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내가 둘이 남았다.
B,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불리는 남자가 생각했다. 부드러운 북풍이 분다. 분위기와 걸맞지 않은,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어울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바람이다. 바람결에 풀잎이 스친다. 누군가의 기척처럼 느껴지는 부스럭거림에 B는 버릇처럼, 오래도록 갈고닦은 것만 같은 몸짓으로, 등을 돌린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면서 그는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B. 나이는 삼십일 세. 국적은 러시아. 키는 백칠십팔 센티미터. 직업은, 번역가였던가? 통역사였던가? 음, 그런 게 중요하던가. 그에게 이런 행위는 일종의 유희다. 구태여 지금이 아니더라도.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그렇게 되었다. 이미 아는 사실을 거듭 곱씹으며, 의문을 가지며, 그렇게 하려고 애까지 써가며, 그는 다시 움직인다. 몸을 반쯤 틀었을 때 우악스러운 손길이 튀어나온다. 멱살이 잡혔다. 놀라지 않는다.
눈에 익은 빛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거친 움직임 탓에 넥타이가 흔들린 까닭이다. 목덜미를 위협하는 냉기에 그가 두 손을 든다. 백기, 저항하지 않음, 적어도 그런 류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며, 그러나 딱히 노력하지는 않으며, 설렁설렁하게. 상대가 눈을 찌푸린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모양새로 얼핏 미간을 찡그렸다가 곧 돌아온다. 웃음을 띤 낯으로 B를 응시한다.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명확하게 그의 눈을 바라본다.
B는 눈을 굴려 제 목젖에 닿은 칼날을 내려다보았다. 매섭게 날이 서 있다. 기실 저 정도로 바짝 날을 세운 칼이라면 힘을 들일 것도 없다. 날카롭고 매서울수록 손잡이를 쥔 사람은 애쓰지 않아도 된다. 느슨한 손길로 자루를 꼬나쥐고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저런 여리고 나약한 것들은 손쉽게 잘린다. 잘린 단면 또한 깨끗하다. B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이런저런 여리고 나약한 것들을 봐 왔지. 이를테면 사람의 피부, 나뭇잎, 동물 가죽, 천, 그리고, 음. 누군가의 마음?
멱살을 잡은 상대의 손을 툭툭 친다.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싸움에 응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 웃는다. 여유롭게, 아주 느긋하게, 마치 제 목에 들이댄 것이 날 세운 칼이 아닌 꽃다발이라는 것처럼. 그러자 상대가 웃는다. 그 또한 마찬가지다. B의 목에 가져다댄 것이 벼린 단도가 아니라는 양. 그들은 잠시 미소를 나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B다.
“이거 치워 줄 생각은 없는 거죠, A 씨?”
“있을 리가요.”
A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B도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그는 태연하게 날을 손으로 툭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아쉽네요. 차 한 잔 하고 싶었는데.”
“취향이 참 특이하시네요.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B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A의 미간에 미묘한 주름이 나타나지만 순간이다. 곧 얼굴을 편 A가 B를 바라보았다. 손아귀에 셔츠가 말려든다. 남자가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는 몸을 조금 더 굳힌다. 검고 불투명한 선글라스 너머에서 언뜻 비치는 눈이 평온하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고 A는 무심코 생각한다. 선글라스만큼이나 불투명한 사람이다. 언제 어떻게 무엇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 경계해야 한다. 이전보다도 더더욱. 이유는 자명하다.
당신과 내가 둘이 남았으니까.
실험이라고 불리는 지긋지긋한 게임의 클라이막스다. 일대일로 남은 실험체, 혹은 참가자들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눈다. 이기기 위해, 승리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죽이며 달성한 위업이다. 이제 한 발짝이다. 단 한 사람, 딱 한 발짝이 남았다. A가 B를 빠르게 훑었다. 그를 안다. 단순히 아는 것보다도 심도 있고 지리멸렬한 관계지만, 안다는 것 이상의 단어로 정의하고 싶지 않으므로 A는 단정 짓는다. A는 최후의 생존자 중 하나인 B를 안다.
이름, B. 나이는 서른하나. 국적은 러시아며 직업은 번역가. 키는 자신보다 조금, 아주 미세하게 작다. 기껏해야 이삼 센티미터를 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밀리미터 단위일 수도 있고. A의 눈이 가늘어진다. 제게 멱살을 잡힌 B는 여상같다. 죽음이 목전인 사람답지 않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목에 칼을 디밀어도 태연자약한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희한하다.
살아남기 위해 A는 제가 가진 것을 매섭게 갈아냈다. 섬에 존재하는 모든 걸 숫돌로써 사용했다. 칼이나 주먹 같은 무기는 단초에 불과하다. 가장 열심히, 그리고 수월하게 단련한 건 마음이다. 그는 사람을 숱하게 찌르고 다녔다. 자신이 구하지 못한 심장이라고 생각하면 없던 힘도 났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잃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잃기만 하는 게 어디 있을까. A는 증권사에 종사하며 다양한 지식을 배웠다. 그는 무조건적인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이다. 적어도 손해를 기피할 줄은 안다. 그러므로 그는 확신한다. 잃기만 하지 않았다. 날을 벼리고 칼을 세우는 동안 그는 무언가를 잃고 무언가를 얻었다. 죄책감, 두려움, 공포심, 비굴함 같은 것들. 타인을 향한 자비, 아량, 또는 궁금증 따위를.
상실과 쟁취를 거듭하며 그는 이 자리에 섰다. 망설임은 오래 전 내다버렸으므로 A는 자신이 있다. 제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B의 목을 벨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대신 바라본다. 응시한다. 그렇게 들여다본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 제게 멱살과 함께 목숨줄이 잡힌 남자를. 그러며 생각한다. 눈은 마음의 창구라는 뜻도 있다. 안경과 선글라스에도 공통점이 있다. 단지 당신의 것이 한층 짙고 깊다.
“A 씨.”
B가 입을 열었다. 반투명한 차폐막 너머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다. 그린 듯한 웃음을 지으며 B가 말했다.
“이대로 당신에게 죽기 전에,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멱살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간다. 입만 살았다고 쏘아붙이는 동안에도 그는 몸을 팽팽하게 긴장한다. 단전에서 꿈틀거리는 미약한 흥분과 불안을 잠재우고 평정을 되찾으려 애쓴다. 유려한 말이 오간다. 궤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A는 그에게 발언을 허락한다. 그리고 직후 후회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B에게 휘말렸나, 하는 패배감이 혀 밑에 고인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는다.
B가 움직였다.
A가 몸을 흠칫 굳힌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 뒤따른다. 그가 칼날을 움킨다. 당긴다. 목 위에서 위태롭게 놓였던 칼을 바짝 붙인다. 당황과 황망함이 뒤섞여 A를 강타했다. 무슨 짓이냐고 외치는 순간 B가, 다시, 그 검고 불투명한 선글라스 너머로, 빙그레 웃는다.
잘 벼린 미소다. A는 그제야 깨닫는다.
“저도 제가 제정신이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 미쳐가는 것만 같아서.”
목이 따끔거린다. 손바닥도 욱신거린다. 살갗을 파고든 날 때문임을 안다. 오랫동안 품었던 생각을 내뱉는 동시에 B는 속으로 곱씹는다. 미친 거다. 그런 거다. 언제부터였지? 그건 모른다. 상관없어진 때부터? 제가 보고, 느끼고, 베었던 모든 작고 여린 것을 떠올렸던 때부터? 아니, 아니다. 그보다 더 오래 전이기도, 더욱 현재에 가깝기도 한 순간부터 그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최 어느 순간부터?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부터? 언제부터 생각하고 있었지? 또 동시에, 언제부터 돌이킬 수 없어진 건가?
아직은 임무가 끝나지 않았다고 그는 뇌까린다. 저항하지 않는 건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돌아킬 수 없어지기 전에 그는 행동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잡념에 가까운 생각들이다. 그 자신도 알고 있다. 어쩌면 회피일까. 모르겠다. 움킨 날이 무슨 의미인지. 확실함을 위해서인지, 혹은 도피를 위해서인지. 그는 감정을 숨기고 감추는 데에 능한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태연자약하게 구는 법을 어릴 적부터 배워 왔다. 그래서일까. 지금 제 손바닥을 따끔거리게 하는 매서운 날을 쥔 까닭에 물음표를 적게 되는 이유는.
어려운 질문이군. B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알 수 없었기에 그는 A를 본다. 제게 칼을 겨눈, 아니지, 이 상황이라면 칼을 겨누도록 강요받는 중인 A를 본다. 산들바람에 갈색 머리가 흔들린다. 얼핏 칼날을 내려다본다. 눈이 시리다. 녹음과 빛을 발광하듯 산란하는 날은 당장이라도 B 본인을 베어낼 듯이 빛난다.
B는 그 순간 힘을 들이지 않고 말했다.
“A 씨.”
“…….”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날카롭고 매서울수록 사용자는 애쓰지 않아도 된다. 마찬가지로 바짝 벼려두었을수록 약하고 여린 것들은 손쉽게 잘리지. B는 떠올린다. 그가 보아왔던 약하고 여린 것들의 초상을. 사람의 피부, 근육부터는 조금 힘들고, 뼈는 아주 까다롭지. 나뭇잎, 나뭇가지, 풀잎은 얼마든지 잘리지만 바람, 햇빛, 그늘은 아무래도 힘들고.
그렇다면 마음은? 사랑은?
매서운가? 둔한가? 애써야 하는가? 힘들이지 않아도 되는가? 그 단면은 깔끔할까, 지저분할까?
B의 것은 어떠한가?
대답을 미룬다. A를 본다. 두 개의 차폐막을 지나 가닿는 시선은 불분명하다. 뜸을 들인다. A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직감한다. 무엇을, 하고 그는 자문한다. 그러나 대답을 강구하지는 않는다. 대신 속으로 중얼거린다. 선을 넘었다. 다시 한번.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어느 시점에 한 번 돌이킬 수 없어졌던 것처럼. 이번에도 다시 한번. 얼기설기 직조한 말이라는 나룻배를 타고서 그는 강을 건넜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강, 물가에 발을 담구고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
어쩐지 알 것만 같은 당신. 그리고 당신의 생각들.
A는 B를 생각한다. B의 고백을 헤아린다. 자신에게서 완전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한 계책이지 않을까 의심한다.
하지만 동시에, 눈을 본다. 시선을 마주친다. 오래전 내다버렸던 것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것만 같은 끔찍하고 불쾌한 감각에 몸서리친다. 그러나 피하지 않는다. 허공에서 얽히고설키는 시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빤히 바라본다. 들여다본다. 두 개의 차폐막을 지나서. 마음의 창 위에 겹겹이 쌓인 검고 짙고 반투명한 산들을 넘어서. 깊고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몸을 던지듯이.
망울진 숨이 터져나온다. 깨달음은 느리지만 선연하다. 살의와 함께 의문이 손끝에 맺힌다. 바람이 분다. 머리칼이 흐트러진다. 웃음도 함께 흔들린다. 칼날이 떨린다. 미세한 고동이 느껴진다. 기이하게도 맥박이 전해진다. 제가 얻지 못했던, 그리고 아직도 구하지 못한, 타인의 심장으로부터 비롯된 박자가. 일정하게 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그래서 이상해.
입을 다문다. 웃음을 지운다. 상대를 본다. 눈을 맞춘다. 피하지 않는다. 힘을 준다. 결심한다. 의문을 품는다. 질문한다. 외면한다. 그리고 마침내 내디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