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그어 스포일러 주의
뒷일을 부탁하지.
*
잿빛 하늘에서 드리운 그림자가 거리를 덮었다.
마천루와 같은 빌딩 최상층에 서서 A은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짙은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무거운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졌다. 내리는 속도를 보아 머지않으면 도시가 새하얗게 물들게 될 터였다. 우산을 찾아 편의점으로 향하는 사람과 발걸음을 재촉하는 행인, 눈사람을 만들러 가자고 부모를 재촉하는 아이가 거리에 어지럽게 뒤섞였다. 채 정리하지 못한 행사 물건들이 걸음을 서두르는 사람들 발치를 나뒹굴었다.
낮에는 화려한 기념식이 있었다. 그런 종류의 행사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 필요성은 이해했다. 고작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A은 눈 아프게 꾸민 무대와 각을 잡고 도열한 AOC 요원들을 지나 도시를 한 바퀴 횡진하고 있었다. 경탄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민들을 지나치면서 A은 눈이 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나 했었다.
일 년이었다. 도시의 총책임자를 맡겠다고 선언한 지 정확히 일 년. 연이은 크리쳐의 침공에 입은 상처를 수복할 틈도 없이 자행된 테러가 도시에 깊은 상흔을 남긴 지도 벌써 일 년. 비틀린 입술에서 희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메마른 낯을 한번 문지르고서 그가 창문에서 시선을 뗐다.
그는 여전히 B의 유언을 기억했다. 살아보니 잊을 수 없는 순간이라는 건 분명히 존재했다. 그의 죽음은 기나긴 추락과 함께였다. 매서운 총탄처럼 전신을 두드리던 잿빛 싸라기눈, 고개를 힘껏 꺾어 내렸지만 느껴지지 않던 통증. 아득히 멀어지면서도 A은 B의 말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뒷일을 부탁해. 약간의 웃음, 그리고 이어지던…….
그날 B을 붙잡지 못한 대가로 A은 사명을 그러안고 홀로 이 도시에 남았다. 그리고 그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A은 터지려는 한숨을 간신히 참아내며 두 손을 질끈 쥐었다. 뒤통수 너머 책상, 그 위에 올라간 서류의 정체를 새삼스럽게 곱씹자 미미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찔렀다.
“총사령관님. 실례합니다.”
그때 허락도 없이 문이 열렸다. 상념에서 깨어난 A이 고개를 들었다. 입은 옷을 보아 AOC 소속 일반 대원이었다. 얼굴이 퍼렇게 질린 채였다. 약간의 의구심과 함께 A이 멈췄다. 미약한 기시감이 일었다. 그가 몸을 완전히 돌려 대원을 바라보았다. 낯익었다. B과 그가 팀으로 활동할 때부터 종종 휴게실에서 마주쳤던 사람이었다. 맞닥뜨릴 때마다 B을 향한 동경의 시선을 보내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왜 그러지?”
“저, 총사령관님을 뵙고 싶다는 분이…….”
대원이 형편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A은 저도 모르게 책상 위의 서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호두나무로 만든 짙은 갈색빛 책상, 금테를 두른 테두리, 그 위에 덩그러니 놓인 종이를 바라보았다. A의 시선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책상 위 서류가 달싹였다.
“도무지 믿기지 않습니다만, B 님이십니다.”
대원이 떨며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A은 입술을 깨물었다. 세계 최강의 존재였던 B의 안드로이드 제작 허가 요청서가 거기에 있었다.
A은 기다렸다.
이제 사령관실에 남은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 엄중히 닫힌 문 너머에서는 어떠한 속삭임도 새어들지 않았다. 완벽하고도 완전한 침묵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A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차마 앉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돌아다니지도 못했다. 그는 단지 올곧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하나뿐인 눈을 똑바로 뜬 채로, 앞을, 문을, 그 너머를 응시했다. 그러며 생각했다. B. B.
사라진 사람. 죽어간 사람. 하지만 이 도시는 이제 산 자와 망자 간의 경계가 놀라우리만치 모호해졌다. B은 말하자면 최후의 보루 같은 존재였다. 이 도시가 통째로 죽음 혹은 삶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는,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그 신비로운 일을 가능케 하는 사람이었다. A의 고뇌는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B을 안드로이드로서 되살리면 그는 다시 한번 이 도시에 몸을 위탁하게 되었다. 그는 도시를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인류 최강의 존재가 지키는 도시라면 그 어떤 위협도 그들에게 닿지 못하리라. 그들이 백 번 쓰러진들 백한 번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존재, B는 다시 한번 꺾이지 않는 대들보가 된다.
하지만 A 그레이스톤은 망설였다. 한 가지, 단 한 가지 생각이 마치 그만 아는 은밀한 비밀처럼 그를 가로막았다.
B는 생전에도 지나치게 많은 짐을 짊어졌지 않는가…….
“총사령관님.”
마침내 누군가가 문 너머에서 그를 불렀다. A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을 들어 무심히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목이 메마르지 않도록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짧게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말했다.
“들어와라.”
그러자 문이 열렸다. 뒤이어 눈이 마주쳤다.
올곧은 시선이 A을 지그시 응시했다. 미약한 흔들림은 마치 바람 앞 등잔불 같았지만 B은, 돌아온 그 사람은 잔떨림 이상의 동요를 내비치지 않았다. 허락조차 없이 B은 성큼 총사령관실로 들어섰다. 안절부절못하는 부하를 향해 A은 가볍게 신호를 주었고, 이윽고 문이 닫혔다. 커다란 방안에는 그들 둘만이 남았다.
눈을 마주한 채 A은 죽음과 같은 불안을 느꼈다. 당장 손을 뻗어 B을 붙잡아 끌어안는 상상을 끊임없이 하면서도 그는 붙박인 듯 움직이지 못했다. 무언가가, 무엇인가가, 아주 불온하고 새카만 것이 그의 전신을 단단히 옭아맨 듯한 기분이었다. 목이 끊임없이 메말랐고 갈증은 연신 입술을 축이게 했다. A은 긴 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재회가 이런 식이리라곤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고 오래도록 홀로 되풀이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건 B도 매한가지였다. 그 사실만큼이 A을 조금이나마 위로했다. 억겁 같은 침묵, 태피 사탕처럼 길게 늘어난 시간 위에서 걸으며 서서히 침몰하는 기분으로 두 사람은 한참이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A은 B이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어림했고, 그러나 은빛 검날만큼이나 매서운 직감은 B과 관련된 일에서는 틀리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되새겼다. 그리고 마침내 B이 입을 열었을 때 A은 느닷없는 탈력감에 고개를 떨궜다.
“오랜만이라는 인사가 상황에 적합할지 모르겠군.”
약간은 멋쩍은 듯한 혼잣말, 상황을 바라보는 냉철한 의구심, 그러나 차마 숨기지 못하는 미약한 기쁨 같은 것들. 감정은 마치 하나의 뭉치처럼 문장을 타고 전해지지만 A은 그것들을 낱낱이 파헤치는 법을 알았다. 당연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B인데. 그들의 소통은 때때로 언어 그 이상의 범주에서 이루어졌고 A은 여전히 B을 직감하는 법을 잊지 않았다. B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을 때 A은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심장께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는 책임에 몸서리치며 웃었다.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뭐, 서로 꼬집어주기라도 하면 되려나.”
“농담에는 여전히 재능이 없군.”
“농담인 것 같아?”
그러며 B은 A을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마침내 A 안에서 무언가 거대한 무게가 빠져나갔다. 한층 상쾌해진 기분으로 A은 팔을 벌렸고, 다가온 B을 질끈 끌어안고서 속삭였다.
“정말 보고 싶었어. 정말로.”
맞닿은 몸에는 사람의 온기가, 틈 없이 밀착한 가슴께에서는 심장 박동이 있었다. 지나치게 생생해 그는 되레 이것이 정말로 꿈인가, 하는 착각에 휩싸였다. 가깝게 붙었던 B이 물러나자 체취가 그와 함께 훅 떨어져 나갔다. 그들 사이에는 다시 약간의 거리가 생겼다. 그 여백을 내려다보며 A은 스스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꿈이라면 좋겠어. 꿈에서라도 너를 보았다면 그걸로 된 거야.
그러나 B이 내뱉은 말은 차라리 선고였다. 공상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하늘을 떠다니던 섬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무자비한 밧줄 같은 것.
“오면서 조금 둘러봤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기억하는 안전지대와는 형태가 많이 다르던데.”
창문은 전부 닫혀 있었음에도 순간 마르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제 뺨을 할퀴는 듯했다. A은 반사적으로 숨을 머금었다가 느리게 뱉었다. 그래. 그 이야기가 있지. B이 질문한 이상 이제는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A은 고개를 돌렸다. 까마득한 마천루 위에 붕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내려다본 도시는 고요한 잿빛. 저 침묵하는 대지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피를 흘렸고, 또 흘리게 될지 이야기한다면, B은 A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비밀은 이런 사소한 머뭇거림에서 생겨나는구나, 하고 A은 내심 스스로 비웃었다. 그러며 다시 한번 입꼬리를 끌어올렸고, 자신을 바라보는 B의 찡그린 낯을 응시하며 말했다.
“조금 걷지 않겠어?”
어느덧 두껍게 쌓이기 시작한 눈 덕분에 거리에 사람은 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B의 앞에서 소란한 모양새를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내리는 눈에 맞추어 걸으며 그들은 오래된 과거를 끄집어냈다. 이 도시가 머금은 냉혈한 추위가 부패를 막은 양 추억은 마치 엊그저께 일어났던 일처럼 손쉽게 떠올랐고, 또 입에 올랐다.
옛날이야기가 멈출 때마다 도시의 냉기가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서서히, 몸의 말단에서부터 얼어붙는 듯한 감각은 유쾌하지 못했으므로 A은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했다. 마침내 오래도록 걷던 걸음이 멈췄을 때 A은 B의 근황을 묻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새기고는 대신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여기는…….”
B이 멈춘 곳은 네온사인이 화려한 게임장 앞이었다. 안쪽에서 화려한 음악이 쿵쿵거리고 눈 아픈 조명이 번쩍였다. B은 게임장 내부로 깊이 들어가는 대신 도보에 툭 튀어나온 기계 앞에 섰다. 인형 뽑기 기계였다. 귀를 울리는 음악과 함께 뽑기 기계 안을 비춘 조명이 눈이 시리게 번쩍거렸다.
“돈. 있나?”
“이걸…….”
A은 약간의 놀라움을 담아 B을 바라보았다. 제가 기억하기로 B은 이런 종류의 오락을 즐기는 인물은 아니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모를 일이었다. A이 머뭇거리자 B이 힐끔 그를 곁눈질했다. 그러고는 쐐기를 박듯이 되풀이했다.
“동전 남는 것 없어? 안타깝게도 나는 빈털터리라.”
망설임은 짧았다. 얼어붙은 말단을 깨고 제 몸을 사로잡는 훈기 도는 즐거움에 A이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품에서 꺼낸 동전은 B에게 넘어갔다. B은 신중하고 진지하게, 마치 탄창에 총알을 충전하는 듯한 몸짓으로 기계에 동전을 집어넣었다. 제값을 받은 기계에서 곧 명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첫 번째 도전!’
“갑자기 이런 데에 흥미가 생기는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네가 워낙 죽을상이어서. 내버려둘 수가 있어야지.”
“내가?”
A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기계 조작에 심혈을 기울이던 B이 어깨너머로 곁눈질했다. 무심한 시선이 A의 낯을 힐끔거리고는 곧 인형 뽑기 기계로 돌아갔다.
“그래. 지금이 훨씬 낫군.”
“오랜 친구와 변덕 덕분이지. 음, 나라면 조금 더 왼쪽에서 노려보겠어.”
하강 버튼을 누르려던 B이 잠시 멈췄다. 약간의 머뭇거림 끝에 B은 조이콘을 왼쪽으로 살짝 건드렸다. 두어 번 달칵거리던 집게가 곧 기계음을 내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인형 속에 집게가 파묻혔다. 그러나 기대감과는 달리 올라온 집게는 빈손이었다. 기계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두 번째 도전!’
“네가 길게 설명하지야 않았지만, 결국 지금의 네게 이 안전지대가 중요하단 의미겠지.”
B이 다시 한번 조이콘을 잡았다. 이전보다 훨씬 능숙해진 손길로 조이콘을 움직이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A이 입을 열었다.
“이제 인류는 안전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내가 걱정하는 건 인류가 아니야.”
달그락거림과 함께 집게가 다시 한번 하강했다. 인형 속에 파묻혔다가 다시 한번 빈손으로 올라왔다. B이 낮게 혀를 찼고, 기계는 명랑하게 말했다. ‘마지막 도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차가워진 손끝으로 울렁이는 가슴께를 문질러 내리면서. 안대로 덮은 눈가가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데 B은 돌아보지 않았다.
“뭐가 됐든 간에 지금 너는 지나치게 짓눌려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A은 입을 다물었다. 목구멍에서 뜻 모를 이질감이 일렁였다. 마른침을 넘겨 그것을 삼켜냈다. 그러자 이번엔 식도를 타고 떨어지더니 심장이 뜨거워졌다. 불을 붙인 듯이. 입을 열자 하얀 입김이 피었다. 희게 부스러지는 숨 너머에서 B이 버튼을 눌렀고, 집게가 인형 속으로 내려갔다.
“내가 돌아왔으니 이제 혼자 감당할 필요 없어. 그 얘기를 하려는 거다.”
‘축하합니다!’ 기계가 크게 한번 덜컹였다. B이 몸을 숙였다. 토출구에서 꺼낸 일각수 인형을 잠시 만지작거리던 그가 곧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웃음 같은 건 없었다. 여전히 무심했고 또 담담했다. 하지만 열기가, 살아 있는 사람 특유의 온기가 그 모든 시선과 몸짓에서 묻어나왔다. B이 자연스럽게 인형을 A의 품에 안겨주고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을 충동적으로 붙들지 않기 위해 A은 지그시 숨을 삼켜야만 했다. 그래서였다.
“그러니까 이제 얼굴 좀 풀어라.”
A은 인형을 오랫동안 쥐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A의 거처로 돌아왔다. 더 걸을 수 있다는 A의 제안을 B은 얼굴이 창백하다는 단호한 말 한마디로 거절했다. 거처는 혼자 지내기에 넓었고 또 고요했다. A이 젖은 옷을 갈무리하는 동안 B은 몸을 씻었다. A은 급한 대로 제 옷을 걸친 B을 빤히 바라보다가 화장실로 들어섰다. 뜨거운 물을 양껏 맞고 몸을 녹였다.
샤워를 마친 후 그들은 저녁을 먹었다. 몸을 데울 수 있는 따뜻한 수프 종류가 좋겠다는 B의 제안에 A은 오랜만에 조리도구를 쥐었다. 냉장고 안에서 꺼낸 재료를 일정한 크기로 자르고 기름에 볶았다. 육수를 끓인 냄비에 밀가루와 우유로 만든 루를 풀면서 A은 새삼스럽게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그때, AOC의 대원이던 그들은 전장에서 간단하게나마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았다. 있는 재료로 급하게 끓여 먹기에는 수프만 한 것이 없었기에 그들의 주식은 이름조차 없는 잡탕 수프였다.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건더기가 없는 멀건 수프를 시간에 쫓기며 퍼먹을 필요는 없었다. 지금 그들 앞에 놓인 음식은 안전지대에서도 사치를 부리는 축이었다. 건더기까지 듬뿍 담은 그릇을 B 앞에 내려놓자 그는 작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식사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A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적막을 사랑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서 B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졸음이 묻어나는 눈이었다.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며 B이 천천히 식탁에 몸을 숙였다. 제 팔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A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어 그의 앞에 놓인 빈 그릇을 쥐었다.
“쉬지 그래. 피곤할 것 같은데.”
“그럴까.”
짧은 뜸을 들이고서 B이 고개를 내저었다.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가 한숨처럼 말했다.
“요리한 사람한테 설거지까지 시킬 수는 없지. 내가 할게.”
“뭘 새삼스럽게! 치워두기만 하고 갈 테니 쉬고 있어라. 금방 할 수 있어.”
“하지만…….”
“믿으래도.”
내리깔았던 B의 시선이 서서히 들렸다. 게슴츠레한 눈과 A의 눈길이 맞닿았다. 할 말이 있다는 양 입을 몇 번 빠끔거렸으나 그뿐이었다. 곧 작은 한숨과 함께 B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A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염치없지만 부탁하지.”
“우리 사이에 염치는 무슨. 원하는 곳에서 편하게 쉬어도 좋아. 네 집이라고 생각하도록!”
A이 대답했다. B은 짧은 대답과 함께 자리를 떴다. 거실을 향해 사라지는 B을 끝까지 바라보던 A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천천히 움직였다. 식기를 물에 담그고 마른행주로 식탁을 닦았다. B이 앉았던 자리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의 손이 올라와 있었던 위치를 손끝으로 지그시 눌러보았다. 서서히 식어가는, 그러나 아직 분명히 남은 미온한 열기가 손가락을 타고 퍼졌다. 손끝을 간지럽히는 훈기에 입꼬리를 끌어올리다가 불현듯 멈췄다. 반질거리는 검은 식탁에 비친 제 얼굴이 이전에 본 적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그래서 A은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안 돼.
B이 찾아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A은 마치 꿈을 걷는 것 같았다. 번잡한 일은 전부 잊을 수 있었고 사감 없이 웃을 수 있었다. B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그의 온기를 확인받을 때마다 A은 벅차오르도록 뛰는 심장을 느꼈다. 그는 이런 꿈결 같은 감각을 정의할 줄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행복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았다.
그에게는 사명이 있었다. 뒷일을, B이 제게 남긴 모든 것을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하지만…….
A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엌을 벗어나 복도를 지났다. 불 켜진 거실에 다다르자마자 그는 보았다. B이었다. 소파에 기대어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의 이마와 눈가, 뺨을 덮고 윤곽을 따라 떨어졌다. 들숨과 날숨을 따라 달싹이는 가슴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거실 등을 껐다. 행여나 이 빛이 B을 깨울까 두려워서.
어둠과 적막 속에서 A은 느리게 다가갔다. 잠든 B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머뭇거리는 손, 망설임이 묻은 손끝으로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들췄다. 찡그림 없는 낯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사소한 망설임이, 약간의 머뭇거림이 비밀을 만든다면.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내게서는 또 하나의 비밀이 탄생했을 거야.
사명을 부여받은 A 그레이스톤은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B이 맡긴 뒷일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보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잠든 B의 이마를 쓸어내리며 A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너는 나를 그 맹세로부터 도망치고 싶게 해.
거대한 이계 신을 향해 뛰어들던 B을 기억했다. 멈추라고, 같이 가자고,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목이 터지라 외치던 순간은 지나치게 생생했다. 바스러지던 육신과 몰아치던 광풍은 눈을 감으면 곧장 떠올랐다. B이 떠난 세상에서 얼마만큼의 후회를 곱씹고 또 얼마만큼 맹약을 되새겨야 했던가.
안대로 가린 눈이 타오르는 것만 같은 통증 속에서 A은 한숨처럼 속삭였다. 그 모든 순간을 거쳐왔기 때문에 안다. 때가 온다면 나는 언젠가 너를 대신해 죽음을 택할 것 같아. 해묵은 약속도 맹세도, 결의도 다짐도 전부 잊고서.
하지만 나는 그래선 안 돼.
그러니까…….
A은 손을 뻗었다. B의 이마와 눈가, 콧등과 입술을 지나 목을 쥐었다. 그의 목은 한 손에 간단히 쥐어졌다. 인류 최강의 존재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쉬웠다. B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A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았다.
이것으로 세 번째 비밀이야.
A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B가 도시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다음 날, 총책임자 A 그레이스톤은 인류 최강의 존재를 안드로이드로 만드는 계획을 허가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살아 돌아왔던 B의 행방을 묻는 이들은 차츰 사라졌다. 안드로이드는 서서히 뼈대를 잡아갔다. 완성에 가까워지는 안드로이드 앞에서 A은 자신의 맹세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고, 그 사실에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