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을 맨 모험가는 설원에 홀로 서 있다. 소탕은 끝났다. 부대는 제각기 복귀했다. 모험가에게는 마지막 임무가 남았다. 마지막으로 이 주위를 느슨하게 둘러보며 남은 흔적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
막 제국군과의 전투를 끝낸 참이다. 갈레말 제국 수도에서 내전이 일어난 이후로 국가 간의 전쟁은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돌아갈 곳 없거나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잔당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모험가에게도 난동을 부리는 제국의 패잔병들 토벌 의뢰가 여러 건 들어왔다. 개중 하나에서 급한 전보가 있었다. 정확히 몇분대인지 알 수는 없지만 주위 마을을 약탈하며 다니던 제국군 잔당들이 산적 무리를 흡수하여 기하급수적으로 몸집을 불리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모험가는 토벌 의뢰를 승낙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다.
눈으로 뒤덮인 평야는 드넓고 공허하다. 벌어진 입에서 희끄무레한 입김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대검을 등에 짊어지고서 모험가는 걷기 시작한다. 지금 그는 산의 중턱에 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수색할 것이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마침내 돌아갈 수 있다.
등산하는 과정에서 모험가는 산짐승 몇을 만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누군가 혹은 무언가와 맞닥뜨리는 빈도는 급격히 줄어든다. 그렇게 다다른 봉우리는 공기가 희박하다. 고지 아래로 광활하게 펼쳐진 숲, 까마득히 먼 곳에 점처럼 찍힌 마을이 보인다. 코와 입에서 뭉친 눈 같은 숨이 핀다. 모험가는 일몰이 끝날 때까지 산봉우리에 머문다. 검붉게 물드는 지평선과 같은 빛으로 눈 덮인 산맥이 반짝인다. 등에 매단 대검이 무겁다.
이곳에서 그는 오롯이 혼자다. 침묵은 과거를 들추고 외면한 비밀을 간질인다. 속절없이 모험가는 태초의 질문을 떠올린다. 무슨 생각을 하며 싸우고……. 당신의 생각엔 여전히 변함이 없냐던…….
붉은 태양이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모험가는 산 정상에서 머문다. 거칠게 뛰는 심장과 흉곽에서 일어나는 통증이 그에게 하산을 강요한다. 모험가는 잠시 뻗대어본다. 어둑한 밤하늘과 널따란 지평선, 둘을 박음질하듯 잇는 산맥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어둠에 물든 지상은 물체를 명확하게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깜깜해진다. 근본적인 고독이 영혼을 울린 건 그때다. 충동적으로 모험가는 대검을 향해 손을 뻗는다. 손잡이를 붙잡고 천천히 빼낸다. 그러나 반쯤 꺼냈을 때 링크셸이 울린다. 모험가는 손잡이에서 손을 놓는다. 연락을 받는다. 타타루다. 준비가 되었다고 새벽의 금고지기는 말한다.
돌아가야 한다.
가는 길에 수리공에게도 들러야겠다고 모험가는 생각한다.
산맥을 반쯤 내려왔을 때 그는 발소리를 듣는다. 어림잡아 열댓은 넘는다. 이 야밤에 열이 넘는 등산객이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을 리는 없다는 사실을 모험가는 안다. 밤중의 산은 위험하다. 의지 없는 악의와 진배없다. 그러므로, 하고 모험가는 멈춰 선다. 손을 뻗어 대검 손잡이를 잡는다. 그러므로 이곳에 있는 건 죽음을 불사한 이들뿐이다.
누군가 제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엔 별다른 유감을 느끼지 못하며, 모험가는 땅을 박찬다.
첫 공격은 수월하게 막아낸다. 심장을 노리는 세검이 대검의 넓은 면에 내리꽂히며 드높고 매서운 소리를 낸다. 물러서지 않도록 모험가는 발을 단단히 땅에 박아 넣는다. 등 뒤에서 단검이 쇄도한다. 힘을 주었던 근육을 순간적으로 이완한다. 가뿐히 몸을 숙여 피한다. 목숨을 빼앗지 못한 공격은 곧 빈틈이 된다. 모험가는 놓치지 않는다. 두 손으로 대검을 잡고 그대로 가로를 길게 벤다. 적들의 검과 모험가의 대검이 충돌한다. 빛이 튄다. 까랑까랑한 소리가 울린다. 맞잡은 손 너머에서 대검이 진동한다. 적은 두 눈을 홉뜬다. 거기에 두려움이 깃든다.
그는 생각한다. 나의 검이 사랑이라면.
뒤이어 누군가 달려든다. 한 손 검이 모험가의 옆구리를 노린다. 춤을 추듯 가벼운 걸음으로 몸을 뒤튼다. 한 바퀴 빙그르르 돈다. 대검을 높이 든다. 적을 노린다. 적의 방패 위로 모험가가 대검을 거칠게 내리친다. 육중한 파동이 퍼진다.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난다. 대검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굴하지 않는다. 힘 싸움에서 물러서지도 않는다. 온몸에 폭발하듯 힘을 주어 상대를 압도한다. 상대가 신음한다. 겁먹은 목소리다. 죽음이 코앞에 있음을 아는 자의 숨이다. 개의치 않는다. 정강이를 걷어차 그를 쓰러트린다.
또한 나와 당신들이 죽음을 불사했다면.
멀리서 총포를 쏘아대던 기공사를 향해 뛰어든다. 내리치고, 올려 긋고, 다시 벤다. 단말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모험가는 춤을 추고 대검은 균열을 노래한다. 채 식지 않은 생명이 얼어붙은 눈을 녹이고 모험가의 뺨에 튄다. 체중을 실어 내려치고, 찌르고, 내던진다. 적이 주춤 물러난다. 살려, 하고 그가 중얼거린다. 그러나 말은 끝맺어지지 못한다. 목을 정확히 꿰뚫는다. 내질렀던 대검은 그 육중함과 어울리지 않는 잽싼 속도로 모험가의 곁에 돌아온다.
뺨을 타고 뜨거운 액체가 흐른다. 붉지 않은 피를 흘리며 그는 잠시 거친 숨을 몰아쉰다. 심장이 마구 뛴다. 아직은 고도가 높다. 머리가 어지럽다. 산소가 넉넉지 않은 곳에서 벌인 맹렬한 전투는 그의 육체를 고통스럽게 한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속삭이는 듯한 한계에 실소가 난다. 땀에 젖은 이마를 닦을 때 그는 불현듯 본다. 희끄무레한 달빛과 암순응을 마친 눈만으로도 그는 손쉽게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물건을 알아차린다.
검이다.
적의 검이다. 손잡이에 제국의 인장이 새겨진 검이다. 눈에 파묻힌 날이 어슴푸레한 빛을 산란한다.
알 수 있다. 말끔하게 손질되었다. 오랫동안 공을 들인 태가 난다. 모험가는 불현듯 숨을 참는다. 깨달음은 천천히 온다. 지나치게 느려서 그는 순간적으로 그것에서 시선을 돌린다. 고개를 꺾어 든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말간 달빛이 바람에 흔들리는 장막처럼 얇게 나부낀다. 숨이 떨린다. 몸이 떨린다. 아니, 대검이 떨린다.
다음 순간 모험가는 순간적으로 몸을 뒤튼다. 대검의 넓은 면으로 가슴을 가리며 단단히 땅에 발을 박아 넣는다. 거의 동시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 쇄도한다. 비명 같은 기합과 함께다. 매서운 기세다. 날카롭게 날이 선 양손 검이 정확히 그의 왼쪽 가슴을 노린다. 그것을 가로막은 대검이 몸을 떤다. 모험가가 삼킨 신음을 내뱉듯 대검이 괴로운 소음을 낸다. 그때 모험가는 직감한다.
이건 못 버텨.
금속은 청명한 소리를 내며 깨진다. 예리하게 연마한 검이 모험가의 심장을 찌를 때 그는 부서져 떨어지는 대검 파편을 본다. 균열을 타고 깨지는 조각들과 함께 세상이 기운다. 추락하는 모험가에겐 보인다. 모험가를 찌르는 데에 성공한 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순간적인 희열일까? 사람을 죽였다는 데에서 기인한 공포일까? 혹은 저들에게 가해질 보복을 향한 두려움? 알 수 없다. 관심도 없다. 단지 춥다. 그렇게 쓰러진다.
희끄무레한 의식 속에서 그는 낯선 목소리를 듣는다.
“흑와단 돌격부대 대대장 아게트라입니다. 영웅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험가가 고개를 든다. 풍경은 순식간에 펼쳐진다. 바삐 갈 길을 오가던 주위 사람들이 일순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본다. 끝없이 늘어선 천막과 듬성듬성 피운 모닥불, 그 앞에 쪼그려 앉은 병사들을 등지고서 한 남자가 그의 앞에 서 있다. 모험가는 잠시 상대를 살핀다. 붉고 검은 군장과 계급을 드러내는 표식. 흑와단의 대대장이다.
대대장이 격식 있게 경례하는 것과 동시에 주위를 지나가던 흑와단의 병사 몇몇이 키득거린다. 모험가는 그들의 숙덕거림을 듣는다. 아게트라가 마침내 영웅님께 말을 걸었어, 말을 헛디디지 않았으니 이 내기는 내가 이길 걸로 하세, 저 벌게진 얼굴을 봐, 쑥스러워하는 태가 여기까지 나는걸……. 그는 이다음 이어질 말을 알고 있다.
“직전 전투에서 저는 영웅님의 활약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아마 영웅님께서는 저를 못 보셨겠지만, 음, 영웅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도 정말 열심히 싸웠거든요, 그래서 감사 인사라도 한번 드리고 싶어서.”
생각에 잠긴 모험가를 대대장의 상기된 목소리가 깨운다. 대대장은 횡설수설한다. 붉어진 뺨을 바라보던 모험가는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기억을 더듬으면 어쩐지 얼굴이 익숙해 보이는 것도 같다. 기억나, 하고 말하자 대대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검붉게 물든다. 고생했다는 말까지 덧붙이자 그는 몸을 배배 꼬더니 곧 눈치를 보며 곁자리를 차지한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았기에 그들은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를 사이에 둔다. 모험가는 구태여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그것을 일종의 허락처럼 받아들였는지 대대장은 재빠르게 말을 잇기 시작한다. 그의 입에서는 영웅을 칭송하는 거창한 축사와 동경 어린 묘사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물자를 옮기거나 모닥불을 오가던 병사들은 대대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겁도 없이 떠들고 웃는다. 대대장은 그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놀리지 말라며 투덜거리지만 그것이 진심 어린 분노가 아니라는 사실은 모험가에게도 전해진다.
“……아무튼! 너무 신기했습니다. 저는 대검이 아니라 장검을 사용하거든요. 대검은 휘두르려고 노력해 봤는데, 맥도 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지 뭡니까?”
빙그레 웃어주자 대대장은 어깨를 수줍게 뒤틀더니 곧 슬금슬금 다가온다.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다. 그는 모험가의 품에 기대어 선 무기를 조심스럽게 가리키더니 묻는다.
“그것, 영웅님의 대검이 맞지요?”
대대장을 속일 필요는 없으므로 모험가는 곧이곧대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대대장의 눈에 단숨에 빛이 번쩍인다. 고개를 냉큼 들이민 그는 곧 떨리는 숨을 삼킨다.
“호, 혹시, 조금만 봐도…….”
모험가는 흔쾌히 허락한다. 대검은 직전 치열한 전투로 인해 날이 조금 나갔다. 간단한 수리와 연마를 위해 꺼내둔 참이다. 대대장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대검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혼잣말처럼 말한다.
“대검과 영웅님은 마치 한 몸 같았습니다. 대검을 부딪치고 휘두르실 때마다 얼마나 육중한 소리가 나던지, 꼭 천지가 울리는 것 같았지 뭡니까!”
모험가는 그냥 웃는다. 이런 식의 찬사는 익숙하다. 칭송하는 그들은 모를 것이다. 에오르제아의 영웅, 해방자, 온갖 화려한 칭호를 수식하는 존재의 속내 같은 건. 대검에 얼굴이 비친다. 눈이 조금 어두워진다. 사실 죽고 싶다는 얘기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원념은 다시 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대대장이 대검을 도로 건넨다. 모험가는 그것을 받아 든다. 품에서 손질용 천과 기름을 꺼낸다. 몸에 기대어둔 대검을 천으로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하자 대대장은 다시 말한다.
“정성스레 손질한 무기에는 때때로 신묘한 힘이 깃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건 마치 예리하게 연마한 사람의 마음과도 같은 힘을 지녔다고 합니다.”
대검을 문지르던 모험가가 잠시 멈춘다. 커다란 검날의 중간께에서 모험가의 손은 오랫동안 머문다. 헤진 천과 그 아래서 느껴지는 차가운 검날을 동시에 문지른다. 대대장은 여전히 떠든다.
“그러니까, 검은 때때로 사람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웅님의 대검은 참 훌륭합니다! 보는 저에게도 사랑과 관심이 듬뿍 느껴집니다. 대검 자체가 마치 영웅님의 사랑 같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
“동시에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영웅님은 무슨 마음으로 이 무거운 검을 휘두르실까, 하고요……. 전위에서 대검과 하나가 된 것처럼 싸우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엄청난 결의가 느껴져서 전율하고야 맙니다, 저는.”
손끝에서 약간의 굴곡이 걸린다. 결함이라기엔 사소하지만 균열이라고 부르기에 아깝지 않은 깊이다.
“역시 동료분들을 위해 싸우시는 거겠지요?”
어깨를 으쓱인다. 대대장은 쉴 새 없이 떠든다.
“제 중대에서도 영웅님이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녀석들이 정말 많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앞을 가로막던 대검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르겠다고 떠들어대더군요. 그 점도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었고요…….”
한 부분에서 오랫동안 헤매던 모험가의 손은 곧 떨어진다. 천을 갈무리하자 대대장이 묻는다.
“수리공을 불러드릴까요?”
모험가는 거절한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하자 대대장은 고개를 끄덕인다. 대검을 등에 지고 모험가가 일어선다. 가볍게 손을 내젓고서 그는 웃는다. 새벽의 혈맹과 연락을 주고받을 시간이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자 대대장은 다시 한번 눈을 번쩍인다.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싶어 하는 눈치다. 하지만 모험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곧 시무룩한 얼굴이 된다.
먼저 갈게, 하고 모험가는 말한다. 대대장은 격식 있게 경례한다. 주위에 앉아 있던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모험가는 걸음을 뗀다. 그가 배정받은 막사는 멀지 않다. 사위가 흔들리고, 이내 공간이 바뀐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모험가는 막사 문이 바람에라도 젖혀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한다. 등에 짊어졌던 대검을 뽑는다. 손잡이가 위를 향하도록 땅에 힘주어 내리꽂는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가 난다. 검의 기둥이 잠시 흔들린다. 모험가는 오랫동안 손을 떼지 않는다. 몸체의 중간, 손질하다 말았던 바로 그 부분, 깨진 장식 사이로 미약한 빛살이 떨어지는 접합부를 길게 바라본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린다. 외면하듯이.
막사는 조촐하다. 그는 가장 큰 막사를 혼자서 쓴다. 전장에서 영웅이 지니는 특혜란 그런 것이다. 속도가 생명인 참호에서 그 이상의 사치는 불필요하다. 그에게 허락된 좁은 공간에는 작은 나무 탁자와 의자 하나, 그리고 접이식 침대가 전부다. 침대를 덮은, 거칠고 더러운 모포 위로 몸을 날린다. 영웅에게만 특별히 허락된 매트리스는 지나치게 딱딱하다. 수월한 수납을 위해 접이식으로 만들어지며 생겨난 연결부가 허리께에 위치하는 바람에 그는 침대에서 자주 뒤척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모험가는 높지 않은 천막을 올려다본다. 대대장의 말이 귓바퀴를 타고 울린다. 정성스레 손질한 무기는 때로 사람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대검 자체가, 영웅의 사랑.
“우습지도 않지.”
불청객은 늘 그렇듯 기척 없이 온다. 터지려는 한숨을 참고서 모험가는 눈을 감는다. 몸은 이미 피로하다. 얇아진 신경 줄을 야금야금 갉아 먹는 존재와는 단절이 상책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불청객은 제 할 말을 늘어놓는다. 그는 어딘가 화가 난 것 같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그것과 닮았다.
“영웅, 영웅, 영웅. 어지간히 당신을 귀찮게 하는군요.”
“…….”
“애당초 이런 의뢰는 거절하는 게 낫습니다. 새벽의 혈맹에서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다음 소식이 있을 때까지 당분간 휴식을 취하라고.”
모험가는 대답하지 않는다. 입을 열어봐야 신경질적인 대꾸가 나갈 것을 안다. 침묵으로써 대응하자 불청객은 한숨을 쉰다. 그것은 제 반응을 유도하는 데에 실패한 사람 특유의 비열함이나 노골적인 안타까움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차라리 피로한 사람의 숨과 닮았다.
“하지만 궁금하긴 하군요.”
“…….”
“아직도 죽고 싶습니까?”
절그럭, 하고 철갑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모험가는 저도 모르게 떠올린다. 갑주와 대검이 맞부딪혔던 때가 있었다. 그날 모험가는 철로 이루어진 갑주를 꿰뚫고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때의 대검은 여전히 애용한다. 항상 그가 등 뒤에 매고 다니는 무기가 바로 그것이다. 모험가가 땅에 꽂았던. 그가 여태껏 손질해 왔던. 땅에 내리꽂는 순간 여상과는 다른 진동으로 자신의 이질감을 알리던.
“이 침묵을 대답으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이어 불청객은 중얼거린다. 하기야, 당신은 항상 이런 태도였지. 하다못해 신경질이라도 내지 않으니 다행인가. 그것은 자조적인 어투지만 모험가는 어째서인지 그가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고 느낀다. 울컥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투구로 가린 얼굴이지만 분명히 시선은 맞았다고 그는 확신한다.
“지금 하십시오.”
“뭘?”
“손질. 미리 하지 않으면 후회합니다.”
그러며 그는 대검을 가리킨다. 모험가는 저도 모르게 대검을 바라본다. 그는 입을 잠깐 열었다가 닫는다. 약간의 뜸을 들이고서 불청객은 무어라 말한다.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뭐라고 했더라, 하는 생각에 잠기기를 잠시. 그날의 온도나 조도, 습도 따위를 더듬던 모험가는 불현듯 깨닫는다. 이것은 주마등이다. 생사의 절벽 끄트머리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로 보는 희극이다.
그리고, 맞아.
“이제 슬슬 일어나세요.”
너는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 A은 깨어난다. 그는 설원 위에 가로누워 있다.
“깨어났군요.”
A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눈에 젖은 머리칼이 후드득 떨어진다. 반사적으로 그는 몸을 더듬는다. 적의 검은 분명히 A의 대검을 깨트리고 그의 심장을 찔렀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멀쩡하다. 상처 하나 없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본다. 여전히 밤이다.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깊어진 것도 같다. A는 다시 주위를 살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늑대 한 무리가 몸에 땅을 낮추고 그를 노려보고 있다. 쓰러진 시체를 노리는 듯하다. 주위에 살아 있는 건 그들 무리와 A뿐인 것 같다.
제 심장을 찔렀던 검을 꼬나쥐고서 적은 고꾸라져 죽어 있다. 그의 가슴에는 깊은 자상이 났다. A는 안다. 저것은 대검에서 비롯된 상처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A는 불청객에게 묻는다.
“네가 날 살렸어?”
불청객은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다.
“알고 있었잖습니까. 당신은.”
A는 고개를 내젓는다. 입술을 질끈 깨무는데 불청객, 그림자, 프레이는 말한다.
“이틀 전 싸움에서 당신의 검에 금이 갔습니다.”
“몰랐어.”
“아니, 알고 있었어. 당신은 알고도 방치했지.”
“…….”
“그러고도 내게 경위를 묻는 행위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A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자 프레이는 질문을 바꾼다.
“다르게 묻지요.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헛소리.”
“이걸 봐.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겁내는지조차 모르고 있어.”
A는 마침내 눈을 부릅뜬다. 거기가 인내심의 한계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깨진 대검 조각을 지르밟으며 그는 외친다.
“아무것도!”
“…….”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됐어?”
애당초 그런 건 내게 허락되지 않았어.
A는 이를 악문다. 가라앉았던 갈망이 슬금슬금 고개를 든다. 타는 듯한 갈증이 일어 그는 가슴께를 부여잡는다. 그를 내려다보는 프레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직도 죽고 싶습니까?”
잉걸불처럼 흔들리는 눈이다. A는 대답한다.
“삶은 나의 것이 아니야. 나는 그걸 인정하지 않았어.”
그러자 프레이는 묻는다.
“그렇다면 왜 나를 불렀습니까?”
황량한 바람이 분다. 차갑게 식은 마음으로 A는 전제를 거부한다. 그는 프레이를 부르지 않았다. 심장을 찔려 의식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땐 프레이가 있었다. 여기에는 A의 어떠한 자의도 개입하지 않았다. 목구멍에 고인 말을 삼킨다. 침묵을 지키던 프레이가 A를 향해 말한다.
“당신은 분명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났고. 송장과도 같은 상태로 적을 쓰러트렸죠.”
“그건,”
“맞아. 그건 나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의식 저편에 잠들어 있던 나를 끌어올린 건 당신입니다.”
엄중한 목소리로 프레이는 말한다. 그의 두꺼운 갑주는 바람이 나부낄 때마다 깨어진 대검과 닮은 빛을 반사한다.
“대검이 깨지며 심장이 찔리는 순간, 당신은 나를 불렀어.”
“…….”
“죽고 싶다고 당신은 끊임없이 뇌까렸지. 그러면서도 산 송장이 되어가며 부득불 살아남았어. 이건 모순이야.”
타오르는 시선이 말한다. 그러니 다시 한번 묻겠어.
“정말로, 아직도, 죽고 싶습니까?”
뜨거운 알맹이가 명치에서부터 치솟는다. A는 입술을 깨문다. 고개를 떨구자 그는 본다. 여기 두 개의 검이 있다. 산산이 조각난 그의 대검. 멀지 않은 곳에 버려진 적의 양손 검. 타인의 검은 꼭 알지 못하는 마음, 제어할 수 없는 존재의 초상만 같다. 반대로 말하자면, 반발 없이 제 의도에 순응하는 것은 그의 대검. 나의 대검. 불현듯 A는 대대장의 말을 떠올린다. 검은 때때로 사람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것.
적의 가슴팍을 길게 벨 때 A는 생각했다. 나의 검이 사랑이라면 저들의 검은 무엇인지. 거침없이 심장을 찌르며 또한 궁금해했다. 죽음을 불사한 나와 저들이 최후의 순간 몸을 떠는 까닭은 무엇인지.
그의 대검은 영웅의 사랑이라고 누군가는 말했고.
타인의 검 또한 나의 것과 다를 바 없으니.
그 순간 A는 속절없이 궁금해졌다. 통제 불가능한 사랑과 생존 욕구는 어떻게 다르지. 거기서 발아한 미련은 삶을 향한 필연적인 애착과 무엇이 다르냔 말이야.
단단하게 연마한 마음을 깨부수며 제어불능의 사랑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상처를 넘고 들이닥친 애환은 그를 살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A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가 뜻한 바도 아니다. 그는 어떠한 마음도 가지지 않고서 대검을 휘두른다. 사람들이 세계를 구할 영웅을 기대하기에 구하며 그것만이 모험가의 존재 이유다. 그 외의 것은 전부 번뇌에 불과한 것이다.
모험가는 숨을 들이켠다. 주먹을 틀어쥔다. 손을 뻗는다. 산산이 부서진 대검 조각들을 그러모은다. 비틀비틀 일어나는 모험가를 그림자는 바라본다. 모험가는 불청객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걷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림자는 말한다.
“그게 당신의 뜻이라면.”
모험가는 돌아보지 않는다. 비탈진 길을 따라 하산한다. 한참 후 바람이 그를 스치고 지나간다. 언뜻 누군가가 말을 건 것도 같다.
“대검 손질. 게을리하지 맙시다.”
“…….”
“이런 일을 두 번이나 겪는 건 나도 사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