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5천 자, 실제 작업물, HL, FF14 기반 드림
1
lemb 2026.06.04.  14:13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단단히 지탱하고, 온 팔을 써서, 찌른다. 파트너의 심장은 예상보다 무르다. 관통당한 육체가 흐느적거리지만 에스티니앙은 경계를 놓지 않는다. 꼬나쥔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바닥을 딛고, 조금 더 앞으로, 앞으로, 전진한다. 점점 깊이 파고들자 창을 쥔 손까지 피가 흐른다.


이제 끝이다,


그가 입을 빠끔거리고,


이윽고 시야가 암전한다.


*


눈을 떴을 때 에스티니앙은 누워 있었다. 그걸 어떻게 한눈에 알았냐고 묻는다면 역시 대답은 하나였다. 지평선이 세로로 서 있었으니까. 웃자란 풀들이 시야를 반쯤 덮고 눈을 찌를 듯 나부끼는 탓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의미 없이, 혹은 의미를 찾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빡인 그는 한숨과 함께 도로 몸에서 힘을 뺐다. 완전히 지쳤다. 길고 지난한 고민에 어울려줄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 푸른 용기사인 그가, 전장에서 몇 시간이고 나뒹구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그가, 고작 삼십 분 만에 깔끔하게 탈진해 버린 것이다.


이런 종류의 피로는 비단 체력 문제가 아니기는 했다. 그는 발등을 덮는 비탄과 뒤통수를 노리는 절망이 어떻게 사람을 마모시키는지 잘 알았다. 눈을 감은 채로 그는 손을 뻗어 주위를 더듬었다. 그리고 제 창이 머리맡 근처 땅에 꽂혀 있다는 것까지 확인한 후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날숨은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서리가 낀 들풀들이 일제히 몸을 떨며 부산스러운 소리를 냈다. 하늘은 보이지 않았고 사방이 짙게 물 먹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동그란 돔 같은 결계는 지나치게 거대해서 자칫 이곳이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천연의 자연인 것처럼 보였다. 에스티니앙은 괜히 굴러다니던 돌멩이를 집어 결계를 향해 던졌다. 돌은 보이지 않는 벽에 맞은 것처럼 튕겨 나왔고, 에스티니앙은 눈을 감았다.


그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 어쩌다 사방이 닫힌 결계에 갇히게 되었느냐, 그 앞선 이야기는 길고 지난하고 또 복잡했다. 되도록 이야기를 축약하는 것을 선호하는 에스티니앙식으로 설명하자면 대체로 세 단계였다.


“일어나.”


눈을 감은 채로 에스티니앙 발리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첫째. 파트너는 죽었다.


“자지 않는 것 알아.”


문장에 약간의 변주를 해보았다. 둘째. 파트너를 죽였다.


“탓하지 않을 테니까. 어서.”


진실에 가깝도록 정형했다. 그러자 변화라고 말하기 우스울 정도만 바뀐 문장이 되었다. 셋째, 파트너가 죽었다.


그리고 에스티니앙은 눈을 떴다. 코앞에 A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는 잠시간 이것이 어떤 종류의 농간인지, 신이라면 그 입에 피에 젖은 창을 박아 넣고 운명이라면 그 수레의 살을 두 동강 내버려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마음을 다잡는 일이라고도 표현할 테지만 남자의 생각은 거기까지 가닿지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삼켰던 숨을 그제야 내쉬며 훌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A를 향해 앉았다. 눈높이는 당연하게도 맞지 않았지만 오늘따라 그것이 희한하게 느껴졌다.


“일어났네.”


“부른 사람이 할 소리냐.”


“모르는 척할 줄 알았어.”


A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갑작스럽게 흉곽을 덮는 답답함에 에스티니앙이 가슴께를 문지르며 물었다.


“왜?”


“그야 너는,”


거기서 한번 쉬고서,


“유령을 안 믿잖아.”


끝맺는 문장. 여백은 지나치게 짧고 순간적이어서 에스티니앙은 하마터면 그 짧은 틈새를 놓칠 뻔했다. 빈 공간을 포착하고 창을 찔러넣는 것이 그의 특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니야?”


이제는 확답까지 들으려 작정한 A를 바라보며 에스티니앙은 두 손 두 발을 다 든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완전히, 탈력한 상태에서 몇 번이나 이 단어를 쓰는지 모를 지경이지만 이외에 표현할 단어가 마땅치 않았으므로, 그는 다시 한번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A가 옳았다. 에스티니앙 발리노는 직관적인 사람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먹을 수 있는 것을 맛보았다. 누릴 수 있다면 누렸고 보내야 한다면 보내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A의 말은 옳은 동시에 틀렸다. 에스티니앙은 여태껏 유령을 보지 못했으므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그 명제를 조금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야 보았으니까. 유령을. 그것도 파트너의.


피로감에 눌린 낯을 한번 쓸어내리고서, 그는 A를 보았다. 두 번 죽고 한번 되살아난 존재였다. 이로써 두 번 죽고 두 번 되살아난 사람이 되었으나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낯은 태평했다. 에스티니앙은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이고선 턱을 괬다. A는 말이 없었고 에스티니앙은 먼저 입을 열 기분이 아니었다. 그들은 말없이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았다. 침묵은 지지부진했고 에스티니앙이 이 적막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왜지?”


그래서 에스티니앙은 먼저 물었다. 앞뒤를 전부 잘라먹은 불친절한 질문이었지만 A는 개의치 않았다. 유령이 뭐가, 하고 되물었다. 징그럽게도 닮았군. 정말로 당사자 같아. 에스티니앙은 눈을 한번 찌푸렸다. 턱을 괴던 손을 풀고서 A를 똑바로 가리키자, 그는 에스티니앙을 따라 하듯 자기 자신을 손으로 가리켰다.


“너.”


“응.”


“너는 죽었어. 네 삶은 끝났단 말이다. 나는 네 장례식에도 참여했고, 죽은 네 얼굴도 보았고, 하다못해 네가 육 플름 아래 묻히는 꼴까지 전부 봤다. 이 두 눈으로.”


엄밀히 따지자면 삿대질인데도 A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에스티니앙이 손을 거두었다. A를, 혹은 A를 모방했을 무언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할 말은? 그렇게 묻자 생뚱맞은 대답이 나왔다.


“묻었구나.”


“…….”


“잘했어.”


그게 이 모든 사태의 대답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속절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이 여자는 정말로 A였다. 그러자 자연스레 시선이 돌아갔다. 그가 쓰러져 잠들었던, 혹은 기절했던 장소. 서리가 낀 들풀이 뒤덮은 커다란 공터. 바로 거기서 창으로 심장을 찔렸던 A.


진심으로 맞붙은 영웅은 두렵고 버거운 존재였다. 푸른 용기사였던 에스티니앙에게도.


죽지 않았던 걸까. 되돌려 생각해 보면 숨통이 끊기는 것까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건 숫제 자멸이나 다름없는 싸움이었으므로. 전투는 짧았지만 그 찰나를 채운 밀도 있는 치열함은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종류였다. 에스티니앙이 굳은살이 박인 손을 천천히 쥐었다가 폈다. 여전히 손끝이 떨렸다. 살해를 마친 직후의 인간이 얼마나 흐트러진 마음으로 호흡하는지 겪어본 적 없는 자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하물며 창에 묻은 피조차 닦지 못했다.


그가 찌른 A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웅의 야만신이었다. 영웅의 죽음에 슬퍼한 존재들이 의도치 않게 불러낸 사념, 찌꺼기, 혹은 그와 엇비슷한 무언가였다. 새벽의 혈맹이 보증했고 에스티니앙 자신이 확신했다. 복잡하고 어지럽게 얽힌 어른의 사정을 지나 그것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에스티니앙 앞에 영웅 살해라는 죄를 지을 권리가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망설임 없이 찔렀다.


“파편이야.”


에스티니앙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A가 말했다. 그는 서리가 핀 들풀을 손끝으로 건드리고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손가락이 들풀을 관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기야 유령이니까 어쩔 수가 없는 걸까, 하고 에스티니앙은 무심코 생각했다.


“네 창이 야만신을 찌르며 에테르가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을 거야. 본래라면 그대로 소멸해야 했겠지만……, 글쎄. 원념이 지나치게 강했나.”


“강의 시간인 줄은 몰랐는데.”


“그러는 너야말로. 나를 정말 A라고 믿을 줄은 몰랐는데.”


농담과 비아냥 사이에 걸친 말 한마디를 던졌다고 이런 식으로 공격해 올 줄이야. 에스티니앙은 입을 딱 다물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영웅, 푸른 머리칼이 흘러내리며 짙은 그늘이 진. 유령한테 그늘이 질 수도 있는 건가? 느닷없는 궁금증이 이는 까닭은 어쩌면 이 상황 자체의 피로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뇌까리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서리를 간지럽히듯 하던 A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에스티니앙을 비껴가더니 공터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 걸 알면서도 에스티니앙은 그의 시선을 좇았다. 그건 무슨 의미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에 발린 침묵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과 희미한 빛이 투과하는 두 눈, 창백한 피부와 굳게 닫힌 입술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새삼스럽게 장례식을 떠올렸다. 알리제와 그라하는 울다가 실려 나갔다. 말하지는 않았으나 다들 내심 터질 듯한 둑을 손가락 하나로 간신히 막고 있는 것이 에스티니앙에겐 보였다. 국지적인 침통함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사람 하나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비탄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그럴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에스티니앙은 그날, 관에 못질하고서 깊이 판 구덩이 속에 내려놓은 날, 이제는 보이지 않는 얼굴을 더듬다가 관을 때리는 흙덩이에 상상을 방해받았던 그날, 되레 질문하고 있었다. 이게 끝인가. 이제 끝인가. 쿵, 흙이 관을 때릴 때마다 그는 파트너가 남긴 것을 셈했다. 지나치게 적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믿기지 않았다. 미뤄두었던 의문은 야만신의 심장을 찌르는 그 순간 낫지 않는 불치병처럼 재발했다.


이제 끝인가.


“끝이야.”


그리고 그 순간 에스티니앙은 그만 웃고 말았다. 어리석게도 간과하고 있었다. 제 눈앞에 있는 영웅이 약점을 파고들어 무자비하게 내리찍는 사냥, 그 가혹한 행위의 정점에 섰던 존재였다는 사실을.


“나는 죽었어.”


“그래. 넌 죽었지.”


“나도 사라질 거야. 오래 지나지 않아서.”


“안다. 내가 찔렀으니까. 살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언제나 알아.”


“그렇다면 너는 모르겠네.”


그 말이 우스운 농담인 양 느껴지지만 웃음은 나지 않았다. 되레 한숨이 치솟는 탓에 그는 잠시 입술을 길게 물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런 걸 말하는 거야. 말이 지나치게 신랄하다는 게.


유령과 용기사는 말 없이 침묵했다. 짙게 낀 서리 안개가 울렁이는 공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뚫어지라 바라보면 무언가 바뀔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풍경을 바라보며 에스티니앙은 오랫동안 곱씹어보았다. 끝이다. 이걸로 끝이다. 정말로 끝이다. A는 죽었고 망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살아 돌아온 A의 야만신을 손수 찔렀으므로 어찌 본다면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통렬히 체감한 사람이다.


끝이다.


이제야 끝이다.


“나는 죽었지만,”


한참 후에 A가 말했다.


“너는 살았고.”


불어온 바람에도 그의 머리카락은 들썩이지 않았다. 졸음이 몰려온 건 그때였다. 누군가 마법이라도 건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모험 중 수면 향을 뿌리는 꽃을 잘못 건드렸을 때의 우악스러운 피로와 닮았다. 에스티니앙은 눈을 찌푸렸다. 가늘게 뜬 눈으로 A를 보았다. 어느샌가 걸어가고 있었다.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어떤 삶이라도 그건 너의 것.”


아득히 먼데도 목소리는 잘 들렸다. 희한한 일이었다. 이제 A는 안개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찡그린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에스티니앙의 몸도, 정신력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성마르긴 해도 지친 몸은 그 졸음마저 달게 받아들였다. 에스티니앙은 숨을 들이켰고, 필사적으로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도망치지 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스티니앙은 저항을 멈췄다. 그럴 리 없음에도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리는 것만 같았다. 잠들기 직전 그는 혼곤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드디어 끝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침내 그는 그들의 불멸을 믿었다*.


* 원양으로부터 V 중 ‘마침내 나는 우리의 불멸을 믿는다’ 발췌, 윤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