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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만 9천 자, 실제 작업물, FF14 기반 드림, 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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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19.  18:04

‘바닷바람은 습윤하고 소금기가 돌아. 커르다스의 북풍과는 이렇게나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나를 놀라게 해!’

 

손에 쥔 엽서를 뒤집으며 오르슈팡은 입을 가렸다. 아마도 툴라이욜라의 해안가일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그가 한 생각은 지극히 간단했다. 주위를 모두 물리길 잘했어. 그러지 않았더라면 입꼬리가 찢어지겠다며 핀잔이라도 들었을 것이다.

 

A에게서 도착한 엽서였다. 한가한 날이 드문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는 지금 바다 건너 머나먼 이국의 땅에 있었다. 덕분에 아내와 직접 얼굴을 마주친 지는 제법 오래되었지만 외로움이 사무친다거나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A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엽서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엽서 뒷장에 적힌 짧은 글을 거듭 읽은 후에야 마침내 오르슈팡은 종이를 갈무리했다. 지금껏 A가 보내온 엽서는 열댓 장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덕분에 슬슬 새로운 보관 위치를 물색하는 것이 오르슈팡의 최근 관심사였다. 서류철 빈자리에 엽서를 꽂아 넣으면서 오르슈팡은 여태 자신이 받아온 편지들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것들은 모두 이국 툴라이욜라와 투랄 대륙의 총천연색 자연을 담고 있었다. 하나도 겹치지 않는 그림들에서 A의 세심함이 엿보였다. 직접 따라오지 못한 남편에게 제가 머무는 장소가 이다지도 아름답다는 것을 공유하려는 상냥하고도 사랑스러운 노력에 절로 웃음이 났다.

 

엽서를 모은 서류철을 덮으며 오르슈팡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내의 손길이 곳곳에 닿은 흔적이야 있었지만 척박한 커르다스 특성상 방안은 여전히 삭막했다. 기껏해야 A가 손수 만들어준 말린 꽃뭉치가 듬성듬성 벽면을 장식한 정도였다. 등잔불이 일렁일 때마다 그림자가 돌벽 위로 길게 늘어졌다.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대며 오르슈팡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켜면서 상상했다. A가 직접 묘사한 툴라이욜라의 바다를. 거기서 불어닥치는 습윤하고 소금기가 도는 바람을.

 

함께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던 A의 중얼거림이 저절로 떠올랐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던 그의 낯이 눈앞을 스쳐 가자 엷은 웃음이 입가에서 배어 나왔다. 그럴 수 있다면 아주 좋았겠지. 아내와 함께 이국의 해변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찬기가 뺨을 스쳤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광경이 곧장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실망감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아쉬움은 공상에서 오지 않았다. 제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오르슈팡은 단지 생각했다. 단지 물성을 가지고 눈앞에 존재하는 물건, 거기서 흘러나오는 사랑 때문이라고.

 

A는 모든 엽서에 짤막한 글을 적어 보냈다. 대체로 안부 인사였다. 모든 편지 끝에는 꼭 명랑한 마무리 인사가 덧붙여졌다. ‘오늘도 많이 사랑해, 자기야!’ 특유의 글씨체와 여백, 행간과 자간을 읽을 때마다 오르슈팡은 새삼스럽게 되새김질했다. 어떤 사랑은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다. 제아무리 눌러 담아도 기어코 흘러내리다가 이윽고 폭발하고야 마는, 그래서 속절없이 상대를 적셔버리는 감정이라는 건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오르슈팡이 느끼기에 자신을 향한 A의 사랑이 바로 그러했다.

 

그래서 가끔은 이 모든 게 거짓말 같다.

 

고난과 역경, 시련과 환난을 이겨내어 쟁취한 평화였다. 일상이라는 것은 유지하는 데에 지나친 심력이 들어서 때로 오르슈팡은 A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A는 기어코 이겨냈다. 그 모든 방벽을 넘어섰고 자신을 가로막는 운명을 꿰뚫었다. 희망의 끝단에 선 A를 지켜보며 오르슈팡 그레이스톤은 갖은 생각을 흘려보냈다. 정점에 선 찬란함으로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는 아내를 보며 그는…….

 

“지휘관님?”

 

상념을 깨는 목소리에 오르슈팡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샌가 위병 하나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투구를 깊이 눌러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걸친 복장으로 보아 경비대 일원인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오르슈팡이 자연스럽게 서류철을 책상 아래 서랍으로 밀어 넣었다. 각 맞춘 위병은 한번 경례하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성벽 바깥에서 수상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좋을 듯하여 말씀드립니다.”

 

“수상한 흔적? 어떤 종류의?”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법의 일종 같습니다. 습격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혹시 몰라 현장 보존 중입니다.”

 

그러더니 위병이 물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오르슈팡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상한 흔적, 그것도 마법의 일종이라면 총책임자로서 한 번쯤은 맨눈으로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다. 근래야 온갖 소란이 잦아든 평화의 때라지만 이런 순간일수록 지휘관의 임무는 중요해지기 마련이었다. 국지적인 평화가 퍼질수록 사소한 곳에서 자잘한 사건들이 발생하기 일쑤니까.

 

경례한 위병이 앞장섰고 오르슈팡이 뒤따랐다. 제 발꿈치에 달라붙는 경비병들의 시선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오르슈팡은 걸음을 재촉했다. 대문을 나서서 기지를 벗어났을 때 위병은 왼쪽 길로 틀었다. 숲과 성벽이 맞닿은 경계선 쪽이었다. 눈길을 밟으면서 오르슈팡은 주위를 주의 깊게 살폈고, 그러면서도 내심 생각했다. 만일 이것이 정말로 습격이라면 상대방은 영리한 사람일 것이다. 숲과 맞닿은 경계에 마법 흔적이 남았다는 건 아마도 원거리에서 날아온 공격일 가능성이 높을 테고,

 

“이쪽입니다.”

 

위병을 따라 걸으면서 오르슈팡은 생각에 마침표를 찍었다. 어찌 되었든 제가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사건 현장을 확인한 이후 알맞은 지시를 내리고, 수사의 필요성을 느낀다면 원조 요청을 파견할 것.

 

오르슈팡은 위병을 따라 걷는 내내 충실히 자신의 업무에 집중했다. 해야 할 일과 확인해야 할 부분들을 하나하나 고르고 셈했다. 그러는 와중 여유가 될 때마다 종종 A를 생각했고, 그 습윤한 바닷바람과 풍랑에 맞추어 흔들릴 치맛자락을 상상했다. 몽상 속의 아내와 눈이 마주치자 A는 얼굴을 활짝 일그러트리며 웃었고, 짓궂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일에 집중해야지, 자기야!’

 

듣기 좋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잔상처럼 남았을 때 앞서가던 위병이 멈춰 섰다. 마찬가지로 걸음을 멈춘 오르슈팡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신이 맞아, 하고 생각하며 그가 혀를 찼다. 지금은 일에 집중할 때였다.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나무와 높이 쌓인 눈, 거친 성벽이 뿜어내는 침묵에서 감도는 기묘한 위화감이 오르슈팡의 신경을 갉작대기 시작한 것이다.

 

“벽은 깨끗한데.”

 

“그렇습니까? 이상하네요, 분명 있었는데…….”

 

“어느 쪽이었지?”

 

“여기, 이 부분이었습니다. 네, 맞닿은 그 부분이요.”

 

눈을 찡그린 오르슈팡이 벽으로 다가갔다. 손끝으로 성벽을 한번 쓸어내리자 돌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이상한 건 없었다. 돌벽에 남은 자취라곤 천년 전쟁과 세월이 남긴 흠, 그리고 그것을 보수한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오르슈팡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무언가 이상한 건 맞았다. 황량한 바람이 불어닥칠 때 오르슈팡은 질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공간 자체를 뒤덮은 기이한 위화감이 목덜미의 솜털을 비쭉 솟게 했다. 오르슈팡은 재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위병에게 흔적을 발견하게 된 자세한 경위를 듣고……. 제가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곱씹으며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윽!”

 

아찔한 어지럼증과 함께 세상이 돌았다. 무릎이 힘없이 꺾인 탓에 몸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며 오르슈팡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단숨에 혼곤해지며 힘이 빠지는 몸과는 달리 이성은 또렷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하나였다. 습격인가? 검집을 더듬으며 오르슈팡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마주쳤다. 투구 아래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위병이 한 손에는 주머니를, 다른 손에는 대검을 들고 서 있었다. 비린 웃음을 발견했을 때 벼락같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깨끗한 성벽, 외진 공간, 얼굴을 가린 위병……. 정황은 확실했다. 제 안일함을 탓하며 오르슈팡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검을 빼내어 꼬나쥐었지만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괜한 반항은 하지 말자고, 형씨. 그냥 수면 향이니까.”

 

“큭, 넌…….”

 

“자고 일어나. 해코지는 안 할 테니까. 아마도?”

 

얼굴을 가린 위병이 킬킬거렸다. 이지러지는 시야 너머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무장한 용병들이었다. 동시에 오르슈팡의 몸이 고꾸라졌다. 눈밭에 얼굴을 박으며 그가 쓰러졌다. 손끝을 간신히 꿈틀거리며 오르슈팡이 거친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날카로운 직감이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곧이다. 곧 완전히 의식을 잃는다. 기지 사람들이 이상을 감지하는 데에는 얼마나 걸릴까. 커르다스는 금세 눈보라가 몰아쳤다. 제가 걸어오며 남겼던 발자취 같은 건 악천후가 순식간에 지워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추적도 까다로워질 텐데.

 

그러나 오르슈팡의 가장 큰 걱정은 A였다. 제가 실종되었다는 소식, 혹은 납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A는 어떻게 반응할까?

 

이를 악문 오르슈팡이 몸에 힘을 주었고, 마지막 바르작거림을 끝으로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잖나. 그래서…….”

 

“하지만……. ……고 싶지 않은걸!”

 

“그렇다면 차라리…….”

 

그리고 오르슈팡은 눈을 떴다.

 

잠기운이 도통 물러가지 않은 탓에 그가 메마른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굴린 눈동자를 통해서 전달되는 정보를 하나하나 곱씹기 위해 그는 어지러운 시야에도 갖은 수를 써야만 했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이불을 말아쥐며 오르슈팡은 깊게 심호흡했다. 천장과 침구로 보아하니 여긴 포르탕 저택, 그중에서도 귀빈실이었다. 하지만 제가 왜 포르탕 저택의 귀빈실에 누워 있단 말인가? 게다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오르슈팡!”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 정체불명의 여자였다.

 

오르슈팡은 자신을 끌어안은 여자의 품에서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따뜻한 걸 보아 사람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헛것 같은 게 아니라. 그렇지만 사람이라면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대체 왜 포르탕 저택의 귀빈실에 난생처음 보는 여자가 있는 것이며, 그도 모자라 거리낌없이 자신을 끌어안는 거지?

 

영문 모르는 채로 눈을 깜빡이던 순간 숨통이 트였다. 숨 막히도록 자신을 끌어안았던 여자가 천천히 물러난 것이다. 걱정스러운 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정확히 오르슈팡에게 향했다. 창문에서 떨어지는 빛살이 여자의 머리칼 위에서 울렁일 때, 그의 머리 장식에서 은색이 도드라지게 빛나는 모습을 오르슈팡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분명 품에서 떨어졌는데도 왜 여전한 압력이 제 심장을 짓누를까 의아해하면서.

 

“괜찮아?”

 

백은으로 만든 머리 장식과 같은 순수한 빛을 한 눈동자가 오르슈팡을 응시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오로지 그만을. 그래서 오르슈팡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누구며 여기에 왜 있냐는 질문 같은 건 그 눈을 보는 순간 전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궁금증의 끝단으로 밀려난 그것들 대신 오르슈팡의 혀에 맺힌 의문점은 또 다른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래. 당신은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지? 마치 내가…….

 

“아, 깼군.”

 

생각에 마침표를 찍기 직전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오르슈팡이 작은 몸을 퍼뜩 떨며 고개를 돌렸고, 거의 직후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낯선 남자였다. 어딘가 익숙했지만 누구인지 곧장 떠올릴 수는 없었다.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면서 오르슈팡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전부 무슨 일이지? 이슈가르드가 자랑하는 명문 귀족가 포르탕의 저택에, 그것도 엄선된 몇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귀빈실에, 제가 알지 못하는 존재가 둘씩이나 있다는 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와 남자는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하고 여자가 오르슈팡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과 손이 겹쳤을 때 오르슈팡은 흠칫 몸을 떨었고 여자는 당돌하게 말했다.

 

“결정을 내려줘, 아르투아렐! 적어도 누군가가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건 확실하잖아.”

 

“으음,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 정말로 바쁘지 않으니까! 게다가 경호원으로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저쪽에서도 단념하지 않을까? 어지간한 경호 인력보다 내가 더 나을 거야. 정말이야. 나 자신 있어!”

 

남자가 눈을 찌푸렸다. 오르슈팡과 여자를 번갈아 바라본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턱을 쓸어내리면서 고심하는 듯하던 그는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주장한다면야, 하고 남자는 중얼거렸지만 그 목소리는 여자의 환호에 곧 묻혔다.

 

“나만 믿어! 자기한테 솜털 하나도 갖다 대지 못하게 할 테니까!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 소울 크리스탈 좀 가져올게. 경호원에게 무기와 소울 크리스탈은 필수니까. 응.”

 

그렇게 외친 여자가 오르슈팡을 향해 뒤를 돌았다. 그러더니 눈을 찡긋거리며 말하는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여보!”

 

여자가 먼지바람을 일으킬 듯 재빠르게 귀빈실을 벗어났을 때 오르슈팡은 딱 세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저기 이마를 짚고 선 남자는, 비록 믿기지는 않지만, 아르투아렐 드 포르탕일지도 모른다. 둘째,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셋째, 제 호위를 도맡게 된 부산스러운 여자가 자신을 여보라고 불렀다는 것.

 

“……이런. 혼란스러운 얼굴이군.”

 

얼굴을 문지르던 ‘아르투아렐’과 눈이 마주쳤을 때, 오르슈팡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구멍 속에서 그를 향한 질문이 소용돌이쳤지만 어떠한 것도 쉽사리 내뱉을 수 없었다. 대신 오르슈팡은 천천히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제 감정이 전부 낯에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그것대로 달갑지 않았다.

 

말이 없던 아르투아렐이 천천히 움직인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우선 의자를 끌고 와 침대맡에 앉았다. 그렇군,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오르슈팡은 이 기묘한 기류가 자신에게만 불편하게 느껴지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어째서 아르투아렐이 하루아침에 저렇게 장성했는지도.

 

“어디까지 기억하지? 네가 누구이고 몇 살인지는 알고 있나?”

 

기묘한 질문이었다. 오르슈팡은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제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거북함, 그것을 닮은 경계심을 차분히 곱씹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오르슈팡 그레이스톤. ……나이는 열여섯.”

 

“열여섯이라.”

 

이번에는 아르투아렐이 얼굴을 찡그렸고, 오르슈팡은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어진 아르투아렐의 첫마디가 놀라지 말고 들어라, 였기 때문에.

 

“우선, 여긴 네게 따지면 미래라고 할 수 있겠군.”

 

그리고 그러한 말이 대체로 놀라운 내용을 함유하듯 아르투아렐의 이야기 또한 매한가지였다.

 

아르투아렐이 말을 끝맺었을 때, 오르슈팡은 제가 아르투아렐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습격을 당해 제 기억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육체와 정신적 나이가 어려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애당초 그런 종류의 일이 가능한지에 관한 의심을 차치하고서도 말이다.

 

오랜 고민과 이해를 향한 갈급 끝에 오르슈팡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누구인가? 다른 모든 것은 아르투아렐의 설명에 포함되었지만 여자의 존재만은 빠져 있었다. 모호한 표정으로 글쎄, 직접 듣는 편이 낫겠군, 하고 넘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제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과 얽혔던 여자이리라는 사실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애칭으로 추측하자면 부부 관계일 것이다.

 

단지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도무지 생각해 보아도 오르슈팡은 제가 무얼 어떻게 해야 그런 여자와 얽힐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여자, 제 호위를 자처하던 여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와는…….

 

“오르슈팡! 자기야! 내가 왔어!”

 

궁금증을 해소할 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요란스럽게 등장한 건 어김없이 그 여자였다. 오르슈팡이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귀빈실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여자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기백인가. 분위기인가? 소울 크리스탈을 가져오겠다던 말은 빈말이 아닌 듯했지만 무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르슈팡의 시선이 여자를 지나 아르투아렐에게 향했다. 직전까지 묘하게 긴장한 듯했던 아르투아렐의 안색이 서서히 풀리는 광경을 지켜보며 그는 한층 더 궁금해졌다. 여자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럼 잘 부탁하지. 사건이 수습될 때까지만이라도.”

 

“걱정하지 마. 옆에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잠깐……. 내 의사는,”

 

“그럼 나는 이만. 아, 그렇지.”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투아렐이 오르슈팡을 향해 돌았다. 묘하게 상냥해진 낯으로 그가 한번 웃으며 말했다.

 

“되도록 포르탕 저택에서 머물러주면 고맙겠군. 바깥은 경호가 저택 안처럼 크게 미치지 못해서 말이야.”

 

“괜찮아. 밖에서도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안심해, 자기야!”

 

아르투아렐의 말에 여자가 속삭였다. 오르슈팡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만 꾹 다물었다. 떠나는 아르투아렐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그는 천천히 깨달았다. 애당초 제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이 여자의 경호를 두고 왈가왈부할 자격 같은 것은.

 

오르슈팡은 아르투아렐에게서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았고, 그러자 여자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는 A야. A라고 불러! 잘 부탁해?”

 

그 웃음을 바라보면서 오르슈팡은 입술을 지그시 삼켰고 또 동시에 생각했다. 나는 당신은 믿지 않아.

 

A를 신뢰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상 그를 호위로써 달고 다니는 건 지나치게 부담이 큰 일이었다. 따라서 오르슈팡은 결단을 내렸다. 도망치자. 혼자된 몸으로 아르투아렐에게 가 A의 무능함을 증명하자. 그리고 요구하는 것이다. 호위를 바꿔 달라고. 그를 뿌리치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오르슈팡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효과적으로 도망칠 수 있는지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지 오르슈팡의 패착을 꼽으라면 그건 아마도 여자, A의 끈질김이 되리라. 귀빈실을 나서고 장장 삼십 분 만에 오르슈팡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본래의 계획은 간단했다. 첫째, A에게서 도망친다. 둘째, 아르투아렐을 찾아간다. 셋째, A를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다른 호위를 받는다. 그는 저 여자에게서 흐르는 기백과는 별개로 보이는 성격상 A의 일 처리는 허술하리라 추측했고, 따라서 이 모든 일을 한 시간 안에 해치워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에야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지만.

 

A는 상상 이상으로 이러한 일에 능숙해 보였다. 정말, 말 그대로, 오르슈팡이 상상했던 것 아득히 이상으로.

 

시종일관 밝은 태도와는 달리 한 치의 빈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슬그머니 자리를 이탈하려고 하면 눈 깜짝할 새 따라붙었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사이에 끼어들어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야. 짧지 않은 사투 끝에 오르슈팡이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마땅한 기회를 포착하지 않는 한 도망은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지금도 매한가지였다. 오르슈팡은 읽는 둥 마는 둥 하던 책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도망 아닌 도망을 거듭하다가 쫓기듯 들어온 서재였다. 타들어 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책장을 기웃거리는 A는 태평하기만 했다. 관심이 없는 듯도 보였지만 동시에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딱 적당한 거리였다. 과도하게 곁에 붙어 호위임을 드러내지도 않는 동시에, 한두 번의 도약으로도 순식간에 가까이 붙을 수 있는 적정선. 그들 사이에는 오로지 책장 서너 개만이 존재했고 A는 그 사이를 익숙하게 오갔다. 이런저런 책을 펼쳐보고 꽂는 행위가 지나치게 평온하여 약간의 권태로움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펼친 책 너머로 오르슈팡이 A를 바라보았다.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여자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A가 눈을 접으며 활짝 웃었다. 오르슈팡은 마주 웃어주거나 이렇다고 할 반응을 보이는 대신 얼굴을 도로 푹 숙였다. 부러 책을 높이 들어 낯을 숨기자 옅은 웃음소리가 났다.

 

애당초 오르슈팡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저 여자는, 가문의 외부인일 게 분명한 A는 포르탕 저택의 서재를 펼친 손바닥 읽듯이 훤히 알고 있는 듯 구는 거지? 서재뿐이 아니었다. 오르슈팡은 A를 떨치기 위해 저택에서 가장 복잡하다고 알려진 장소, 이를테면 연회장이나 부엌, 하다못해 아르투아렐의 집무실 근처까지 서성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매번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A는 포르탕 저택의 구석구석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굴었고, 실제로도 그 능숙함이 모든 태도에서 엿보인다는 사실을.

 

포르탕 저택의 외부인이 저택 내부를 이렇게 잘 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제아무리 오르슈팡의 아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그는 포르탕의 직계들이 방계인 자신의 아내를 저택에 들일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여자의 정체에 관한 수수께끼는 무럭무럭 자라나는데 마땅한 대답을 도출해 줄 인물은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약간은 초조한 마음으로 오르슈팡이 입술을 깨물었다. 대단한 사람이다. 그건 확실했다. 아르투아렐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사람. 저택에 사는 모든 이의 호감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존재. 오르슈팡이 본 A는 웃음을 몰고 다니는 여자였다. 어딜 가든 가장 중심에 서게 되는 태풍의 눈 같은 사람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그런 여자가 제 호위를 자처한단 말인가? 정말로 그들은 부부 관계가 맞기는 한 걸까? 게다가 A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오르슈팡은 자신을 향한 두 눈동자가 크게 울렁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 파문이 슬픔이나 두려움이 아닌 환희 같은 찬란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궁금했다. 당신은 누구지? 당최 무슨 사람이기에 나를 그런 눈으로 봐?

 

나는 당신을 믿지 않는데.

 

당신 같은 사람은 믿지 않는데.

 

“A님!”

 

그래서 사용인이 서재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을 때, 오르슈팡은 이것을 기회로 삼고자 했다.

 

“무슨 일이야?”

 

“커, 커르다스 서부고지에서 정예 마물이……. 현재 현지 부대가 총력을 다해 대응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고 합니다!”

 

“베히모스가?”

 

A가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모양새로 여자는 잠시간 침묵했다. 오르슈팡은 턱을 쓸어내리는 A를 힐끔 곁눈질했다. 베히모스. 커르다스 서부고지의 악명 높은 정예 마물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에 자연히 떠올랐다. 이후 뒤따른 건 궁금증이었다. 현지 부대가 힘이 부칠 때 A를 찾는다는 건 당최 무슨 의미일지.

 

대답을 도출해 내기 전 A가 움직였다. 사용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그가 오르슈팡을 향해 몸을 돌린 것이다. 이전과 다름없는 표정으로, 그러나 미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풍기며 A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르슈팡이 책을 내리고 고개를 들자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러자 A는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금방 돌아올게, 자기야! 정말 금방일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깊은 포옹이 뒤따른 탓에 오르슈팡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A는 벙찐 오르슈팡을 두고서 순식간에 서재를 벗어났다. 넋을 놓은 오르슈팡을 힐끔거리던 사용인마저 슬그머니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르투아렐을 만나러 갈 거라면 지금이 기회였다. A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어째서인지 오르슈팡은 이 모든 일을 순식간에 해치워야 한다고 직감했다. A는 금방 돌아오겠다던 말을 충실하게 지킬 테니까.

 

오르슈팡이 단숨에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급한 걸음은 맨 먼저 아르투아렐의 집무실로 향했다. 다급하게 방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슬그머니 문을 열어 들여다본 집무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입술을 짓씹고 있을 때 때마침 아르투아렐의 집사가 복도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집무실 문고리를 붙잡은 오르슈팡을 발견한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오르슈팡은 내심 안도하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아르투아렐 형님은?”

 

“잠시 집사장님과 보석홀장 거리에 가셨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형님이 돌아오시거든 내가 찾는다고 말을 전해주면 고맙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오르슈팡은 뒤를 돌았다.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집사가 그를 불렀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보석홀장 거리라면 성도 내 에테라이트를 타고 금방이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집사에게 이야기도 해놓았으니 A가 돌아오기 전까지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미약한 안도감을 느끼며 오르슈팡이 걸음을 재촉했다. 정문으로 나가는 대신 그는 사용인들이 종종 사용하는 뒷문으로 향했다. 청지기에게 붙잡히거나 A를 맞닥뜨릴 위험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예정된 연회나 행사가 없는 뒷문은 한적했다. 몇 없는 사용인들은 저들끼리 모여 삼삼오오 떠들기 바빴다. 몸을 수그리고 기척을 죽인 채로 오르슈팡은 살금살금 문틈을 비집고 나섰다. 저택을 벗어나자마자 곧장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렸고, 가까운 에테라이트에 다다르자마자 보석홀장 거리로 이동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보석홀장 거리에 다다르는 순간 오르슈팡은 제 선택을 후회했다.

 

에테르 멀미가 멎고 두 발로 땅을 디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제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더니 그대로 끌어안았다. 반사적으로 뿌리치려는 순간 축축한 천이 코와 입을 완전히 덮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켠 오르슈팡은 직후 후회했다.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지만 자신을 붙든 압력은 지나치게 단단했다. 알 수 있었다. 성인 남성, 그것도 제대로 단련한 전문적인 전투 인원이었다. 아르투아렐의 말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되도록 포르탕 저택에서 머물러달라던 그 말.

 

그러나 손끝이 둔해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한 순간, 오르슈팡은 A를 떠올렸다. 순식간에 닥친 포옹과 밝은 미소, 한 치 의심 없이 단단하던 그의 말을. 금방 돌아올게. 정말 금방일 거야…….

 

 

 

눈을 떴을 때 그는 누워 있었다. 주위에는 불빛 하나 없었고 짙은 어둠만이 오르슈팡의 얼굴을 깊이 덮은 채였다. 가로누운 그의 몸 위에는 얇고 까끌까끌한 모포가 얹혀 있었지만 냉엄한 성도의 추위를 막아서기엔 역부족이었다. 엄습하는 추위에 오르슈팡은 몸을 떨었고 한 차례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직후 제 두 손과 발이 단단히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일일이 곱씹을 필요는 없었다. 이건 명명백백한 오르슈팡의 패착이었으니까. 어쩌면 아르투아렐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은 대가일지도 몰랐다. 이런 종류의 습격이 닥칠 것을 예상해야 했는데. 오르슈팡이 이를 악물었다.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보았지만 손발을 묶은 밧줄은 억셌다. 단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지만 이건 무리였다. 당장 엿보이는 밧줄은 두께만 하더라도 범상치 않았다.

 

거친 숨을 들이켜고 삼키며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걸릴까? 제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뒷문으로 나왔으므로 오르슈팡을 목격한 마지막 사람은 아마도 아르투아렐의 집사일 것이다. 전언을 남겨둔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보석홀장 거리로 향하려던 제 의도를 추측할 수야 있을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이 느닷없는 습격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게다가 눈치챘다고 하더라도 포르탕 백작가가 들이닥칠 때까지 오르슈팡이 살아있을지도. 아니, 어쩌면……. 조금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그는 제 입술을 짓씹었다. 오르슈팡 그레이스톤. 그는 포르탕이 아니었다.

 

아르투아렐 형님이 제게 친근하게 대한 것이 되레 이질적인 일이었다. 백작가가 자신을 구하러 오리라 기대하는 건 지나친 낙관이었다. 서서히 발치를 적시기 시작한 현실감에 오르슈팡은 더욱 몸을 웅크렸다. 그는 긍지 높은 포르탕 백작가의 사생아였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자면 아마도 이 습격을 계획한 뒷배가 포르탕이라는 가설일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 하고 자못 필사적인 마음으로 오르슈팡은 스스로 되뇌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랬더라면 아르투아렐이 제게 친절하게 대했을 리가 없다. 그랬다면, 정말로 포르탕이 이 모든 음모를 꾸민 것이라면…….

 

벌컥 열린 문 너머로 걸어들어온 용병을 올려다보면서 오르슈팡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뭐지.

 

“아, 깨셨군.”

 

“그래? 어디 봐.”

 

“이봐! 오십 길 내놔! 이 승부는 내가 이겼어.”

 

우르르 들이닥친 용병들이 오르슈팡을 둘러쌌다. 그들 사이에서 한 차례 낄낄거림과 주머니 하나가 돌았다. 오르슈팡은 그 광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과 손을 타고 흐르는 가죽 주머니 속에서 동전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자신을 두고서 내기를 걸었다는 사실에 치욕스러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약간은 안도했다. 그들에게서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단숨에 죽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조금은 담대하게 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계산을 마친 오르슈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누구지?”

 

“도련님이 물으신다, 얘들아. 교양 차리고 입 좀 닥쳐.”

 

“제일 못 배운 새끼가 말이 많아.”

 

“그 아가리 찢어놓기 전에 입 다물라 했어.”

 

“어디 한번 해보시던가! 어때, 이건 오십으론 안 되지.”

 

지적당한 용병이 킬킬 웃었다. 그의 눈이 섬찟하게 빛났다. 좌중을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곧 오르슈팡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용병이 이죽거렸다. 성큼 다가온 그가 허리를 숙여 오르슈팡을 내려다보고는 속삭였다.

 

“내가 이기면 이 도련님 오른손 정도는 떼주지 그래?”

 

“무슨,”

 

“사지 멀쩡하란 말은 없었잖아? 걱정은 마라, 이상한 데에는 안 쓰니까. 나는 그냥,”

 

저급한 농담과 함께 용병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비린내 섞인 악취가 코를 찌르는 탓에 오르슈팡은 눈을 찌푸렸다. 몸을 물리려는 찰나 어깨를 붙잡혔다. 엄청난 악력이 뼈를 부술 듯 그를 압박했다.

 

“그 괴물 여자가 울부짖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거야.”

 

그 괴물 여자.

 

심장이 가쁘게 달아올랐다. 피가 몰려 얼굴이 뜨거워졌다. 일말의 신음도 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면서 오르슈팡이 용병을 노려보았다. 온갖 충동이 범람하기 시작한 머릿속에서도 남자의 말은 또렷한 존재감을 가지고 가라앉지 않았다. 그 여자. 괴물 여자. 울부짖는 모습.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불안이나 두려움과는 일치하지 않는 감각이었다. 타들어 가는 분노로 오르슈팡은 입을 열었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나마 내뱉기 위해 목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멈췄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윤곽을 훑을 새도 없었다. 날쌘 바람이 오르슈팡의 뺨을 훅 스쳤다. 그러자 오르슈팡의 어깨를 붙들었던 용병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뺨에 액체가 튀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오르슈팡을 붙잡은 건 누군가의 손이었다. 따뜻하고 축축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익히 들어보았지만 동시에 낯선 온도였다.

 

“눈 감고 있어.”

 

명령이나 지시라기보다는 부탁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하지만 오르슈팡은 그렇게 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껏 예민해진 청각으로 소음의 파도가 몰아닥쳤다. 잡아, 붙잡아, 죽여 따위의 고함이 사방에서 터졌다. 무기를 뽑는 소리, 철제와 철제가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소음이 오르슈팡을 둘러싼 온 대지에서 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오르슈팡을 떨리게 한 건 사람의 단말마였다. 살아있던 사람이 단숨에 스러질 때 으레 나곤 하는 그 지리멸렬한 마무리음.

 

한참 후 사위가 고요해졌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침묵을 믿기로 결심한 오르슈팡이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았던 시야가 느리게 말끔해지며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막혔다.

 

쓰러진 용병들을 발치에 둔 채로 A가 서 있었다. 그의 뒤로 쏟아지는 햇살 탓에 얼굴을 읽을 수 없었다. 약간의 어지럼을 느끼며 오르슈팡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A는 빈손이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로 느리게, 마치 생명이 깃든 거목이나 산맥만 한 영물이 똬리를 트는 것만큼이나 느리고도 압도적인 몸짓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도 모르게 오르슈팡 또한 두리번거렸다. 움직이는 건 그 자신과 A뿐이었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A가 성큼 가까워졌다. 오르슈팡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었다. 화가 난 걸까? 말도 없이 나가서? 성가신 일을 벌여서? 그러나 그 모든 우려보다 제 의심을 들켰을 거라는 사실이 더욱 부끄러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땅한 말을 찾느라 오르슈팡이 입술을 깨물었다.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A가 손을 뻗었을 때 오르슈팡은 경직된 몸으로 힘껏 외쳤다.

 

“미안,”

 

“다행이다…….”

 

그러나 A는 오르슈팡을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두 가슴이 빈틈없이 밀착했다. 제 목덜미를 파고드는 A에 오르슈팡은 잠시 멍해졌다. 목덜미를 달구는 뜨거운 숨과 떨리는 몸, A의 잇새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중얼거림을 주워섬겼을 때 오르슈팡은 불현듯 묻고 싶어졌다. 당신은 왜 그런 목소리를 하는 거지? 누군가를 거침없이 베어 넘기고 망설임 없이 맞섰으면서. 두려움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으면서. 인제 와서 그런 미약한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는 까닭은 도무지 무어란 말이야. 그것도 제게. 자신에게. 오르슈팡 그레이스톤을 향해.

 

그를 단단히 껴안았던 A가 천천히 멀어졌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멍이 든 손목을 두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A는 입술을 질끈 사리물었다. 차오른 수심이 눈매에 고이다가 떨어질 것만 같아 오르슈팡은 슬그머니 손목을 거두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어떤 슬픔은 상대가 침묵하게 한다는 사실을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전히 A를 신뢰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째서인지 여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표정을 알고 싶었다. 읽는 것 이상으로, 단순한 인식을 넘어선 범위로써 이해하고 싶었다. 그 비애와 슬픔과 분노가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발화되었는지 알아야만 한다는 충동이 오르슈팡의 발치에서 어른거렸다. 멍울진 손목을 내려다볼 때, 그 숙인 시선 끝에서 A의 손가락이 언뜻 잡힐 때마다 그는 제 의심을 곱씹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A 같은 사람은. 하지만 황무지에서도 싹 트는 씨앗이 있듯 불신 속에서도 마음은 발아한다.

 

“어딜 가는 거야?”

 

그날 저녁 오르슈팡은 A를 붙잡고 물었다. 이제는 오르슈팡의 임시 거처가 된 귀빈실 앞에서였다. A는 낮에 보였던 순간적인 침통함이 마치 거짓인 양 두 눈을 순하게 깜빡거렸다. 무슨 일이야, 하고 되묻는 목소리는 되레 지나치게 단조로워서 오르슈팡은 그때 제가 보았던 A는 환각이었는지 궁금해졌다.

 

“가는 것 같아서. 어디론가로.”

 

“부끄러워라! 사실은 말이야. 자고 가면 좋겠지만 내 방, 치우다 말았거든. 어차피 포르탕 저택 안이니 안전할 것 같아서 거처로 돌아가려고.”

 

뺨을 붉힌 A는 그러더니 덧붙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몰래 나가면 안 돼, 자기야! 정말로 제때 맞추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그런 짓은 하지 않아.”

 

이번에는 오르슈팡이 중얼거렸다. 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A가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오르슈팡은 더는 신경 쓰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대신 그는 슬그머니 귀빈실을 둘러보았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영 불편한 장소였다. 마음 놓고 휴식하기에 이곳은 지나치게 격식 있었다. 고풍스럽고 값비싼 가구 하나하나가 이건 너의 것이 아니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따라서 오르슈팡은 다시 한번 A를 붙잡았다. 이번에야말로 떠나려는 듯 망설임 없이 발을 떼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왜 그래, 하고 물어오는 A를 향해 오르슈팡이 말했다.

 

“데려다줄게.”

 

“누굴? ……나?”

 

오르슈팡이 고개를 끄덕였다. 뛸 듯이 기뻐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A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이 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먹으로 손바닥을 경쾌하게 치더니 말했다.

 

“차라리 카벙클을 두고 가는 건 어때? 그럼 외로운 건 덜할 텐데. 아니다, 혹시 모르니까 옆에 붙여두는 편이 낫겠어, 응!”

 

“잠깐,”

 

“위험 감지용이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마! 게다가 카벙클은 내 에테르로 만들어지니까, 끌어안으면 자기도 나를 느낄 수 있을 거야. 일거양득이지!”

 

“기다려, 나는 그냥…….”

 

“그러니까 데려다주는 건 괜찮아! 어차피 그랬다가는 아르투아렐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쳐다볼걸.”

 

그러며 A가 웃었다. 오르슈팡은 짧게, 아주 짧게 뜸을 들였다. 그리고 제가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야 말았을지 모른다는 자각과 함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택에 지내는 것이 아니야?”

 

“아, 저런. 말을 안 했구나!”

 

A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했다. 불길한 감각은 이럴 때만 소름 끼치도록 잘 맞는다는 생각이나 하면서, 오르슈팡은 입을 딱 다물었다.

 

“나, 용머리 전진기지에서 지내! 이 밤중에 호위 대상을 그 멀리까지 가게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응.”

 

그래도 신경 써줘서 고마워, 하는 A의 말에 오르슈팡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르슈팡이 다시 한번 잡아보기도 전에 A가 떠났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혼자 남았을 때 오르슈팡은 제 발치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벙클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마법 생물을 품에 안자 희미한 온기가 맞닿은 가슴팍에서 전신으로 퍼졌다. 카벙클이 내뿜는 짙푸른 빛이 시야에서 일렁일 때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돌아보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고선 가만히 생각했다. 전진기지에서 머문다고. A가. 어째서?

 

A는 포르탕 저택의 귀빈이었다. 그 사실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손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포르탕 저택 구석구석을, 심지어는 오르슈팡마저도 허락되지 않은 장소까지 거리낌없이 드나드는 것 같았다. 그건 친지와 맞먹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막상 머물 방 하나 없다는 건 희한한 일이었다. 게다가 전진기지는 오르슈팡이 기억하는 한 누군가가 몸을 위탁하기엔 지나치게 척박했다.

 

서재에서 그는 제가 모르는 미래에 성도에서 모험가들을 위한 토지를 내어주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차라리 그곳에서 땅을 사고 집을 짓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왜 하필 전진기지인 걸까? 게다가, 하고 오르슈팡이 카벙클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전진기지는 사령관의 지시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따지자면 군사 영역이므로 민간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A는 어떻게?

 

A가 떠난 첫날 밤 오르슈팡은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다가 날을 꼬박 샜다. 직접 물어보는 편이 좋겠다고 결심했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아르투아렐의 비서였다. 비서는 아르투아렐이 전한 말을 그대로 읊고서 의사를 묻고 떠났다. 오르슈팡은 모든 이야기에 경청했고 그랬기에 덩그러니 남아 오랫동안, 이전보다도 깊은 고민에 잠긴 채 서 있었다.

 

둘째 날 밤 오르슈팡은 제가 정말로 A와 결혼한 사이라는 사실을 곱씹느라 잠을 설쳤다. 결혼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오르슈팡의 의문은 몇 가지가 해결되었지만 또 몇 가지는 새롭게 생겨났다. 명확히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여전히 호위를 바꾸고자 한다면 돕겠다는 아르투아렐의 제안은 거절했지만 막상 A는 그날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틀이 지나 사흘, 사흘을 넘어 나흘째가 되던 날 오르슈팡은 기어코 결심했다. 그는 아르투아렐에게 부탁해 저택의 호위병 몇을 이끌고 길을 떠났다. 습격에 대비해 잔뜩 긴장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렇다고 할 소요는 없었다. 정문에서 두 발을 디디고 섰을 때, 강한 맞바람과 함께 눈 한 뭉치가 제 뺨을 할퀴고 지나간 순간, 오르슈팡은 참았던 숨을 탁 터트렸다.

 

용머리 전진기지였다.

 

 

 

임시로 사령관 대리를 맡고 있다는 코랑티오와는 말이 잘 통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르슈팡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그는 어째서인지 약간 웃음을 참는 기색이었지만 그 정도는 기꺼이 참고 넘겨주기로 했다. 다름이 아니라 코랑티오는 이 용머리 전진기지를 편하게 돌아다녀도 괜찮다고 허락을 내려준 것이다.

 

“A가 지내는 장소를 알고 싶은데.”

 

“영……, 모험가님 말입니까?”

 

오르슈팡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코랑티오가 내뱉으려다가 삼킨 말이 무엇일지 내심 궁금했지만 그것까지는 묻지 않았다. 사령관 대리는 약간 갈등하는 눈으로 오르슈팡을 내려다보았지만 곧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곁에 서 있던 기병을 향해 고갯짓했다.

 

“따라가시면 될 겁니다.”

 

“고맙군.”

 

“그런데, 오르슈팡님,”

 

오르슈팡은 떠나려던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코랑티오는 어째서인지 조금 복잡한 표정이었다. 영문 모를 낯으로 눈을 깜빡이자 코랑티오가 입을 몇 번 달싹였다. 이야기는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나왔다.

 

“지금 안 계실 것 같습니다만…….”

 

“괜찮아. 확인만 할 거다.”

 

“으음…….”

 

“무슨 말이길래 그래?”

 

오르슈팡이 눈을 찡그렸고 코랑티오가 눈을 굴렸다. 그의 결심은 영 지지부진했고 그래서 오르슈팡은 코랑티오에게 윽박이라도 질러야 하나 잠깐이나마 고민했다. 오르슈팡의 많지 않은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 코랑티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말했다.

 

“놀라지는 마십시오.”

 

“놀라긴?”

 

“보시면 알 겁니다.”

 

고민한 시간을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싱거운 말이었다. 오르슈팡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병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언뜻 코랑티오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 그 미약한 소리에 어째서인지 약간의 즐거움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착각을 뒤로하고서 오르슈팡은 걸음을 재촉했다.

 

사령관실을 나오자마자 기병은 오른쪽으로 두 번 꺾었다. 그가 멈춰 선 건 벽으로 둘러싸인 외진 응접실이었다. 포르탕 가의 기병 하나가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기병은 놀란 기색이었다. 들어가시겠습니까, 하고 묻는 말에 오르슈팡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병이 비켜선 문 앞에서 오르슈팡은 짧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은 A를 만났을 때 물어야 하는 질문들로 가득했다. 당신이 나와 결혼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그렇다면 어째서 그랬는지, 당신에게 이 결혼은 무슨 의미였는지…….

 

그러나 오르슈팡의 입에서 나온 건 질문 대신 얼빠진 소리였다.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주인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A가 어딜 갔는지 알아?”

 

“모,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 시간 전에 교대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모습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르슈팡이 눈을 찌푸렸다. 망설임은 짧았고 실행은 거침없었다. 그는 예법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슬그머니 뒷전으로 두고서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잠시 실례, 하고 중얼거리며 손잡이를 비틀어 열었을 때 비로소 응접실 안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등잔불 하나만이 널따란 응접실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침침한 빛에서도 바닥을 뒤덮은 난장판은 또렷하게 잘 보였다. 온갖 상자와 물건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가구란 가구는 전부 벽면에 붙여둔 채였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떼어야 할 벽난로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황량한 풍경에 오르슈팡은 저도 모르게 침묵했다. 뒤에서 기병들이 헛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뿐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오르슈팡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고리를 쥔 손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사실 우리, 엄청 사이가 안 좋았던 건가?”

 

“예?”

 

“나와 A 말이야.”

 

“아, 저, 그게. 영웅님께서는…….”

 

영웅. 오르슈팡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웃지 않기 위해서 그는 입안을 짓씹어야만 했다. 영웅이라니.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몇 가지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영웅이라고 불리는 평민, 유서 깊은 가문의 사생아, 그리고 신분제가 공고한 이슈가르드. 그제야 이해가 갔다. 발끝에서부터 멀미가 치솟는 탓에 오르슈팡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손끝이 아렸고 속이 메스꺼웠지만 정확히 무엇이 원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하면 제 몸속을 헤집는 어지럼증이 전부 쏟아질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그는 자신이 막 맞닥뜨린 진실을 곱씹어보았다. A는 오르슈팡 그레이스톤을 사랑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기야 세상을 구한 영웅의 하나뿐인 반려가 되기에 그는 지나치게 결함이 많았다. 사생아이고, 이렇다고 할 장점은 없고……. 기실 무슨 직위를 따내든 영웅 앞에선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발등 위에 쌓이는 눈을 내려다보면서 오르슈팡은 느리게 곱씹었다. 그러니까, 당연한 거야. 사이가 안 좋아도 이상할 건 없다는 게.

 

이래서 믿기 싫었다. 애당초 믿고 싶지 않았다. 두 손을 질끈 쥔 채로 오르슈팡이 고개를 꺾어 들었다. 흐린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얼굴을 적셨다. 가늘게 뜬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A와 마주쳤던 최초의 순간 자신을 꿰뚫었던 문장을 되풀이했다. 믿지 않아. 정말로 믿지 않아. 당신은.

 

당신 같은 찬란함은. 더는.

 

제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은백색 머리 장식에서 산란한 빛을, 그 아래서 반짝이는 눈동자를 눈에 담았을 때 오르슈팡은 속절없음이란 무엇인지 깨닫고야 말았다. 이러고 싶지 않아. 중얼거리며 오르슈팡이 밭은 숨을 내쉬었다. 차게 식기 시작한 몸 덕분에 입김조차 옅었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가문 소속 기병들 앞이었다.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이 모든 것을 뿌리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오르슈팡 그레이스톤이라는 이름까지 전부 탈피하고 달려 나가고 싶다고. 그럴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화끈거림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다. 제멋대로 기대하고 제멋대로 실망한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그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모습을 감추지 못한 선명한 좌절이었다.

 

“저, 오르슈팡님.”

 

그때 기병이 말을 걸었다. 오르슈팡은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머뭇거리는 듯하던 기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영웅님께서 귀족 작위를 위해 오르슈팡님과 결혼하셨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닌가?”

 

“그, 참, 이게 말입니다.”

 

그제야 오르슈팡은 기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찡그린 얼굴은 뜻밖에도 되레 멋쩍은 듯했다. 오히려 당황하며 오르슈팡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흰말일까? 그도 아니면, 정말로…….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기병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았고 또 떨렸지만 그게 마냥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 그것, 영웅님께는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 절대!”

 

“사람 면전에 대고 말할 생각은 없어.”

 

“그리고, 오르슈팡님, 뭔가 오해를 하신 듯하여 말씀드립니다마는,”

 

기병이 숨을 들이켰다. 오르슈팡은 그 순간까지도 제게 자문하고 있었다. 어째서?

 

“영웅님과 오르슈팡님은 사이가 아주 좋으셨습니다. 성도에서 사이좋기로 소문 난 한 쌍이셨습니다. 정말로요!”

 

어째서 난 또 기대하고 있는 거지?

 

입술에 발린 긴 묵묵함과 의구심이 끈적거렸다. 끈끈한 그것들이 입을 막은 탓에 오르슈팡은 어떠한 말도 쉽사리 꺼낼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기병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오르슈팡은 저들이 자신을 우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후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 포르탕 가에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 자신을 현혹하려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곱씹으면서 들이켰던 숨을 내쉬었다. 딱딱하게 굳었던 들숨이 빠져나간 여백에 비로소 여유가 피었다.

 

오랜 침묵 끝에 오르슈팡이 고개를 들었다.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응접실 문고리를 잡았다. 거침없이 열고 들어섰다. 자신을 뒤따른 기병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힐끔 곁눈질한 오르슈팡은 곧 바닥에 쓰러진 의자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확인해야겠어. 그에게 직접.”

 

아리송한 표정으로 기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슈팡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쌌던 기병들이 방 밖으로 나섰다. 묻지 않아도 알았다. 외간 남자들이 숙녀분의 거처에 함부로 들어서면 안 되지요, 따위의 예법일 것이다. 오르슈팡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건 그가 아마도 A의 반려인 덕일 테고.

 

자리에 앉은 채로 오르슈팡은 기다렸다. 오랫동안. 한순간도 생각을 멈추지 않고서.

 

날이 점차 깊어졌다. 밖에서 들이치는 눈보라에 등잔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을 때 오르슈팡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병들에게 해산을 명령했다. 그들은 거부했지만 오르슈팡은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들은 서로를 힐끔거리다가 찝찝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슈팡은 제자리에 서서 기병들이 숙소를 향해 들어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문이 완전히 닫힌 후에야 그는 걸음을 옮겨 다시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다시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그는 생각했다. A가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두 손과 발이 묶였던 바로 그때, 자신을 구하러 왔던 A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뿌리 깊은 의심은 오르슈팡 본인이 아닌 그의 인생 자체에 박힌 것이라 쉽사리 빼낼 수 없었다. 마른 입술을 머금으며 그는 느리게 곱씹었다. 믿지 않기로 했다. 그는 사생아였다. 특출난 장점도 없었다. 작위를 보고 결혼하기에도 이점이 있지 않았다. 하지만 A는 오르슈팡 그레이스톤을 선택했다고 한다.

 

어린 오르슈팡은 그 결단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A는 영웅이었다. 세상 찬란함을 한데 모아 빚은 사람. 거침없이 쟁취하고 망설임 없이 최초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 세상이 선택한 위대함. 이 모든 것의 집합. 경외시하는 것과 동시에 동경하게 하는 존재……. 그런 빛으로 반짝이면서 기꺼이 발맞추기로 선택한 사람이 오르슈팡이라니. 오르슈팡 그레이스톤이라니.

 

등잔불이 일렁였다.

 

오르슈팡은 몸을 움츠렸다. 손끝에서부터 추위가 엄습했다.

 

떨리는 몸을 기댄 채로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길게 숨을 들이켰고 또 오래 참았다. 날숨이 그의 잇새를 비집고 탈출했을 무렵 오르슈팡은 잠들어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오르슈팡이 퍼뜩 눈을 떴다. 좁은 틈새로 눈사람이 된 것 같은 A가 뛰어 들어왔다. 아우, 지독한 눈보라 같으니라고, 하고 중얼거리던 목소리는 오르슈팡을 발견하는 순간 딱 멎었다. 오르슈팡은 웅크렸던 몸을 천천히 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등잔불은 거의 꺼지기 직전이었고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질끈 깨무는데 A가 성큼 다가왔다. 차가운 두 손이 오르슈팡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왜 여기에 있어? 돌아가지 않고!”

 

“난,”

 

“세상에, 벽난로도 꺼져 있잖아! 자기야, 이러다가 감기라도 들면 어떡하려고 그래?”

 

“나는,”

 

“기다려!”

 

손을 놓은 A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선가 가져온 장작더미를 벽난로에 밀어 넣었고 단숨에 불을 붙였다. 오르슈팡을 끌고 벽난로 앞에 앉히고서 다시 모습을 감춘 A는 한참 후에야 다시 나타났다. 두 손에는 잔을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달콤한 냄새가 곧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자자, 일단 마시면서 하자.”

 

오르슈팡은 얌전히 A가 내민 잔을 받아 들였다. 슬그머니 살핀 내용물은 짙은 갈색이었다. 냄새로 보아 코코아인 듯했다. 애로 보는 건가? 가장 먼저 든 의구심은 그것이었지만 A의 얼굴에는 어떠한 악의도 살필 수 없었다. A는 되레 몸이 차다며 담요까지 둘러주는 배려를 발휘했다. 담요와 코코아로 둘러싸인 채로 오르슈팡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누군가의 세심한 배려를 의심하다니. 이건 부끄러운 짓이다. 속으로 자신을 엄격히 혼낸 오르슈팡은 곧 코코아를 한 입 머금었다. 달콤한 초콜릿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래서?”

 

곁에 털썩 소리를 내며 앉은 A가 물었다. 오르슈팡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웃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건 내게 무언가를 바랐다는 거잖아. 내가 틀려?”

 

“아니…….”

 

“나는 준비됐어. 얼마든지 됐어!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자기야.”

 

장난스러운 주먹이 오르슈팡의 어깨를 툭 쳤다. 오르슈팡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자신을 여기에 남게 했던 최초의 질문을 멍하니 곱씹었다.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어? 우리는? 아니, 애당초에,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보다도 제 진심에 직접 맞닿는 말이 어딘가에 분명 존재할 것 같았지만……. 오르슈팡이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을 때는 영 멋쩍은 목소리가 들렸다.

 

“왜 굳이 여기서 지내지?”

 

“으응?”

 

“당신은 포르탕 저택의 귀빈인 듯한데. 귀빈실은 한두 개가 아니야. 이런……,”

 

오르슈팡은 주위를 힐끔 둘러보았다. 아무렴 레이디에게 창고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성을 따라 오르슈팡은 필사적으로 단어를 골랐다.

 

“……척박한 환경에서, 지내는 것 말고도 선택지가 많을 것 같아서.”

 

“척박한 환경이라.”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할게.”

 

“전혀! 사실인걸. 난 사실 창고라고 할 줄 알았지 뭐야. 아, 그렇다고 응접실이 창고 같다는 얘기는 아니고! 내가 워낙 더럽게 만들어버렸잖아. 오해하지 마?”

 

그러며 A가 키득키득 웃었다. 오르슈팡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하고 말하자 A는 활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거기서 한번 마침표가 찍혔다. 짧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오르슈팡은 기다렸다. 벽난로의 오렌지빛이 A의 옆면을 적시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A가 중얼거렸을 때 오르슈팡은 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건 거의 속삭임과도 같았지만 귀를 기울이는 데에 특별한 힘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째서인지 A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도 손쉬운 일처럼 느꼈다.

 

A의 이야기는 느리고 점진적으로 전개되었다. 오르슈팡은 웃음으로 무마할 수 있게 된, 그러나 결코 유쾌하지 못할 순간들을 하나하나 꼽아내는 A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배신과 슬픔, 고통과 두려움, 공허와 좌절로 얼룩진 모험담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르슈팡은 A에게 사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아픈 과거를 억지로 들쑤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를 내지 않을까?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한 자신을 힐난하는 것은 아니고?

 

머뭇거림이 목구멍을 막았을 때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오르슈팡은 A에게서 눈 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웃고 있었다. A는. 이 모든 이야기를 하면서도.

 

“맞아. 힘들 때였지. 그때 나는 크게 좌절하고 있었어. 이런 식의 배신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라 지나치게 당혹스러웠거든. 좋은 일만 했다고 믿었는데 돌아온 게 이런 좌초라니. 선의라는 게 끔찍한 방식으로 곡해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지.”

 

그러나 A의 눈은 반짝였다. 일렁이는 벽난로의 불빛을 받으면서.

 

“그런데 그때 네가 나타난 거야.”

 

몸을 기울이며 A가 속삭였다. 그리고 오르슈팡은 마침내 궁극적인 의문에 다다랐다. 코코아를 쥔 손이 잘게 떨렸고 그와 함께 숨이 흔들렸다. 입술을 질끈 씹은 채로 오르슈팡은 고개를 숙였다. 정돈하지 못한 머리칼이 시야에 쓰러지며 눈 앞을 가렸다. 오직 A의 무릎께만이 눈에 들어왔다. 솟구치는 충동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물어야 해, 하고 그는 스스로 뇌까렸다. 물어야만 해. 어떤 궁금증은 밖으로 꺼내어 낱낱이 해체해야만 해소된다. 오르슈팡의 목구멍을 막은 질문이 바로 그러했다.

 

자신을 향한 두 눈, 거기서 울렁이는 반짝임, 입가에 트인 미소와 달콤한 코코아 향기를 떠올리며 오르슈팡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

 

“응?”

 

“이해할 수가 없어.”

 

“무엇을?”

 

마땅한 대답을 찾기 위해 오르슈팡이 입을 빠끔거렸다. 눈. 시선. 몸짓. 행동. 말. 어투. 낱말. 단어. 문장. 그 무엇도 명확한 대답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머뭇거림 끝에 느리게 말했다.

 

“전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오르슈팡은 중얼거렸다.

 

“당신이 꼭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

 

“그래. 그래서 모르겠는 거야.”

 

“어째서?”

 

“당신 같은 멋진 사람이 사랑하기에 나는 부족한 사람이니까.”

 

내려다본 코코아의 짙은 수면에 얼굴이 비쳤다. 파문에 따라 일그러지는 낯을 내려다보면서 오르슈팡은 생각했다. 맞아. 그 말이 옳아. 당신 같은 사람이 사랑하기에 난 부족한 사람이야. 결함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쏟아부어봤자 뚫린 구멍으로 줄줄이 샐 뿐이야.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당신은.

 

당신은 지나치게 찬란해…….

 

오르슈팡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고르려고 애썼다. 그러며 기다렸다. A의 얼굴을 올려다볼 배짱 같은 건 없었다. 일 초가 수십 년 같았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부끄러움이 치솟았다. 목이 뜨거워졌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코코아에 제 얼굴을 박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높고 맑은 웃음이 응접실에 울려 퍼진 건.

 

당혹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오르슈팡이 고개를 들었다. A가 웃고 있었다. 배를 잡고. 소리를 내면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훑으며 그가 몸을 웅크렸다. 아, 미안해, 하는 사과가 뒤따랐다. 오르슈팡이 얼결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A가 단숨에 손을 뻗었다. 오르슈팡의 어깨를 붙잡고는 그대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힘주어 그를 끌어안았다.

 

“세상에, 자기야, 이렇게나 생각이 많았다니!”

 

“나, 나는…….”

 

“한 순간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 단 한 순간도. 할로네 신께 맹세해!”

 

맞닿은 품 너머에서 쿵쿵거리는 심박이 들렸다. 오르슈팡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플 정도로 질끈 끌어안았다가 놓은 A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 내 눈을 봐, 거짓 하나 없는 눈이야, 하고 말하며 이마를 맞댔다. 벽난로 열기가 뺨을 적실 때 오르슈팡은 무심코 궁금해졌다. 화끈거리는 낯은 불길 때문일까? 아니면 A 덕분일까?

 

“결함이라니? 부족함이라니? 당신은 내게 한순간도 부족한 사람인 적이 없어. 당신의 그 무엇도 내게는 단점이 되지 못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오히려, 오르슈팡 그레이스톤,”

 

빛을 받은 눈동자가 눈 아프게 산란했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A가 활짝 웃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법을 모르겠어!”

 

눈을 마주하고 있었기에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저건 한 치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오르슈팡이 슬그머니 몸을 뺐다. A는 붙잡지 않았다. 단지 웃었다. 오르슈팡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심 그들이 벽난로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그래야 벌게진 얼굴을 전부 벽난로 탓으로 돌릴 수 있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모르겠다는 것. 그건 대체 얼마만큼의 감정으로 이루어진 걸까? 그걸 망설임 없이, 이토록 단호하게 내뱉는 데에는 또 얼마만큼의 확신이 깃든 것이고?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금슬이 좋다던 기병들의 말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막연히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며 오르슈팡은 담요를 질끈 쥐었다. 이런 사랑을 아낌없이 받고 있을 미래의 오르슈팡 그레이스톤을 생각하며 그는 밭은 숨을 삼켰다. 미래를 기대한다는 감각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마음이 좀 놓여?”

 

A가 키득거리며 물었다. 오르슈팡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아를 한 입 들이켰고, 결심 어린 숨을 내뱉었다. 고개를 들었다. A와 눈을 마주쳤다. 힘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또는 이 마음이나마 그에게 들리기를 바라면서, 오르슈팡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 A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거침없이. 망설임 없이. 확고하게.

 

“당신 같은 멋진 사람이 내 아내라는 건 정말 기쁜 일이야.”

 

그러자 A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