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6천 자, 실제 작업물, 와일드 그레이 기반, 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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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3:54



깨달음은 불현듯 온다. 무심코 뺨을 적시는 사소한 빗방울처럼. 스쳐 지나친 무엇인가에 발걸음을 잡히는 순간, 돌아본 시야에서 뜻밖의 물건이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느끼며 B는 차분히 멈춰 섰다. 갈고리 같은 인력을 지닌 그것이 깨끗한 유리창 너머에서 희뿌연 조명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티끌 한 점 없는 은으로 겉을 조각한 테. 내용물을 보호하는 막은 놀라우리만치 투명해 있지도 않은 것만 같다. 박자에 맞추어 똑딱거리며 기울기를 거듭하는 두 침과 고풍스러운 세리프체를 빌린 열두 숫자. 사용이 쉽도록 연결해 둔 줄은 몸체와 같은 빛으로 산란한다.


시계와 B를 가로막은 창에 물방울이 맺힌다. 희미한 비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중얼거리는 것도 잠시. 하늘에서 소리 없이 빗방울이 추락하기 시작한 그 순간 B는 생각하고 있었다. 저것을 사는 게 옳을까.


얼마 전 A의 시계가 고장 났다. 부서졌다. 결딴났다. 아니, 전부 틀리다. 상황을 온전하게 전달할 만한 단어들이 못 된다. 적확한 말을 고르려 애쓰며 B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부정확한 어휘와 어울리지 않는 낱말은 때때로 문장의 의도를 곡해한다. 비평가, 그러니까 글을 쓰는 사람, 말과 언어를 다루는 직업, 정제된 문장으로써 예술을 승화하는 존재이기에 B는 제 생각을 일목요연하고 명확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어떠한 감각으로도 침해받고 싶지 않은, 순수 그대로의 감정을 물성 가진 형체로써 발화하고자 하는 욕망과도 비슷한.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런 거다. B는 제 생각이 그 어떤 불분명함에 오염되지 않은 그대로 정리되기를 바란다. 이 혼잡한 머릿속을 깔끔하게 열을 맞추어 세워 정제된 모습으로 행동하고자 한다. 이것은 비평가로서의 직업의식 또는 윤리와 맞닿아 있으며 동시에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를 가진다.


모든 일에 이렇듯 심혈을 기울여 접근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B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그는 뭐랄까,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거침없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정의한다. 무릇 기사가 전장과 집에서 동일한 맹렬함을 지닐 수는 없는 법이니까. 경계하며 몸을 낮추는 순간이 있다면 매섭게 몰아쳐야 하는 때도 있다. B가 생각하기로서니 이번 일은, 의도치 않은 장소와 물건을 마주하여 불현듯 다다른 깨달음은 전자에 가깝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B 본인을 이 온갖 번뇌에 사로잡은 물체가 다름 아닌 시계였기에.


B는 자신이 멈춰 선 상점의 정체를 알았다. 이곳은 백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크기의 시계를 제작해 온 유서 깊은 가게였다. 근방에 있는 가게들이 대를 잇다가 탈락하고 변모하고 마모하여 교체되는 동안 이곳은, 이 시계 공방만큼은 오롯했다. 시간의 흐름을 다루는 방법을 익히기라도 한 것처럼. 폭풍 같은 일들이 거리를 휩쓰는 동안에도 공방은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켰다. 지금도 그렇다. 무겁게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에도 가게의 간판은 특유의 색채를 조금도 잃지 않고 있었다.


자리를 보존한 시간만큼이나 공방에서 만드는 시계는 그 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대를 이어온 장인들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구석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틀을 만들고 태엽을 돌려 시각을 맞추는 일들을 기계적으로,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행해졌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직조하듯이 빚어낸 결과물은 어딜 내놓아도 빛바래는 법이 없다. 값어치를 톡톡히 하는,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제법 가격이 나가는 시계들이 유리창 너머에 열을 맞추어 즐비했다.


하지만 B의 시선은 은시계에 맺혀 있었다. 유리창에 매달려 미끄러지는 물방울보다도 진득하게. 그러나 망설임을 품고서.


A에겐 은이 참 잘 어울렸다.


“들어오시오.”


기척 없이 다가온 누군가의 부름에 B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놀란 기색을 숨기는 데에는 능숙했다. 그것이 사교계 레이디의 덕목이므로. 대신 B는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에게 무례가 되지 않을 정도의 거리감을 품은 채 제게 말을 건 사람을 바라보았다. 공방 문을 반쯤 열고 기대어 선 늘그막 노인네의 입꼬리가 다소 괴팍한 모양새로 기울었다.


“슬슬 쏟아질 기세요. 노망났다고 생각할진 몰라도 이 노인네가 가장 잘 맞추는 게 소나기와 시간이외다.”


“…….”


“들어오시오.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잠시 몸만 피했다가 가시오. 보아하니 우산도 없는 듯한데.”


B는 곧장 움직이는 대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노인이 몸을 반쯤 틀어 공간을 냈다. 미동 없는 B를 향해 느긋한 재촉이라도 하듯 그가 한 소리를 덧붙였다.


“아가씨 옷이 진탕 젖을 것 아닙니까. 차림새로 보아하니 이 근방에 머무는 분도 아닌 듯한데. 부담 갖지 마시오.”


“잠시 실례할게요.”


마침내 B가 움직였다. 걸음을 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도블록이 짙게 물들었다. 문이 닫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직전까지 제가 서 있던 유리창 바깥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머리를 가리고 뛰었다. B는 가까운 차양으로 달리는 젊은이 몇몇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비가 오는군요.”


“말했잖소.”


“어떻게 아셨나요?”


“시계 만드는 일을 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오. 비와 습기는 시계에 치명적이니까. 잠시라도 빗줄기를 맞으면 시계는 금방 닳고 낡소. 시간을 예측하기 어려운 골동품이 되는 건 순식간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노인은 곧 매대 너머로 사라졌다.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B는 시선을 내렸다. 시야엔 어김없이 시계가 잡혔다.


그것들은 여전히 조명등 아래서 반짝거렸다. 하지만 밖에서 구경하는 것과는 다소간 감상이 달랐다. 실물은 묘한 박력까지 느껴질 만큼 섬세하고 세심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주먹보다 작은 몸체 안에 짜맞춰져 있을 태엽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듯했다. 시침과 초침이 규칙적으로 똑딱거리는 무수한 소음이 마치 칼날 같은 빗줄기를 상기케 한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몽롱하게,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명징하고 또렷한 의식을 가진 기묘한 상태로 B가 시계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은시계가 조명등을 받아 눈이 아프게 점멸했다. 깨끗하게 연마한 표면은 B 본인이 비칠 만큼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손때 하나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에 A의 것과는 다르다.


“관심이 있소?”


노인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B 개인에게 관심이 있다거나 호객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뭐랄까. 그보다는 조금 더 건조하고 묵묵한 목소리였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적요한 빗소리와 맞물리며 더더욱 서늘하게 느껴졌다. B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은 장인의 주름진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글쎄요.”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손님들은 대개 두 부류였소.”


공방 주인이 뜬금없이 말을 이었다. B가 반응을 고르는 것조차 기다리지 않고서 그가 말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둘 중 하나의 반응이라면 차라리 정직한 사람이오.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니면 대개 긍정일 가능성이 크더군요.”


“그런가요?”


“아가씨도 그런 듯해서 하는 말이오.”


B는 대답을 찾기 위해 잠시 입을 뗐다. 그러나 마땅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서 도로 닫았다. 시선은 여전히 은시계를 향한 채였다.


어울렸다. 시계와 A는. 저 은시계를 찬 A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의 낡고 손때 묻은, 그래서 이제는 이곳저곳에 흠집이 난 골동품 비슷한 물건을 대체하기에 아주 적합하다고 B는 결론을 내렸다. 동시에 스스로에게 조금쯤 놀랐고, 또 명백히 실망했다. 매끄러운 표면에 비치는 제 얼굴, 그 안에 박힌 두 눈동자가 어둡게 침잠하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B는 곧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것은 명명백백한 월권이다. 비단 그가 내린 ‘결론’에 국한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이 공방 앞에서 불현듯 깨달음을 얻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은 전부 B의 권한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B는 평소였다면 자신이 시계 공방 앞에서 멈춰 서지 않았으리란 걸 알았다. 여상 같았다면 여기가 그 소문의 공방이구나, 하고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는 풍문으로 듣던 공방 앞에서 멈췄고, 저도 모르게 유리 너머 진열대를 살폈으며, A와 어울릴 것만 같은 시계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멈췄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까닭은 명징하다. A의 시계가 얼마 전 ‘망가졌으니까’. 그리고 그 정의는 B 본인이 내린 것이므로, 상태가 좋지 않게 변했다는 판단은 B 개인에게 종속되며, A는 아마도 동의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 애초에 그는 시계를 일컬어 아직 쓸 수 있으리라 말했고, 이 행위는 정말이지 모욕적일 정도로 확실한 월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고민하는 모양이오.”


노인이 예의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번잡한 생각들을 느리게 밀어 치우며, 그리고 그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B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네요.”


“그 친구는 내 아들놈이 세공했소. 나는 이제 손이 둔해졌는데, 그놈은 전성기일 적 나보다도 끝이 야무져서 내가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능히 이룹니다.”


높낮이 없는 덤덤한 목소리였다. B는 노인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만 같았다. 놀라울 건 없었다. B 본인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일 테니까.


“하지만 그놈은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대담하질 못해요. 시계 틀을 가꾸고 본을 뜨는 건 생각하는 것보다 거침없이 이뤄지는 일이지요. 그래서 그 시계의 세공은 아들이, 본은 내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외다.”


“…….”


“시계란 그런 것이오. 단순한 보조 도구가 아닙니다. 두 사람의 시간을, 인연 자체를 엮는 힘을 가지고 있소. 모든 물체에 깃든 힘이지만, 시계는 그걸 눈으로 보여준다는 데에서 유달리 강력하더랍니다. 시계 자체가 마모되고 변모하더라도, 초침과 시침이 시간과 어긋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그 변화마저 일종의 잣대로 받아들입니다. 세월을 짐작할 수 있도록.”


두 사람의 시간을 엮는 힘. B는 노인의 표현을 조용히 곱씹었다. 자연히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계를 손에 든 A. 그리고.


다음 말을 기다리며 B는 진열대에 적힌 문구를 기계적으로 읽어내렸다. ‘녹이 슬므로 비를 맞지 않게 하시오.’ 그러며 생각했다. A의 시계에는 얼마나 많은 생채기가 나 있던가? 얼마나 오랫동안 주인의 손을 거치며 ‘고장 나고’, ‘부서지고’, ‘결딴나고’, 기어코 망가졌던가?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참 서글픈 특혜요. 흘러간 세월에 우리는 문득, 그 사람과 보냈던 추억이나 기억 따위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저도 모르게 가늠하고 마니까.”


“…….”


“그렇기에 시계란 씁쓸한 것이지…….”


잠시 틈을 두고서 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가씨가 공방에 들어온 지도 십삼 분이 지났구려.”


그렇군요, 하고 B가 대답했다. 시선은 여전히 아래에 향한 채였다. 반짝이는 은빛으로 산란하는 색채가 있었다. 혼잡하던 머릿속이 차츰 가라앉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그러나 번잡하게 뒤섞인 탓에 가려졌던 알맹이를 끄집어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B가 작게 웃었다. 입꼬리에 묻은 쓴 기색은 말없이 손으로 훑어냈다.


어떠한 감각으로도 침해받지 않은 순수 그대로의 모습으로, 불현듯 하지는 않으나 오랫동안 축적해 온 번뇌의 형태로써, B는 가만히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 시계를 살 수 없다. 이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시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한. 아마도 A의 시간은 아직 그 시계, 낡고 생채기가 많이 난 바로 그 물건에 엮여 있을 테니까. 시간과 마음은 억지로 끊어낼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다만 멎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자연히 물러갈 때를.


어떠한 불분명함에 오염되지 않은 그대로의 선물을 줄 수 없다면. 차라리 무엇도 건네지 않는 편이 낫고, 또 옳다. 떠다니던 잡념들을 정제된 문장으로 정리해 마침표를 찍었다. 진열대 앞에서 멈춰 선 순간부터 바라왔던 일을 마침내 마무리한다.


비로소 미련은 소낙비처럼 발치를 쓸며 사라진다.


“곧 비가 멈출 거요.”


멀지 않은 곳에서 노인이 묵묵하게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기다리시오. 멈출 때까지. 다 멎은 후에 떠나시는 게 좋겠소. 젖지 않게. 감기에라도 걸리면 곤란하니.”


“감사합니다.”


정말로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B가 바르게 대답했다. 그러며 조용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