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에 와닿는 소름 끼치도록 생생한 공기에 밭은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을 때. 모험가는 가로누워 있었다.
잠시간 눈을 깜빡인다. 세계가 기울어 있다는 자각은 충분히 느리게 온다. 하늘과 수직으로 맞닿은 검푸른 파도, 일렁이는 파랑, 그 끝을 산만하게 수놓은 레이스 같은 거품들을 들여다보며 모험가는 생각한다. 세상이라는 게 본래 이랬나. 바다와 하늘이란 게 원래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서로의 경계선을 거리낌 없이 침범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던가.
속으로 뇌까린 직후에 모험가는 깨닫는다. 모험가는 누워 있고, 이곳은 모래사장이라는 것을.
느닷없는 의아함과 함께 모험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집 한 채,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수평선은 아득히 내뻗었고 좌우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사장만이 모험가를 반긴다. 이토록 광막한데 바닷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유난스럽게 느껴진다. 모험가는 숨을 들이켜고, 서리 핀 것 같은 찬바람에 폐부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동시에 부풀렸던 숨통을 꺼트려 내쉬어 긴장한 몸에서 힘을 풀고자 노력한다.
기실 알 수 없는 장소에 홀로 떨어지는 건 하루이틀 겪어본 일이 아니다. 무릇 영웅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해야지 않나. 미지할 뿐인 정경은 영웅에게 어떠한 위협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므로.
발치를 덮은 백사장을 내려다보던 모험가는 천천히 걷기로 마음을 먹는다.
습윤한 바람, 그러나 메마른 공기. 찬기 섞인 북풍은 칼날처럼 벼려져 모험가의 뺨을 할퀸다. 어느샌가 벗어 던진 신발 속에서 드러난 맨발이 디딘 뭍은 얼어 있고, 발가락 사이사이에서 까끌까끌한 모래는 마치 사포로 만든 신발을 신은 것만 같다는 착각을 선사한다. 얇은 옷을 파고드는 냉기와 손끝에 튀기는 물방울, 그렇게 차츰 붉어지는 피부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모험가는 생각한다. 일단 이곳은 춥다. 춥고, 크고, 외롭다. 그런 바다다.
소리 없이 몰려든 뭉게구름이 빛살을 가린다. 반투명하게 진 그림자가 모험가를 야금야금 갉아먹던 순간, 콧잔등에 최초의 눈송이가 나앉은 때에, 모험가는 고개를 든다. 예고 없던 싸락눈이다. 말간 눈두덩이에 얹혔다가 온기에 녹아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알갱이를 손으로 훔치며, 발등에 닿은 서리 조각에 발가락을 꿈지럭거리며, 모험가는 자신이 정의했던 단어 서넛에 새로운 깨달음을 추가한다. 춥고, 크고, 외롭고, 눈이 내리는 바다.
겨울인가 보다.
그다지 좋아하는 계절은 아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모험가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뾰족하게 솟은 귀와 드러난 어깨, 손끝, 발등에 나붓이 쌓이는 눈을 헤치면서. 어느 순간부터 모험가는 제 뒤를 따르는, 모험가와 발을 맞추는, 그러나 제 것은 아닌 발소리를 듣는다. 철갑이 부딪치며 내는 달그락거림과 갑주를 두른 발이 찍는 자국이 있다. 숙련된 전사라면 소리에서 무게를, 무게에서 상대방을 유추해 내기를 어렵지 않게 해낸다는 사실을 모험가는 알고 있다. 불행히도, 혹은 다행히도, 모험가는 숙련되었다. 전사라는 이름에 걸맞을 만큼은 영웅이다.
따라서 모험가는 돌아보지 않는다. 멈춰 서지도 않는다. 모험가는 묵묵히, 다소 신경질적으로 느껴질 몸짓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곡선이 진 발자취가 점차 들이치는 수면에 가까워진다. 맨발 위로 차게 얼어붙은 모래와 파도, 눈송이가 뒤섞일 때 모험가는 이곳에 떨어진 이래 처음으로 목소리를 듣는다.
“기억합니까?”
모험가는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멈춰 선다. 발등을 반쯤 덮는 물살을 지그시 내려다본다. 그 역시 멈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다가오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배려라는 사실을 모험가는 알고, 또한 그 상냥함에 욕지기를 느낀다. 질끈 주먹을 쥐었을 때 그는, 상대는, 프레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림자는 다시 한번 묻는다.
“이전에 당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합니까?”
“중요해?”
모험가가 되묻는다. 단어라기보다는 서리에 가깝다. 그만한 냉기가 어렸다. 프레이는 잠시간 대답하지 않는다. 모험가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프레이가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 망설이고 있다는 자각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지나치게 단순해 마치 자기 성찰과 닮아 있으므로 그는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기로 한다.
잠시 후 프레이가 말한다.
“당신이…….”
“…….”
“……살고자 한다면.”
알 수 없는 대답이다. 모험가가 입술을 짓씹는다. 이러한 모호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가는 날 선 바람, 코로 밀려 들어오는 벅찬 해풍에 그는 잠시 두어 걸음 비틀거린다. 그러다가 마침내 몸을 돌린다. 프레이를 바라본다. 투구 쓴 얼굴 속에서 모험가는 어둡게 빛나는 눈을 보고, 똑바로 마주하고, 입을 벌렸다가, 이내 다시 다문다.
어리석은 답이라고 모험가는 생각한다. 하지만 씨앗은 뿌려졌다. 단단하게 언 대지에서도 그것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 뿌리 뽑지 못한 의문에서 비롯된 질문을 모험가는 되뇐다. 무엇을 하고 있었지? 이전, 그러니까 과거라고 불리는 기억이 모호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때다. 모험가는 찰나에 얼어붙고, 이를 데 없는 당혹감을 느꼈다가, 자신을 향한 지긋하고 검은 응시를 자각하며 몸을 흠칫 떤다. 그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다. 들키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드러내지 않는다.
잠시 후 프레이는 작게 한숨을 쉰다. 고개를 틀어 모험가가 아닌 바다를, 길게 펼쳐진 감청빛을, 그 너머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느리게 말한다.
“좀 걷는 게 좋겠군.”
프레이는 모험가를 제치고 나아간다. 동떨어질 수 없다는 오기로 모험가 또한 다시 걸음을 뗀다.
바람이, 언 겨울바람이, 한랭한 북풍이 그들에게 매서운 갈퀴를 디밀며 쇄도한다. 양손 검으로는 막을 수 없는 종류의 공격에 자신을 고스란히 내보인 채로 모험가는 비틀거린다. 나약해졌다고, 그는 무심코 중얼거린다. 이상한 장소다. 이곳은. 영웅은 유약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능력, 고결성, 힘을 드러내기 위해서 영웅은 무엇보다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모험가는 맞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걸음을 물리는 존재다. 이토록 보잘것없는 육신을 내려다보며 모험가가 질문한다. 단련을 게을리했던가, 근래에.
“아니요.”
대답은 프레이에게서 돌아온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감에 입술을 깨무는데 프레이가 말을 잇는다.
“어리석은 생각은 말아.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그것에만 집중하세요.”
“…….”
“잡념에 발목 잡혀서는 안 됩니다.”
투구를 장식한 천이 바람에 휘날린다. 프레이는 모험가를 내려다본다. 모험가는 입술을 깨문 채로 프레이를 똑바로 노려보다가 입을 연다.
“나를 가르치려 들지 마.”
“그렇게 생각했다면 유감이군요.”
프레이는 입을 다물고 몸을 돌린다. 그들은 발을 맞추지 않고 다시, 오래도록 걷기 시작한다.
뒤따르지 않으며 모험가는 손끝을 저리게 하는 추위를 더듬는다. 언젠가 이러한 냉기를 느낀 적 있다. 그때 모험가는 지금보다 어렸고 순진했다. 더 최근에도 이 비슷한, 손끝에서부터 퍼진 서리가 심장을 휘덮는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때에도 모험가는 누워 있었다.
그는 기억한다. 어둡고 끝이 보이지 않던 광막한 지평선 언저리에서 자그마한 빛이 틔었다. 검붉은 햇살이 추락했던가, 아니면 비상했던가? 멀지 않은 곳에서 식어가던 지긋지긋한 존재, 더욱이 가까운 곳에 내리꽂힌 커다란 낫, 끝까지 놓지 않아 손끝에 걸려 있던 양손 검. 그 모든 것을 모험가는 가로누운 채로 보았다. 뺨에서 올라오는 찬기에 몸을 떨면서, 내쉬는 숨이 하얗게 피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모험가는 분명히…….
“당신.”
프레이가 모험가를 부른다. 어느샌가 바다는 그들의 발목 언저리에서 찰랑인다. 언제 이렇게까지 들어왔지. 감청색 바닷물에 잠긴 발가락을 꾸물거릴 때다. 프레이는 여느 때처럼 높낮이 없는, 그러나 조금쯤 조급한 것 같은 목소리로 묻는다.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
“여기는 어딥니까?”
모험가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프레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완전히 튼다. 모험가를 마주한다. 투구 안에서 빛나는 시선은 차갑게 부는 해풍보다도 날카롭다.
“좋습니다. 대답하기 싫다면 질문을 바꾸겠어.”
울렁이는 너울이 우뚝 솟은 그들을 거칠게 밀치고 지나칠 때, 프레이는 파도보다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영웅에게 끝이란 무엇이지?”
“그게 네게 중요해?”
적개심보다도 몰이해가 한발 빠르다. 신경질적으로 질문하자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를 들어 바닷새 하나 없는, 짙은 먹구름이 진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며 말한다.
“당신의 일이라면.”
“…….”
“대답에 따라 나는 선택할 겁니다.”
메마른 냉기가 폐부를 쑤신다. 갑작스러운 건조함에 모험가는 짧게 기침한다. 물가에 서 있는데도 목이 갈라질 수가 있다니, 희한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모험가는 불현듯 가슴께를 짚는다. 쓸려갔다가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속도, 같은 박자로 심장이 박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에 모험가는 지나치게 감각이 발달한 존재다.
이질감을 느낀다. 이곳은 낯설다.
프레이가 무언가를 예비하고 있다는 것을, 겹겹이 쌓인 투구 속에서도 모험가는 느낄 수 있다. 입술을 깨문다. 말은 목구멍에 걸린다. 해묵은 이야기다. 끝, 그러니까 마무리, 어떠한 일의 온점. 혀를 구부려 발음한다. 소리는 내지 않는다.
이브 릴리안은 죽음을 갈망한다.
모험가는, 예상치 못한 때에 뺨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전율하며 화들짝 놀란다. 급작스러운 추위가 닥친다. 몸을 웅크리고 팔을 쓸어내리지만 사방에서 내리꽂히는 서리 핀 창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를 데 없는 당혹감에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또한 바다가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한층 거칠어진 파도가 그의 발목을 넘어 종아리, 허벅지께까지 차오른다. 변화는 갑작스럽다. 뒤따라갈 수 없다. 이를 악물고 모험가는 프레이를 본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다. 아득히 먼 곳에서 그를 부르는 것만 같은…….
“무슨 끝?”
모험가가 이를 짓씹으며 묻는다. 해수는 얼음물이라는 표현이 딱 알맞을 만큼 차갑다. 이제 다리에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매서운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 프레이에게 가까워진다. 해수면에 맞닿아 마디가 벌게진 손으로 질끈 멱살을 쥔다. 가까워진, 거의 맞닿은 투구의 첨탑 같은 장식에서 냉기가 전해진다. 보호구가 감싼 얼굴의 외피, 그 여리고 부드러울 피부와 지긋한 시선을 상상하며 모험가가 이를 악문다. 기실 프레이의 투구를 장식한 얇은 천은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에도 날숨에도. 몸을 할퀴는 해풍에 입술을 떨며 모험가는 시선으로써 답을 요구하고, 프레이는 묵묵히 그에 응한다.
“죽음.”
“…….”
“여전히 죽고 싶습니까?”
바로 그때, 모험가는 떠올린다. 깨달음은 그의 척추를 타고 흐르는 살얼음 같은 추위처럼 맹렬하게 찾아온다.
영웅의 목숨은 우주라는 벼랑 끝에 위태로이 걸려 있다.
목숨을 건 싸움, 기나길었던 혈투의 종착이 가로누운 모험가와 함께 있었다. 썩어 문드러진 피로가 모험가의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누를 때 그는 자신을 부르는 깊은 물살의 손짓을 거부하지 않았다. 여명과 함께 모험가는 눈을 감았다. 깊은 잠이 모험가의 새로운 여로에 발을 맞추었으며 그렇게 그는 오랜 숙적을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거듭났다. 비단 사람에 국한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서사시에서 가장 큰 적은 다름 아닌 시련 앞에서 쇠약해지곤 하는 영웅의 나약한 마음 그 자체였으므로.
우짖는 바닷새 하나 존재하지 않는 이곳이야말로 종점이다.
멈춰 서고 싶다고, 영웅이었던 모험가는 생각했다.
입밖으로 내지 않은 생각임에도 프레이는 고개를 떨궜다. 그는 잠시간 숨을 참았다가 길고 가늘게 몰아 내쉬었다. 그건 마치 한숨과 같은 형태였다. 모험가는 주먹을 질끈 쥐고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종아리에서 흔들리던 물이 차올라 허벅지를 적셨다. 모험가는 시시각각 잠기고 있었고 그 사실이 형용할 수 없이 불쾌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뛰쳐나갈 수도 없었다. 그의 앞을 프레이가 가로막고 있었으므로. 안식을 향한 길을 짙은 그림자가 휘덮고 있었으므로.
모험가가 입술을 질끈 짓씹었다. 뭘 원하는 거야, 하고 날카롭게 벼린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프레이는 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떠한 결심, 이를테면 불분명한 결의 같은 것이 어둡게 가린 눈 속에서 차오르고 있었다. 모험가는 물러나는 대신 한 발 내디뎠다. 여전히 멱살을 틀어쥔 채로 프레이에게 밀착했다. 맨 이마에 투구의 금속 장식이 눌렸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비켜.”
일갈하자 프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금빛으로 빛나는 눈이 모험가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다가 프레이는 손을 뻗었고, 모험가의 허리를 감쌌으며, 모험가를 끌어당기는 것과 동시에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굳건한 포옹과 냉랭한 품이 모험가를 조심스럽게 받쳤다. 날카로운 갑주가 옷자락을 뚫고 살을 파고들었음에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 모험가는 들었다.
“미안합니다.”
“…….”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어.”
어째서, 하고 물을 새도 없었다.
세상이 기울었다. 우악스러운 힘이 모험가를 주저앉혔다. 허벅지까지 차올랐던 시리고 짠 바닷물 속으로 모험가가 쓰러졌다. 자신을 단단히 껴안은 프레이와 함께 침몰했다. 뼛속까지 얼어붙는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체감할 무렵 모험가는 불현듯 깨달았다.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직전까지 서 있던 지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끝도 없는 심해가 있었다. 무언의 직감에 따라 모험가는 수면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모험가를 단단히 붙든 인력, 마치 그를 놓아줄 수 없다고 외치는 것 같은 손아귀가 모험가를 잡았다.
모험가는 숨을 참았다. 눈을 감았다.
피부에 와닿는 소름 끼치도록 생생한 공기에 밭은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을 때. 모험가는 가로누워 있었고, 그곳은 라그나로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