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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4:18

/ Place of Death
 

눈을 떠 보니 오래 사랑해 온 찬란함 속에서 그는 이미 유령이었다. / 해풍 중

 

 

 

빛이 번진다.

 

 

 

*

 

 

 

발을 디딘 대지는 짙푸른 녹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웃자란 풀들과 드높은 하늘,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과 아득히 먼 지평선. 습기 없는 시원한 바람이 조라쟈의 정면으로 맞부딪치고 지나간다. 창공 정중앙에 걸린 태양이 내리쬐는 따스한 볕에 눈이 따끔거렸다. 습하지 않다는 것을 제하면 마치 툴라이욜라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이 세계는. 또한 조라쟈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다.

 

며칠 전 느닷없이 영혼 자원 시스템에 오류가 생겼다. 솔루션 나인 전체가 일시적으로 암전되었다. 큰 사고였다. 스펜이 불안해하는 주민들을 수습하는 동안 조라쟈는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자 했다. 다만 불행은 사고 자체에서 끝나지 않았다. 되돌아온 동력원에는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세계가 기록되었다. 스펜은 이것을 좌시할 수 없는 이변이라 말했고 조라쟈도 부분적으로 동의했다. 그렇게 며칠에 걸친 연구 끝에 우수한 연구원들은 이 낯선 곳, 일명 ‘중첩 세계’로 가는 통로를 여는 데에 성공했다.

 

진입할 인물들을 고르는 데에 있어 조라쟈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가겠노라고 단언했다. 연구원들은 우려 섞인 낯으로 시스템 제어권을 쥔 무왕이 직접 중첩 세계로 진입하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고 설득했으나 조라쟈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협력 관계인 스펜에게 보일 최소한의 성의인 동시에, 잡념으로부터 해방해 줄 유일한 창구와도 같은 존재였다. 며칠 전부터 조라쟈는 수렁 같은 공허에 휘말린 채였다. 탈출할 수 있는 계기를 놓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지금. 그는 알지 못하는 낯선 장소에 홀로 떨어졌다.

 

중첩 세계라고는 하나 그 근원은 창조된 공간이었다. 영원인들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기본적인 뼈대나 동력은 타인의 자원에 의존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허허벌판이었다. 이렇다 할 사람도, 건물도, 하다못해 시답잖은 물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있는 거라곤 웃자란 들풀과 생생한 바람, 뺨을 내리쬐는 볕과 기다랗게 지는 그림자뿐이다.

 

자리에 선 채로 조라쟈는 잠시 기다렸다. 그는 숙련된 전사였으므로 기척을 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짧게 숨을 고르고 감각을 돋친다. 미세한 발돋움 하나까지 잡아챌 만큼 예리하게 날을 세웠다가 곧 꺼트린다. 쯧, 하고 혀를 찬 그가 천천히 구부렸던 몸을 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멀리 늘어진 지평선을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았다.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그가 느끼는 한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를 창조한다는 건 몹시 까다로운 일이었다. 누구도 살지 않는, 이상향 같은 공간을 까닭 없이 만들어냈을 리가 없었다. 시스템이 일으킨 단순한 오류라기엔 이 모든 것은 너무나도 섬세하게 조형되어 있었다. 발목을 간질이는 풀의 감촉부터 바람이 불 때마다 미세하게 시원해지는 온도까지. 구현은 상세했고 세계는 현실적이었으며 그 곳곳에서 창조자의 심도 깊은 관심이 엿보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평화로운 세계를 빚은 창조주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공간이 어째서 탄생했는지조차 미지수다. 조라쟈는 양손에 쥐었던 검을 천천히 검집에 밀어 넣었다. 끄응, 하고 작게 앓는 소리를 내고는 느리게 걸음을 뗐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무언가라도, 사료가 될 법한 것이라도 채취해달라는 연구원이 부탁이 있었다. 세계를 우악스럽게 폐쇄하는 일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누군가가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너무 무뢰배 같잖습니까, 하는 말에 어떻게 반응했더라. 비웃었던가. 그도 아니면 무시했던가. 속으로는 그의 아량이 우습다고 생각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기실 조라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연구원이 사용한 어휘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누군가가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조라쟈는 연구원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들판을 가로질렀다. 누군가가.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연구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치를 보듯이 웃었다. 머쓱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토록 생생한 세계에서 지내는 인물이라면, 촘촘하게 설계된 세상에 떨어진 존재라면 그 생기는 인공적인 자연이 주는 압도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뿐이다. 연구원은 가상의 주민을 일컬어 살아간다고 말했다. 마치 그들이 실존한다는 것처럼. 조형된 중첩 세계 바깥에서도 생존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처럼.

 

이왕의 영향일까. 아니면 도시 자체를 뒤덮은 죽음을 향한 모독의 영향일까. 조라쟈는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는 솔루션 나인의 무왕인 동시에 장막 너머에서 온 이방인이니까. 그들 삶의 태도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완전히 동화될 수는 없다.

 

게다가 이왕 스펜이 일궈낸 죽음에의 초월은 반쪽짜리지 않은가.

 

조라쟈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저변으로 미뤄두었던 잡념이 불쑥 벽을 찢고 튀어나왔다. 머릿속을 뛰어다니는 것처럼 요란하게 굴더니 곧 침울하게 가라앉는다. 정수리에서부터 심장을 지나 발끝까지. 잡념이 주는 무게에 손끝이 저릿하다. 질끈 주먹을 쥐었다가 편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 하고 중얼거렸다. 이내 메마른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던 순간이었다.

 

발소리를 들었다.

 

풀의 허리가 꺾이는 소리였다. 가볍고 빨랐다. 집어넣었던 검을 번개처럼 뽑아 돌면서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걸음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듯한 익숙한 박자감과 보폭으로, 당장이라도 자신을 향해 뛰어들 것처럼 달려오는…….

 

“조라쟈님!”

 

목소리가 세상을 울린다.

 

눈을 지릅뜬 채 조라쟈가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서 구름이 휘날렸다. 상대는 거기서부터 갈라져 나왔다. 뭉게구름을 등지고서, 그와 꼭 닮은 흰 원피스를 휘날리면서, 뛰어오고 있었다. 맨발, 맨손, 맨얼굴이었다. 하지만 손발은 깨끗하다. 흙바닥을 밟는데도 그렇다. 긴 머리칼이 마치 범람처럼 넘실거리며 다가오는데 조라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조라쟈는 저 여자를 알았다. 자신을 향해 있는 힘껏 뛰어오는 저 자를. 모를 수가 없었다.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산 같은 구름의 그림자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듯이 제게 가까워지는 상대를 본다. 검을 쥔 주먹이 뜻 모를 감정으로 바르르 떨렸다. 분노도 그리움도 슬픔도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뒤엉킨 탓에 정확히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그저 덩어리였다.

 

조라쟈가 한 걸음 물러났다.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여린 몸에서 본 적 없는 활력을 띠며 달려왔다. 거침없이 거리를 좁혔다. 훅훅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제 위를 뒤덮었던 회색 그림자에서 구슬처럼 튀어나와 또렷한 색채를 품는 순간. 조라쟈가 입술을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오지 마라!”

 

그제서야 상대는 멈췄다. 조라쟈와 정확히 검 하나만큼의 거리를 두고서.

 

감청색 머리칼이 바람에 마구 흩날린다. 직전의 질주 탓에 가쁘게 차오른 숨을 여자가 연거푸 들이마셨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서 놀라우리만치 확실한 생기가 돌았다. 거친 숨소리에 입을 가리고서, 그러나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가슴께에 주먹을 지그시 쥔 여자가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뗐다. 날카롭게 벼린 검 끝이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겨눴다.

 

“조라쟈님?”

 

대답할 수 없었다. 저건 A였다.

 

그럴 리가 없어, 하고 조라쟈가 고개를 저었다. 손이 떨리자 자연히 검도 흔들렸다. 혹여나 A에게 스칠까 그는 한 걸음 물러났다. A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조라쟈님, 하고 그가 다시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몇 번이고 속으로 되풀이했던 호칭이었다. 이제는 듣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울림이었다.

 

“넌 누구지?”

 

조라쟈가 상대를 노려보며 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A의 눈망울이 곧 울렁였다. 아,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그가 두어 걸음 물러났다. 조라쟈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가슴 위에 두 손을 포개어 쥔 채로, 시선은 떨구고 어깨는 가엾으리만치 떨리는, 하지만 단단한 뼈대가 느껴지는 말투로, 그는 말했다.

 

“A예요.”

 

“그럴 리가 없어.”

 

“저, A예요. 정말이에요.”

 

“그럴 리가 없다!”

 

매서운 고함에 A가 흠칫 몸을 떨었다. 조라쟈가 이를 악물었다. 고개를 내저었다. 발치에 A의, A라고 주장하는 무언가의 그림자가 닿았다. 불에 데기라도 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발을 뺐다. 아니었다. A의 얼굴이, 그가 기억하는 존재 그대로의 낯이 일그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조라쟈가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왜냐하면, A는 죽었으니까.

 

그가 사랑했던 여자, 그를 이해해주었던 유일한 존재는 죽었다. 고작 열흘 전에. 자신을 잊어달라는 유언을 한 문장 남기고서. 조라쟈의 품에서 그렇게, 썩어갈 뿐일 미래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지금도 그는 누워 있을 것이다. 침대 위에 가만히. 두 눈을 감고서 미동 없이. 가슴 위에 손을 겹쳐 올린 채로, 생기 없는 창백한 뺨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그렇게 녹슬어 가고 있을 것이다.

 

안다. 제가 두 눈으로 보고 왔으니까. 일어나라고 어깨를 흔들 수조차 없는 숭고한 낯으로 수렁 같은 죽음에 빠진 A를 제 두 망막에 새겨 넣었으니까.

 

사실을 되짚는 동시에, 조라쟈는 상대를 본다. 자신을 A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본다. 생기 있는 뺨과 핏기 있는 입술, 볕을 받아 반짝이는 눈동자와 윤기 있는 머리칼. 산 자의 전유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모조리 가진 A가 제 앞에 서 있다. 저토록 생생한 A는 오랜만이다. A의 죽음은 길고 지난하게 이루어졌다. 몸을 갉아 먹는 지병에 그는 차츰차츰 모서리부터 마모했다. 마침내 심장까지 문드러졌을 때야 비로소 눈 감을 수 있었다.

 

빛없던 A의 눈을 기억한다. 자신을 올려다보던 마지막 응시, 그 떨림 없는 눈동자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더욱이 용납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조라쟈님, A가 설명할 수 있어요. 정말, 정말이에요.”

 

멀지 않은 곳에서 A가 주먹을 꾹 쥔다. 애처로운 낯으로 자신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다시 다가오는 한 걸음. 머뭇거리는 듯 입을 달싹이던 A가 곧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러며 말한다. 조라쟈님의 품에서 눈 감았던 순간을 기억해요, 라고.

 

“저어, 어찌 된 영문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

 

“빛이 보였어요. 어느 순간엔가 그랬어요.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어요. 정신을 차렸을 때는 조라쟈님이 보였어요. 그래서, 그래서…….”

 

시선이 울렁인다. 조라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러난다. 두어 걸음. 풀잎을 밟고 멀어진다. 천천히 검을 거둔다. 그들 사이를 막는 건 아무것도 없음에도 A는 다가오지 않는다.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조라쟈를 바라본다. 여전히 주먹을 질끈 쥔 채로. 걱정과 우려 섞인 낯을 하고서.

 

“A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조라쟈가 짓씹듯 중얼거렸다.

 

“A는 죽었다.”

 

나를 두고서. 나를 본래 세계에 홀로 두고서.

 

A의 얼굴로부터 고개를 돌린 조라쟈는 그대로 중첩 세계를 빠져나왔다. 통로를 타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A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단순한 환청 같기도 하다.

 

눈을 떴을 땐 다시 동력실이었다. 차가운 한기가 엄습했다. 청보랏빛 조명등이 빛살처럼 그들 위로 쏟아졌다. 조라쟈는 곧바로 움직이는 대신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흉곽이 부풀고 꺼지는 생생한 움직임에 집중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얼핏 커다란 상황실처럼 보였다. 사람이라곤 막 세계에 발을 디딘 조라쟈와 스펜, 그리고 연구원 몇뿐이었다. 무왕의 의지를 반영하여 자동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기에 조라쟈가 살아 있는 한 별도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손을 거치는 동안 일어날 오류를 우려하여 조라쟈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했다. 중첩 세계라는 이변이 일어나고 나서야 사람이 들락거리기 시작한 탓에 동력실 밑바닥에선 아직도 냉랭한 스산함이 감돌았다.

 

의자 하나 없는 회의실 같은 공간 너머 자리한 커다란 벽에 걸린 동력원만이 윙윙거리는 기계음을 내며 열심히 돌아간다. 청보랏빛 조명은 거기서 나왔다. 커다란 원형의 구조물이 여러 겹 덧씌워져 돌출된 형태, 그 앞에 선 조라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왕이 무사히 복귀한 것을 확인한 연구원이 단숨에 달려왔다. 오셨습니까, 하는 물음이 울렸으나 조라쟈는 대답하지 않았다.

 

“들어가 계시는 동안 새로운 걸 발견했습니다.”

 

조라쟈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서 연구원이 빠르게 보고를 시작했다. 묘하게 심각해진 낯이었다. 진지한 얼굴로 홀로그램 창을 끌어온 그가 그래프의 한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혼 자원의 사용량입니다. 중첩 세계가 처음 감지된 날부터 평균 사용량이 미세하지만 증가했습니다. 아마도 다른 세계와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영혼 자원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듯합니다.”

 

“맙소사…….”

 

스펜이 자그마하게 중얼거렸다. 조라쟈는 힐끔 그래프를 곁눈질했다. 온갖 숫자가 적힌 반투명한 그래프가 오른쪽 위로 치솟은 채였다. 평소와 큰 격차가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맨눈으로 확인할 만큼 확실하기는 하다.

 

“게다가, 무왕께서 진입하신 이후 내부에서 물체 반응이 잡혔습니다. 이전까지는 없었습니다마는…… 혹시 안에서 누군가를 만나지는 않으셨습니까?”

 

스펜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또한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조라쟈는 무심코 떠올렸다. 짙푸른 창공과 커다란 뭉게구름. 늘어진 그림자와 웃자란 녹음 사이에 우두커니 선 A를. 자신을 향해 가쁘게 뛰어오던, 이전에 없던 생기로 가득 차 반짝이던 그 눈을.

 

“……만났다.”

 

“아, 역시 그러셨군요.”

 

연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홀로그램을 조작하고는 그렇군, 하고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처럼 자판을 두드린 연구원은 곧 또 다른 창을 띄우며 말했다.

 

“아마 그 사람이 중첩 세계의 유일한 일원일 듯합니다. 중첩 세계의 질량은 그다지 크지 않거든요. 말하자면 아주 얇게 편 크레이프 같은 겁니다. 구성 요소를 최대한 제외하고서 넓게 펼친 것인데, 그렇게 되면 실상 담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요.”

 

“동력이 부족해서 그럴까?”

 

“아무래도요. 이게, 수치상으로는 차이가 있다고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기껏해야 사람 한둘 분일 거라서요.”

 

잠시 뜸을 들인 연구원은 곧 높낮이 없는 어투로 말을 맺었다.

 

“어쩌면 그 세계, 조라쟈님께서 만나신 주민분을 위해서 구성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질문한 건 스펜이었다. 조라쟈는 침묵했다. 눈을 깜빡인 연구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글쎄요, 라고 대답하는 것을 그는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무왕의 심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연구원이 눈치를 살피듯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갈 무렵에서야 조라쟈는 움직였다. 고개를 돌려 중첩 세계로 향하는 통로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그에게 물은 것이다.

 

“창조자를 아나?”

 

“아직입니다. 누군가가 시스템에 개입한 흔적이 남지 않았습니다. 외부 요인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자니 내부 오류라고 보기도 힘듭니다. 기록으로는 전부 무왕께서 지시한 내용을 이행했다고만 적혀 있어서요.”

 

조라쟈를 곁눈질한 연구원이 빠르게 덧붙였다.

 

“최대한 빠르게 알아보겠습니다.”

 

조라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말없이 걸음을 뗐다.

 

A를 위한 세계. 얇게 편 크레이프 같은 세상. 크기에 비해 질량이 크지 않아, 고작 A 하나만을 간신히 떠안고 있으리라는 그 장소. 그러나 A는, 적어도 자신을 A라고 주장하는 여자는 그곳에서 생생했다. 살아 있는 것처럼, 정말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기가 넘쳤다. 이곳의 A, 본래 세계의 A는 딱딱하고 차갑게 굳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동력실 문을 틀어쥐며 조라쟈는 문득 자문했다. 어느 쪽이 진짜지. 거짓 세계에서 살아 있는 A와 현실 세계에서 죽어 있는 A. 어느 쪽을 진짜라고 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중첩 세계 속의 A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론은 더더욱 미궁 속으로 향한다. 어째서 A는 다시 깨어난 걸까. 그가 보았다던 빛의 정체는 무엇인가. 애당초 A를 구성하는 영혼은 누구의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조라쟈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을 깨달았다.

 

 

 

사방이 침침했다. 하다못해 촛불 하나 켜지 않은 방에 문까지 닫아두자 빛이라고는 그의 머리에 매달린 레귤레이터가 내뿜는 희미한 광채뿐이었다. 침대와 그 주위를 장식한 물건들엔 먼지 하나 없었고, 그것은 이 장소가 주의 깊은 관심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일종의 증명처럼 작용했다. 시들지 않은 생화, 푸릇푸릇한 이파리, 흠집 한번 나지 않은 깨끗한 가구들.

 

사이에서 그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종점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눈을 감은 채로, 영영 뜨지 않으리라고 결심한 사람처럼, 그러나 다소곳한 형태로 A는 누워 있었다. 온기 없이 창백한 뺨과 코와 입술의 굴곡 곳곳에는 차마 지워지지 않는 어두운 죽음이 서려 있다. 만지지 않아도, 눌러보지 않아도 A가 딱딱하게 굳어 있으리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징했고 그것이, 그 사실이 목구멍에서 자란 찔레처럼 조라쟈의 날숨과 들숨을 긁어내렸다.

 

A는 변하지 않았다. 당연한 사실을 느리게 곱씹으며 조라쟈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변했을 리가 없다. 변화란 산 자의 몫이다. 전유물이다. 죽은 자는 변치 않는다. 죽은 자에게 용납된 변화란 서서히 썩어가는 일뿐이다. A에게 허락된 변화 또한 마찬가지다. 눈을 감은 채로, 두 손을 가슴 위에 겹친 채로, 창백하게 굳어 있다. 머리에 꽂힌 레귤레이터에서마저 어떠한 빛이 보이지 않았다.

 

조라쟈의 목적은 바로 그 레귤레이터였다. 중첩 세계 속에서 만난 A와 연구원의 말을 더해 내린 결론이었다. A가 죽은 그날부터 레귤레이터는 단 한 순간도 A의 머리에서 떨어진 적 없었다. 영혼은 회수하여 세탁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레귤레이터 안에 존재해야 했다. 조라쟈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잠든 것만 같은 A를 내려다보며 조라쟈는 생각했다. 마냥 잠든 것 같군. 죽은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변함이 없다.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변화의 자유를 거부한다. 그 까닭을 알고 있다. A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조라쟈는 그가 썩지 않도록 조처했다. 더는 썩지 않고, 더는 변화하지 않고, 더는 눈을 뜨지도, 웃지도 않도록 A를 눈감은 시점에 못 박았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가만히 내버려두었더라면 A는 언젠가 한 줌 흙이 되었을 것이다. 기억은 너무나도 빠르게 빛바래고 변화하고 곡해된다. 조라쟈가 살아 있기에 그렇다. 변모하는 기억은 너무나도 얄팍하여 A가 주었던 위로나 온기의 일부조차 건네지 못한다. 가슴에 뚫린 구멍을 메꾸는 데에 필요한 건 가짜가 아니다. 그렇기에 조라쟈는 선택했다. 썩지 않도록. 산 사람처럼 보이도록. 그렇게 떠나지 못하도록.

 

분명히 그랬는데.

 

이윽고 조라쟈는 질문한다. 그렇다면 느껴지는 이 공허는 무엇이지. 부패하지 않는 것으로 생명을 흉내 낸 것으로는 부족했나. 이마저도 가짜인 탓인가. 하지만 A가, 제가 사랑했던 작은 새가 자신의 허무를 두고 볼 리가 없는데. 가만히 놔둘 리가 없는데. 죽었을 뿐이지 그는 산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잠든 것과 진배없다. 산 자처럼 썩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니 분명. 분명히. 무슨 일이라도…….

 

자각도 없이 손을 내뻗는다. A의 레귤레이터를 떼어낸다. 탈착을 감지한 레귤레이터에서 미약한 붉은빛이 점멸한다. 그것을 내려다본다. 짙은 조명이 서리는 낯 위로 드리운 그림자에 표정을 숨기고서 레귤레이터와 A를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설명하기 힘들다. 직감하고, 또 느낀다. 잠시 입을 달싹이던 그가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하게 정의하기 힘든 눅진한 피로 같은 것이 눈꺼풀 뒤에서 눈알을 찌르는 것만 같다. 묘한 저림이 손끝에서 팔뚝을 지나 어깨로 서서히 퍼진다. 빈손이 A에게 향한다. 핏기 없는 입술, 밀랍 인형같이 굳은 뺨, 감긴 눈을 지나 천천히 이마에 흩어진 머리칼을 정리한다. 향유를 바르고 손질에 힘썼던, 이제는 푸석해진 머리칼이 손가락에 감겨드는 순간 조라쟈는 중얼거렸다.

 

“A.”

 

부르셨어요, 하는 대답이 돌아오는 것만 같다. 입술이 벌어진다. 시선이 흔들린다. 잠긴 목소리가 다시금 A를 불렀다.

 

“A.”

 

네에, 조라쟈님, 하고 대답했다. 제가 부를 때마다. 눈이 마주치면 후후, 하는 특유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쩐 일이냐는 물음 또는 수고하셨다는 인사가 뒤따른 적이 많았다. 하지만 어떠한 말을 하든 간에 A는 조라쟈에게 다가왔다. 손을 뻗어 조라쟈의 것을 잡고 그곳에 조심히 뺨을 묻었다.

 

“너는 정말로…….”

 

썩지 않는 A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라쟈는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문을 닫고 걷기 시작했다. 돌아보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가 벌어졌을 때 고개를 치켜들었다.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그리고 연구원을 호출했다.

 

레귤레이터의 영혼을 감식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그는 설명했다. 사실 모든 레귤레이터가 최소 한 번씩은 거치는 과정이라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 존재와 새로 태어나는 존재의 수가 얼핏 비등하기에 새로운 레귤레이터를 생산할 필요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있는 레귤레이터에 축적된 데이터를 완전히 삭제하는 과정에서 잔여물이 남지 않는지 검사하는 과정은 필수로 들어갔다.

 

“딱 한 번 오류가 나서 과정이 생략된 적 있었습니다. 그때 영 난리가 났었지요. 그때부터는, 같은 절차를 거쳤더라도 마지막 테스트에서 통과하지 못한 레귤레이터는 일절 폐기하거나 포맷 과정을 다시 거칩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쉽게 말해서 정보가 뒤섞인 겁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를 자신의 할머니라고 오인한 주민이 아이를 납치한 일이 벌어졌죠.”

 

연구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 눈을 굴린 그는 곧 짐짓 태연한 어투로 덧붙였다.

 

“단순히 레귤레이터만의 문제라고 보기에는 조금 어렵습니다. 이런 건 일종의 연쇄 작용을 불러일으킵니다. 제대로 포맷하지 않은 레귤레이터가 타인의 기억에 간섭할 때, 시스템은 사용자를 어느 존재로 정의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합니다. 하지만 레귤레이터는 한 사람당 하나가 주어지기에 반드시 존재를 확립해야 하죠. 이 모순점을 타파하려는 과정에서 시스템에도 과부하가 가는 겁니다.”

 

“과부하라.”

 

“비슷한 사례로는 하늘 위로 올라간 주민의 레귤레이터를 오랫동안 포맷하지 않았을 때 벌어졌던 일시 오류 사태가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야기가 조금 딴 길로 샜습니다만……. 그러니 레귤레이터 내부에 존재하는 정보와 영혼을 감식하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런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동안 총력을 기울여 왔으니까요.”

 

자판을 두드리며 연구원이 설명했다. 레귤레이터와 기기를 연결한 연구원이 그것들을 조작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조라쟈는 가만히 생각했다. 하늘 위로 올라간 주민의 레귤레이터. 오랫동안 포맷하지 않았을 때 벌어진, 일시 오류 사태. 그리고 A. 이제는 썩지 않는 몸이 된, 하지만 살아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A와 그의 레귤레이터.

 

“어.”

 

연구원이 당혹스러운 소리를 낸 건 그때였다. 팔짱을 꼈던 조라쟈의 손이 움찔거렸다. 굽혔던 허리를 펴며 연구원이 힐끔 눈치를 봤다. 시선이 미약하게 흔들린다. 조라쟈는 제 목구멍 속에서 울렁이는 불온한 감각을 되새김질하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리고 연구원의 화면 바로 곁에 선 채로 지그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발견하셨습니까? 이것.”

 

연구원이 물었다. 조라쟈는 침묵했다. 무왕이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연구원이 난감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작게 혀를 찬 그가 중얼거렸다.

 

“이것 참.”

 

얼굴을 한번 찌푸린 연구원이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조라쟈의 안색을 살피듯 힐끔 얼굴을 곁눈질하고는 곧 입을 연다. 머뭇거린 사람치고는 제법 거침없는 이야기가 쏟아져나왔다.

 

“소유자 데이터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늘로 올라간 주민의 레귤레이터가 포맷되지 않은 상황이나 엇비슷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영혼의 경로가…….”

 

“문제라도 있나?”

 

“여기 보시면,”

 

연구원이 몸을 살짝 비켜섰다. 조라쟈는 눈동자만 굴려 화면을 바라보았다. 소유자의 생명 반응 정지, 라는 문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레귤레이터가 기록한 A의 기록이다. 세 낱말로 이루어진 문장을 조라쟈는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고작 저런 하잘것없는 단어로 정의할 죽음이 아니었는데. 조라쟈가 기억하는 죽음은 저만큼 건조하지 않았거늘.

 

잠시 뜸을 들인 연구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열흘 전에 소유자의 생명 반응이 정지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겁니다. 하지만 혼은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세탁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 않고요. 그렇다는 건 즉 레귤레이터가 영혼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구원이 화면을 조금 올렸다. 그곳에 찍힌 날짜를 보는 순간 조라쟈가 주먹을 질끈 쥐었다.

 

“사흘 전입니다. 요구 때문에 영혼 자원을 동력원으로 이양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동력원의 기록과 비교했을 때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만…… 오히려 그렇기에 신경이 쓰입니다.”

 

“…….”

 

“사흘 전입니다, 조라쟈님. 중첩 세계가 나타난 때와 일치합니다.”

 

연구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다. 일견 두려워하는 것처럼 떨리는 눈을 하고서 그가 말했다.

 

“어쩌면 중첩 세계의 유일한 주민이, 이 레귤레이터의 생전 소유자일지도 모릅니다.”

 

조라쟈는 놀라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놀랐다면 어땠을까 고민했다.

 

그는 A를 떠올렸다. 깊이 잠들어 깨지 않는, 혹자는 죽었다고 말하는, 고작 열흘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와 손을 맞잡고 솔루션 나인 곳곳을 거닐었던 그를 회상했다. 썩지 않는 몸을 가지고 살아 있던 여자는 썩지 않는 몸을 가진 죽은 자가 되었다. 죽었다는 점만 명명백백한 점만 제한다면 산 자와 다를 바 없는 그의 몸, 부패하지 않는 육체를 반추한다.

 

그러나 썩지 않은 영혼은 다른 곳에 존재한다. 중첩 세계라는 얇게 편 크레이프 안에. 작은 질량을 넓게 퍼뜨린 그 세상 안에, 혼자서. 그러나 자유롭고 생생한 모습으로.

 

썩지 않을 몸과 썩지 않는 영혼, 그 둘 중 어느 쪽이 진짜지?

 

어느 쪽의 A가 살아 있는 A란 말인가.

 

애당초 사람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 육체와 혼을 결합하여 탄생했을 뿐인 게 인간인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기계병으로 몸을 마련하고 표백한 혼을 집어넣으면 그것은 A인가. 겉을 너와 닮은 감청 머리칼, 감청 눈, 앞으로 튀어나온 뿔과 비늘로 장식하면 그것은 A가 되나. 그것은 오히려 모독이지 않은가. 너의 외관, 너의 육체, 너의 혼이 너를 정의하지 않는다면. 내 안에서 너는 대체 무슨 존재란 말이야.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정답이 미지한 물음이다. 손아귀를 파고든 손톱이 얕은 상처를 낸다. 따끔거리는 상처가 손바닥에서부터 몸 전체로 퍼지는 것만 같다. 조라쟈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연구원에게 말했다.

 

“준비해라.”

 

“예?”

 

“중첩 세계에 진입한다.”

 

연구원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는 여전히 평온했다. 채도 높은 세상이었다, 이곳은. 화질이 높은 카메라로 섬세하게 촬영한 것처럼 시야가 또렷했고 거칠 것이 없었다. 조라쟈가 중첩 세계에 발을 디뎠을 때 A는 풀숲 사이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로. 감청색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는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제법 오랫동안. 또 어쩌면 단 몇 초간.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