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3천 자, 실제 작업물, BL, 1차
1
lemb 2026.07.14.  15:09

/ 빠른 마감 (3일), 작업 소감 추가

 

 

“이래서야 물 건너갔는데.”

 

한숨을 내쉬는 A의 큼지막한 귀가 잠시 펄럭였다. 뛰어난 청각은 멀지 않은 곳에서 이어지던 인기척이 순간적으로 멈췄다가 움직이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저 기척의 주인도 제 말을 들었을 터였다.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A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창가를 가리키며 상대에게 말했다.

 

“B,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무리야.”

 

책상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동자가 침침한 백열전구 등에 순간적으로 번쩍 빛났다. 매서운 눈길이 A를 지나 창밖으로 향했다. 커튼이 반쯤 걷힌 창문, 그 너머 드러난 광경을 들여다보던 B는 곧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지친 낯으로 이마를 짚었고, 곧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눈보라 같으니라고.”

 

출동을 지척에 앞두었던 그들이 이 남루한 탐정 사무소에 발을 묶인 까닭은 간단했다. 모두가 잠든 도시에 눈보라가 사정없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탓이었다. A는 B가 질끈 쥔 주먹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을 어깨너머로 힐끔 구경했다. 야속한 마음이야 있었지만, 뭐, 오래된 격언도 있지 않은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그리고 A는 그 격언을 고스란히 실행할 생각이었다.

 

“의뢰인도 이해해 줄걸. 눈보라가 이렇게 부는데 일하라고 하는 건 학대야, 학대.”

 

“짜둔 일정을 어기자고?”

 

“아니지, 아니지. 이건 일정을 어기는 것보다, 음, 목숨을 보전하는 행위에 가깝지 않겠어? 저렇게 눈보라가 치는데 나갔다간……. 어우, 난 몰라도 B는 휙 날아갈 것 같은데. 사장님, 바이바이.“

 

A가 짐짓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B의 낯이 단숨에 거무죽죽해졌다. 빌어먹을 날씨에 빌어먹을 녀석까지 함께라니, 하고 중얼거리는 그를 바라보며 A가 킬킬 웃었다.

 

이후로도 몇 번의 공방이 오갔으나 결국 그들은 머물기로 결정을 지었다. 별다른 수는 없었다. 영 탐탁지 않아 보이던 B는 의지를 다지며 코트까지 껴입었지만, 광폭하게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기어코 창문에 금을 내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이후 외출을 향한 갈망을 관두었다. 코트를 정리하는 B는 비에 젖은 채로 제게 뛰어드는 A를 목격한 것만큼이나 낯빛이 어두웠다. 한량처럼 누워 그 모습을 구경하던 A만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럴 만도 하지. B는 오늘 밤의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짜뒀을 테니까.

 

하지만 때때로 일정이라는 것은 실행할 사람을 두고 저 혼자 떠나곤 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A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곤 자리에서 훌쩍 일어났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B를 향해 걸어가며 물었다.

 

“무슨 의뢰였는데 그래?”

 

“뭐가.”

 

“오늘이 아니면 안 돼, 같은 거였어? 그게 아니라면 하루 정도는 미뤄도 괜찮잖아. 우리가 뭐 농땡이 피우려고 안 하겠다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사장님.”

 

탁 소리를 내며 A가 책상을 짚었다. B는 돌아보지 않았다. A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때때로 B에게서 대답을 받아내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씩 걸렸다. 그의 침묵은 단어를 고르는 행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A는 그런 B를 기다리는 법을 알았다. 그가 가장 자신 있는 지시기도 했다. 기다려!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A는 잠시 눈을 감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며 천천히 심박에 집중했다. 희미하고 어렴풋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뛰는 심장이 조금씩 그 베일을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일정한 박동으로 두근거리며 A의 몸을 데우고 식히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심박은 크게 널뛰지 않고 침착했다. 평소보다는 약간 느렸지만 주의 깊게 살필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서야 A는 눈을 떴다. 시어도로를 보았다. 여전히 내리깐 붉은 눈으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밖을 응시하는 그를.

 

“어느 유령 의뢰인이었어.”

 

B가 마침내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와 함께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연인과 죽어서 헤어졌다고 했어. 며칠 후면 상대와의 십 주년이라고, 그전에 만나보고 싶다고 의뢰했댔어. 기념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두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죽어서도 연인을 만나고 싶다니 사랑이 지극하네.”

 

“살해당했댔어.”

 

뜻밖의 말에 A가 입을 다물었다. 잘못 들었을 리가 없었음에도 그는 순간적으로 제가 들은 말을 부정했다. 그리고 그런 A를 향해 쇠못을 박듯 B는 반복했다.

 

“연인이 직접 찔렀다더라. 의뢰인의 심장을.”

 

B의 고개가 살짝 떨어졌다. 백열등 빛이 침침했다. A는 그의 얼굴을 읽어내려고 애쓰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폭풍이 몰아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통째로 하얗게 얼어가는 도시를 응시했다. 그러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이윽고 침묵이 왔다.

 

A는 B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았다. 그리고 B 또한 마찬가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갈라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그가 지그시 숨을 들이켰다. B가 설명한 사건과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도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A는 제 심장께에 손을 올렸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심박을 더듬으며 속으로 뇌까렸다. 지독한 눈보라와 연인을 살해한 사람. 심장을 꿰뚫으며 살인자는 무슨 생각을 했지? 제 심장을 꿰뚫는 연인을 바라보며 의뢰인은 또 무슨 생각을 했고?

 

자신을 살해한 연인을 만나겠다고 결정을 내렸을 때, 의뢰인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기억은 마치 어린아이 손에 들린 권총과 같았다. 순진무구한 손에 들려 있다가 의도치 않은 순간, 의도치 않은 때에 느닷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발포한 총알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었다. 때때로는 타인을 상처 입혔고 때때로는 기억의 주인을 살해했다. 지금도 그랬다. 같은 순간, 같은 때에 A와 B의 권총이 공이치기를 울렸다. 기억으로 조각한 탄환은 그렇게 서로의 심장을 꿰뚫었다.

 

B가 돌아보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침묵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지 못하는 까닭도 알았다.

 

“무슨 마음인 걸까?”

 

한참 후 B가 중얼거렸다. 그의 한 마디는 꼭 제 심장에 박힌 탄환을 끄집어내는 손길 같았다. A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고 다시 내쉬었다. 손을 질끈 쥐었다가 폈다. 훌쩍 책상 위에 걸터앉고서 A가 되물었다.

 

“뭐가?”

 

“자신을 살해한 연인을 다시 만나겠다는 그 투지가 궁금해.”

 

A는 어깨를 으쓱였다. 화나서 따지려는 걸지도 모르지, 하고 말하자 B가 고개를 끄덕였다. A는 이 외에도 몇 가지 가설을 늘어놓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복수하려고 한다거나. 연인에게 완전히 달라진 나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따귀라도 때릴 참이라거나.

 

“아니면 정말로 그냥 다시 보고 싶은 걸지도 몰라. 사랑했으니까.”

 

“사랑했으니까…….”

 

B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그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언뜻 가늘어진 B의 눈을 곁눈질하던 A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튀어 나간 질문은 지나치게 뜻밖이어서 A 본인조차도 약간의 낭패감을 느꼈다.

 

“B는 있어? 죽어서도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B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내 눈과 눈이 마주쳤다. 황당함과 약간의 부끄러움으로 얼룩진 낯을 들여다보며 A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헤프게 웃자 B가 헛웃음을 지었다. 망할 자식, 하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굴러떨어졌다. 역시 이건 좀 그렇지. 사과라도 하려는 마음으로 A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B가 자리에 도로 털썩 앉았다. 다시 한번 A를 등진 채로 그가 중얼거렸다.

 

“몰라.”

 

여전히 돌아보지 않는 B를 바라보며 A는 유령 의뢰인을 떠올렸다. 자신을 살해한 연인을 찾으러 가겠다는 그 다짐을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여전히 이유는 몰랐다. 본인의 심장을 꿰뚫은 상대를 되찾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A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면 알 것 같았다. 아주 조금이라면. 재회를 기약하는 마음이 무엇인지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므로.

 

B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 수 있었다. 그의 심장이 뛰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A는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