A는 하나하나 셈해보았다. 질문거리는 많았다. 제가 떠올릴 수 있는 것만 해도 수 가지였다. 쿠루루조차 눈치챈 거리였다. 에스티니앙이라면 더더욱 가깝게 느꼈을 것이다. 조금은 두려웠다. 어떤 물음은 건네는 순간 지나치게 많은 것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떠한 말로써 대답해야 할지 그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A는 질문을 기다렸다.


에스티니앙은 끝내 묻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랜 침묵을 선택했다.


입에 머금은 모든 말을 삼킨 채 A는 마침내 의식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