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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천 자, 실제 작업물, HL, FF14 기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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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7.13.  15:46

/ Drowning Figures

 

 

 

그는 잠겨 있었다.

수면 아래, 대지 아래, 진흙 아래, 냇물 아래, 지층 아래……. 그것을 무어라고 말하든 결국 빛이 들지 않는 장소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그는 필요를 상실하여 버려진 도구처럼 처박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슬프지 않았다. 버려졌다는 사실에 분노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단지 두 눈을 형형히 뜬 채 분노했다. 제게 흘러 들어오는 내밀하고도 연약한 속살을 필사적으로 그러모으면서. 그를 그곳에 처박아둔 존재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으므로.

그러다가 빛이 번졌다.

‘프레이’는 눈을 떴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산이었다. 길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육중한 갑주로 무장한 몸이 휘청일 정도로 폭풍이 셌다. 잠시간 그는 혼란스러워졌다. 어째서 자신이 느닷없이 이런 고도에서 눈을 뜨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발등을 뒤덮은 눈 덕분에 이곳이 원래 길이었는지 아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강풍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발에 힘을 주고 그는 자신이 이런 곳에 나타날 만한 연유를 하나씩 꼽아보기 시작했다. 결론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나왔다. 그의 주인이 여기에 존재했기에 그가 나타났다. 주인이 이곳에서 자신을 불렀기에 자신이 수면 위로 기어 올라왔다.

“어이가 없군.”

이를 데 없는 분노와 약간의 황당함을 담아 프레이가 중얼거렸다.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이들은 이제 사람을 이런 광폭한 눈보라가 치는 설산에 홀로 밀어 넣는단 말인가? 그들의 추악함에는 도무지 놀라지 않는 법을 모르겠다고 그는 속으로 뇌까렸다. 애당초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얼 할 수 있다고 그의 주인은 묵묵히 산을 오른 걸까. 짐작기야 어렵지 않았다. 바보 같은 여자는 도저히 부탁을 거절하는 법을 모르니까.

프레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웅을 찾아 붙잡을 요량이었다. 그가 거절한다면 억지로라도 끌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당신은 우주 끝까지 다녀온, 누군가가 흔하게 그리고 가볍게 부르는 영웅이라지만, 광막한 자연 앞에선 당신이나 길거리 나앉은 비렁뱅이나 다를 것 없이 미력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려주면서.

프레이는 기다렸다. 자신을 부른 여자가 눈보라 어디선가 나타나기를.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그 특유의 낯을 찌푸리면서 왜 온 거야, 하고 중얼거리기를. 스스로의 욕망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껄끄러운 면면을 오늘도 어김없이 마주치기를.

프레이는 기다렸다.

영웅은 오지 않았다.

눈보라가 한층 사나워졌다. 프레이는 이제 자신의 투구와 갑주를 꿰뚫을 듯이 몰아닥치는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두커니 선 채로 맞바람을 마주했다. 어느샌가 종아리까지 쌓인 눈이 그를 미약하게나마 붙들어주었다. 프레이는 기다렸다. 이 눈보라 속에서 자신을 불러낸 이유가 그를 향한 살해 시도인지를 어림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윽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다. 프레이는 허리까지 차오른 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느샌가 눈보라가 잦아들었다. 먹구름이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눈이 사방을 집어삼킨 덕분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이 지난한 침묵 속에서 프레이는 영웅이 자신에게 보내던 암묵적인 종용을 느꼈다. 아주 약간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그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질끈 주먹을 쥔 채였다. 갑주로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손바닥에 피를 보았을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았다.

“이봐요! 이봐!”

먼 곳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우두커니 서 있던 프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며 역광의 그림자에서 천천히 분리되고 있었다. 윤곽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프레이는 그가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방한복을 두껍게 껴입은 그들이 우글거리며 다가왔다. 프레이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멈춰 서더니 그를 관찰하는 듯했다. 그들 사이에서 이는 희미한 대화는 지척에 깔린 눈이 소리를 먹어 들리지 않았다. 그 점이 조금은 아쉬웠다.

“당신, 괜찮소? 이런 고도에서 웬 갑주야? 죽고 싶어 환장했소?”

프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몰려온 사람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들이 무엇을 얼마나 알지 가늠하는 건 까다로운 일이었다.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영웅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유기 혹은 배척은 두 번째였다. 성도에서, 오지 않는 영웅을 다리 옆에서 한참이고 기다릴 때 느꼈던 모멸감보다도 강한 감정이 그의 배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건너편에서 연신 외쳐대는 이들을 향해 프레이가 성큼 발을 내디뎠다. 허리께까지 차오른 눈 덕분에 거동이 불편했지만 그런 것쯤이야 망설일 요인이 되지 못했다.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가자 그제야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갑주를 입은 사람이 갑자기 접근한 탓인지 낯에 경계가 서려 있었다. 프레이는 그 알량한 생존 욕구에 코웃음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으로 팔짱을 꼈다.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들의 방한복 안쪽에 얇은 사슬갑옷이 덧대어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산지기인가?”

“뭐 일단은 그렇소만……. 당신은 누구요?”

“여긴 어디지? 아니, 그보다는.”

그를 설명하기 위해 입을 뗐을 때 프레이는 순간적인 분노에 사로잡혔다가 풀려났다. 혀끝에 맴도는 불길 같은 고민 탓에 그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맞닥뜨린 난제는 까다로웠으나 그보다는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더욱 모멸스러웠다.

프레이는 저들에게 영웅이란 단어 없이 영웅을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동시에 알고 있었다. 그런 식의 평범한 설명으로는 저들에게서 쓸 만한 정보를 얻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이들은 영웅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재에겐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프레이는 갈등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A를 영웅이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한참의 고민 후 프레이는 천천히 산지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리게 말했다.


“옅은 밀발의 여자를 본 적 있나? 미코테족인데.”

“최근에? 적어도 최근 사흘 간은 이 근방에 지지 않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에 이 산에 출입 자체가 금지되었다오. 지금 여기에 있는 당신이 이상한 거요.”

“하지만 밀발 미코테족이라고 하니…… 영웅님이 생각나는구먼.”

산지기의 등 뒤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신열처럼 몸을 달구는 분노에 잠시간 치를 떠느라 프레이는 일행 사이에 도는 기묘한 분위기를 한발 늦게 알아차렸다. 급작스러운 불온함과 함께 프레이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게 말이야, 영웅님은 지금쯤 무얼 하고 계실까,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들은 전부 한참 낮았고 약간은 우울했다. 프레이는 이 목소리를 알았다. 저들의 낯도, 그것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일컬어 무어라 하는지도 알았다. 침통함이었고 슬픔이었다.

하지만 왜?

“영웅님이 돌아가신 지도 벌써 삼 년이군.”

일행 중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프레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영웅이 죽었다. 삼 년 전에.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장례는 새벽의 혈맹이 도맡았다. 에오르제아 연맹을 비롯한, 영웅의 손길이 닿았던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추모자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 인파가 지나치게 몰리는 바람에 사흘을 예상했던 장례식이 일주일로 길어졌다고. 영웅의 시신은 혈맹 측에서 책임지고 안치했으며 위치는 공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프레이는 분노했다. 당신은 죽은 뒤에까지 일주일씩이나 사람들의 시선에 난도질당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망자에게 응당 주어져야 한다는 고요와 평온을 그들은 일주일이나 빼앗았다.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작금의 프레이가 맞닥뜨린 사태 앞에서는 타오르는 분노도 쉽사리 꺼졌다. 이슈가르드의 주점 구석에 그림자처럼 앉은 채로 프레이는 자신이 어째서 아직도 존재하는지에 관해 고민해야만 했다. 의의라기보다는 더 궁극적이고 핵심적인, 존재와 형체에 관해서.

영웅이 죽었다. 그런데 프레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프레이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영웅의 그림자였다. 비록 최초의 순간에는 그러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가 자신을 정의하기로는 그러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영웅이 자신을 불러내고 죽었다는 가설 또한 아귀가 맞지 않았다. 영웅 사후 삼 년이었다. 삼 년 동안 가라앉아 있었던 프레이가 돌연 깨어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림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여인숙을 겸하는 주점 내부였다. 한때 영웅은 이곳에 몸을 의탁했다. 생전 영웅이 이룬 업적을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남루하여 폐허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그래도 이곳에는 영웅의 발자취가 남아 있었다. 감성적인 흐름에 빠지는 대신 프레이는 말없이 주점 메뉴판을 응시했다. 맨 아래에 허겁지겁 추가한 듯한 손 글씨를 손으로 한참 더듬었다. ‘영웅 추모잔. 수익은 전액 새벽의 혈맹에 기부합니다.’ 웃음이 나왔다. 이따위 종잇장처럼 얄팍한 추모가 존재해도 된단 말인가?

무엇보다 프레이가 용서할 수 없는 건, 영웅의 죽음 이후에도 이들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설산에서 이곳 주점까지, 떠돌면서 프레이는 영웅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의 절망과 비탄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 삶을 구한 존재의 가장 궁극적이고 치명적인 몰락에 허덕이면서도 자신들의 일상을 꾸렸다. 그건 대체 어떤 종류의 기망이고 업신여김인지 프레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일정한 박자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갑주와 이가 나간 나무가 부딪히며 내는 딱딱거림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서, 그는 속으로 분노를 삼켰다.

걸레짝이 된 헌신이 발에 치이는 것 같다.

역시 이들에게 당신은…….

“합석해도 되나?”

프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후드로 얼굴을 깊이 가린 사람이었다. 목소리를 듣자 하니 성인 남자였다. 일행을 뒤에 둔 채로 프레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프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빈자리가 널렸다는 거짓말로 구태여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주점은 사람으로 들쑤셨고 프레이는 지나치게 피로했다. 남자가 일행과 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프레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떠날 요량이었다.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발이 가는 대로 걷을 생각이었다. 어떤 식으로 세상이 당신을 추모하고 기만하는지 두 눈에 똑똑히 담기 위해서.

“거참. 앉자마자 떠나면 이쪽이 미안해지잖아.”

그러나 무거운 걸음은 곧 멈췄다. 말을 건 남자가 후드를 벗으며 얼굴이 드러났다. 프레이는 단숨에 대검을 뽑지 않기 위해 두 손을 질끈 주먹 쥐었다.

산크레드 워터스와 위리앙제 오귀레였다. 한때 영웅의 동료였던. 그리고 새벽의 혈맹 일원인.

“눈보라가 몰아치니 조금 더 있다 가지 그래. 말은 걸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산크레드가 묵묵히 말했고 프레이는 어쩌면 이 합석이 의도된 것이 아닐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는 천천히 주점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사람이 득시글거렸다. 앉을 자리는커녕 설 자리, 발 디딜 틈도 애매모호하게 남아 있었다. 프레이가 기억하기로 주점은 평소에 이렇게까지 붐비지 않았다. 사람이 몰릴 만한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영웅의 동료였던 산크레드 워터스와 위리앙제 오귀레가 직접 이 초라한 주점까지 행차한 이유와 연관이 있으리라.

프레이는 말없이 일어났던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산크레드는 약한 미소를 한번 짓고는 위리앙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약속한 대로 산크레드는 프레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위리앙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주인장에게 영웅 추모잔 두 잔을 주문했고, 자신들을 알아본 기색인 주인을 향해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프레이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웅 추모잔이 테이블 위에 놓일 때까지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두 혈맹원은 미리 약속한 것처럼 단숨에 잔을 비웠다. 바닥이 보이는 잔을 내려놓은 후에야 그들의 입이 열렸다.

대화는 드문드문, 그리고 나지막하게 이어졌다.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프레이는 이 여관이 사람으로 북적이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에오르제아 연맹이 지정한 영웅 추모 기간이기 때문이었다. 영웅이 한때 머물렀던 객실은 이제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산크레드와 위리앙제가 이곳에 들른 이유도 바로 그 객실에 있었다. 지난번에 누군가 주인장이 전시해 둔 영웅의 낡은 갑옷을 훔쳐 가는 바람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는 말이 뒤따랐다. 그런 일이 두 번 있으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지, 하고 산크레드는 중얼거렸다.

그들은 잠시 머물렀고 곧 떠났다. 자리를 비우면서 산크레드는 프레이에게 가볍게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합석을 허락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위층 여관으로 떠났다. 인파를 뚫고 사라지는 그들의 등이 시야에서 일렁였다. 그 모습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계단을 천천히 오르던 두 인영이 마침내 난간에 가려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프레이는 고민했다. 이것은 분노인가?

산크레드 워터스와 위리앙제 오귀레는 세상이 영웅에게 저지르는 일련의 기만행위를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단 말인가? 이따위 추모는 우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하는가? 떠나는 그들의 멱살을 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프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두 손을 쥐었다가 펼쳤다. 제 앞에 앉은 채로 그들은 영웅의 죽음에 관해선 한 톨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대화 속에선 산발적으로 극복이나 나아감, 발전 따위의 단어가 숱하게 등장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인가? 손을 질끈 주먹 쥐며 프레이가 속으로 뇌까렸다. 이런 것이란 말인가? 죽음에의 극복이란?

겉껍질만 남은 망자를 오래도록 핥은 행위가? 그와 함께했던 나의 기억, 나의 일부가 붕괴하도록 방치하는 것이? 가장 궁극적이고 치명적인 몰락이 지나간 현장을 파헤치는 대신 한 걸음 물러나 그 윤곽을 더듬는 관망이?

알 수 없었다. 기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오랜 침묵을 머금고 프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여관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