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5천 자, 실제 작업물, 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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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3:44



갖고 싶은 것은 그렇게 생겨난다. 멀리 있을 때, 돌아갈 수 없을 때.


/ 균형 잡힌 식사 中, 안미옥


 




“B, 아직이야?”


A이 크게 외쳤다. 현관문에 기대어 선 그가 몸을 뒤척였다. 마땅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몸을 조금 앞으로 빼고서 소리쳤다. 아직이야? 커진 A의 목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대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A은 신발을 벗었다. 망설임 없이 거실을 지나쳤다. 작은 식탁으로 부엌과의 공간을 나눈 듯한 거실은 불이 꺼진 채였다. 텅 빈 공간 특유의 적요가 손끝에서 아릿거렸다. A은 조금, 아주 조금 조급해진 걸음으로 닫힌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며 다시 물었다.


“B.”


“잠시만…….”


희미한 대답이 방 안에서 새어 나왔다. 그래, 하고 짧게 대답하고서 그는 두어 걸음 물러났다. 어쩌면 대답을 안 한 게 아니라 못 들은 걸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고개를 휘휘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어차피 크게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일들이었다. A이 걸음을 돌렸다. B이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했으니 잠깐 앉아 있을 셈이었다.


오늘은 A이 일을 쉬는 날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시장에 나가기 위해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건 똑같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그걸 지켜보던 B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는 점이었다. 필요한 식자재를 쭉 적어 내려가던 제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서 B이 물었다. 같이 가면 안 돼? 말간 눈이 묘하게 또렷해져서 A을 바라보고 있었다. A은 뜸을 들였다가 수락했고, B은 준비를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금. B의 준비가 평소보다 조금 오래 걸리는 듯했다. A은 식탁 의자에 앉아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닫힌 문 너머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B은 평소에 행동에서 소음이 적었다. 그 때문일까. 넋을 놓은 채로 A은 생각했다. 소리 소문 없는 B의 걸음도 까닭 중 하나겠지. 하지만 또 다른 이유를 안다. 거기까지 생각한 A이 고개를 내저었다.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숙였다. 짚은 이마가 뜨끈했다. 원체 두꺼운 방문이었다. 몇 년 전 A이 큰마음을 먹고 바꿨다. 덕분에 문을 닫아두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안이든 밖이든 다를 건 없었다.


떨리는 숨이 한숨처럼 새어 나왔다. A이 고개를 털었다. 날카로운 눈이 거실로 향했다. 불이 꺼진 거실은 적막과 어둠에 사로잡혀 있었다. A의 그림자는 태조차 나지 않았다. 거실을 바라보는 눈이 언뜻 가늘어졌다. 고요해질수록 어둠은 함께 강해졌다. 거실은 마치 날카로운 칼로 두부를 자른 것처럼 매끈하게, 흔적도 없이 세상과 유리된 것 같았다. 깔끔한 단면에서 곰팡이 포자 같은 적요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것들은 두 눈으로 볼 수도, 향을 맡을 수도 않았지만 확실하게 A에게 달라붙었다. 자각하지도 못한 새 포자를 흡입하면 폐부에서 꽃을 틔워 숨통을 막았다.


A은 이런 적막을 알고 있었다. 무엇을 닮고 무엇과 엮여 있는지를 알았다. 입이 벌어졌다. 무소음의 공간을 깨트려보겠다는 양 한숨이 튀어나왔다. 미약한 날숨이 땅으로 꺼졌다. 아주 잠시였다. 세상은 곧 다시 가라앉았다. 참을 수가 없어서 몸을 일으켰다. 목소리를 높여 B, 하고 부르는 찰나에 문이 열렸다.


“미안해.”


방문 너머에서 B이 걸어 나왔다.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B은 처음 보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밑단을 수수한 레이스로 장식한 원피스는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밋밋하지도 않았다. 곱게 빗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B이 희미하게 웃었다.


“무슨 원피스야? 처음 보는데.”


“아……. 오빠가 지난번에 줬던 용돈으로 샀어. 이번이 처음 입는 거야.”


B이 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그러고는 발갛게 상기된 뺨을 하고서 그에게 물었다.


“잘 어울려?”


A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잘 어울렸다. 원피스와 함께 꾸며 입은 B은 어딜 가나 인기가 많은 숙녀 같았다. A은 제 겉옷을 벗어 B의 어깨에 얹어 주었다. 그리고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가자.”


B이 재킷을 손으로 꾹 쥐는 모습까지 눈에 담은 후에야 A은 고개를 돌렸다.


집에서 시장까지는 거리가 제법 있었다. 낡은 트램을 타고 십오 분, 걸어서 삼십 분 정도의 거리였다. A은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고 B은 집 밖에 나서며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적막함을 두른 채로 만석 트램에 올랐다. 동전을 대강 밀어 넣고 천장에 달린 손잡이를 붙잡았다. 반쯤 지났을 때 자리가 생겼다. A은 B을 자리에 앉혔다. 재킷을 조금 더 꼼꼼히 둘러주고 그 앞에 섰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B의 시선엔 말없이 손을 뻗었다.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선 먹구름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역에서 내렸을 때 A은 눈을 찌푸렸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피부에 습기가 달라붙었다. 내려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기온 탓에 덥고 축축했다. A이 B을 향해 곁눈질했다. 원피스에 재킷까지 껴입은 모습이 눈에 밟혔다. 발맞추어 걷다가 문득 A이 물었다. 재킷 도로 가져갈까. 눈을 깜빡이던 B이 고개를 저었다. 목깃을 그러쥔 손이 제법 고집스러웠다. A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는 짧은 대답을 끝으로 그들은 다시 침묵했다.


도착한 시장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가판대를 길게 내뻗은 상점 주인들은 툴툴거리며 차광막을 치느라 바빴다. 곧 비가 올 것 같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렸다. 거리 중심에서 살짝 비켜선 A이 B을 돌아보았다. 제 뒤에 붙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동생의 존재를 확인하듯 바라보고서 그는 말했다.


“서둘러야겠어. 비가 오면 낭패야.”


B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피스 밑자락을 만지작거리는 낯이 조금 어두웠다. 속눈썹 너머로 내리깐 눈이 언뜻 울렁였다.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뒤 A이 덧붙였다. B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원피스는 빨면 돼.”


원피스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멈췄다.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어렸으므로 A은 지체하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사람이 쏟아지는 시장 거리로 들어섰다.


돈이 남아나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뭐든 신중해야 했다. A은 집에서 적어 온 메모를 꺼냈다. 사야 할 것들을 적어둔 리스트였다. 기본적인 식자재부터 똑 떨어진 생필품들이 적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A은 익숙한 간판을 내건 상점으로 들어갔다. 평소 애용하는 상점이었다. 나름대로 싼 편이지만 물건들은 오래 쓰기에 알맞았다. 상점을 돌아다니던 A의 걸음이 식품 판매대 앞에서 멈췄다. 사야 할 품목에는 소시지도 있었다. 평소에 구매하던 소시지 대신 처음 보는 제품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눈이 가늘어졌다. 제품 뒷면의 영양 정보를 읽으며 그가 물었다.


“B, 뭐가 좋아.”


대답이 없었다. A이 고개를 돌렸다. 제 곁에 있어야 할 B이 없었다. A이 장바구니에 아무 소시지를 욱여넣었다. 가판대에서 등을 완전히 돌리자 B이 보였다. 여동생은 멀지 않은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앞에는 화려하게 웃자란 꽃들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B은 재킷 가장자리를 연신 만지작거리며 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꽃잎들과 B의 고운 머리칼이 불규칙한 박자로 흔들렸다.


꽃은 필요한 물품 품목에 적혀 있지 않았다. A이 가만히 B을 바라보았다. 상점 내부를 잔잔히 도는 바람에 머리칼이 일렁였다. 망설이는 듯하던 B이 손을 뻗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하얀 꽃 하나를 잡고 조심스럽게 뽑았다. 꽃잎 사이로 얼굴이 언뜻 가려졌다. 빈 퍼즐 조각을 맞추는 심정으로 A은 B의 표정을 상상했다. 눈을 감고. 가볍게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켜면 느껴지는 꽃향기에 뺨을 언뜻 붉히는 소리 없는 형상.


곧 A이 발을 뗐다.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이 B에게 향했다. 곁에 선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 B은 반응하지 않았다. 파묻었던 얼굴을 뗀 건 A이 말을 걸고도 조금 지난 후였다.


“무슨 꽃이야?”


B은 잠시 뜸을 들였다. 꽃잎 사이에서 얼굴이 드러났다. 내리깐 눈동자에 하얀 꽃이 비쳤다. B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잠잠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어.”


“…….”


“그런데 향이 좋아.”


A은 말없이 꽃을 내려다보았다. 잎 자락이 인사를 건네듯이 흔들렸다. 발갛게 얼굴을 붉힌 B과 그가 쥔 꽃이 제법 어울린다고 A은 문득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 B은 신문지로 감싼 꽃을 소중하게 껴안고 있었다. 그들은 왔던 길을 고스란히 돌아갔다. 역까지 걸어가고서 트램을 탔다. 이번에도 만석이었다. 그들이 내리는 역사에 도착하기 오 분쯤 전에 자리가 났다. 역시나 B을 앉혔다. 내릴 때까지 A은 그 앞에 서 있었다. 말 한 점 없이 꽃과 B을 내려다보았다.


역에서 내렸을 때 뺨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A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꺾어 들었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이제는 까맣게 보일 지경이었다. A이 손을 뻗었다. B의 손목을 약하게 움켰다. 그를 인도하듯이 당기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서둘러. B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습기를 머금은 흙바닥은 질척해져 있었다. 진흙과 비슷해진 땅을 내려다보며 A은 B의 원피스 밑단을 상상했다. 진흙이 묻어 얼룩덜룩해졌을 하얀 원피스. 힘을 주어서 문지르지 않으면 검은 얼룩이 남을.


소나기가 쏟아지기 직전 그들은 현관문을 닫았다. 쿵 소리와 함께 주위가 싸늘해졌다. 의미 없는 오한에 주먹을 한번 쥐었다가 편 A이 움직였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부엌으로 향했다. 사 온 식자재들을 식탁에 올려두고서 고개를 돌렸다. 원피스를 벗어두라는 말이 혀끝에서 튀어 나가기 직전이었다. A은 그때 보았다. 뽀얀 원피스 밑단은 여전히 깨끗했다. 습기를 머금은 탓에 조금 축축 늘어진 채였지만 흙탕물이 묻지는 않았다. 그나마 튄 몇 방울은 세제를 묻혀 문지르면 말끔히 사라질 정도였다.


“오빠?”


B이 그를 불렀다. A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B의 말간 눈이 A을 꿰뚫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A은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식자재를 정리하려는 것처럼 몸을 완전히 돌렸다. B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B의 시선에 등이 아닌 심장이 따끔거렸다. 얼굴을 읽히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A이 말했다.


“먼저 씻어.”


조금 뒤 B이 대답했다.


“응.”


B이 화장실로 떠났다. 문이 닫히자마자 A이 억눌린 숨을 푹 쉬었다. 한숨과 비슷한 형태로 그것은 튀어나왔다. 식탁 위를 어지럽게 수놓은 식자재들을 무시하고 의자에 느리게 앉았다. 시선이 화장실로 향했다. 문이 닫혀 있었다. 떠나기 직전, 방문이 닫혀 있었던 것과 같이.


적막했다.


고개가 떨어졌다. 식탁 가장자리에 자리한 꽃이 보였다. 손을 뻗었다. 손끝으로 꽃잎을 툭 쳤다. 감각점 끝에 닿는 질기고 물 먹은 듯한 기묘한 느낌이 있었다. A이 질끈 주먹을 쥐었다. 시선이 거실로 향했다. 여전히 단절된 채 어둡게 물들어 가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이런 고요함을 알았다. 아버지,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그렇게 불릴 작자가 죽어 나자빠졌을 때. 퇴근하고 돌아온 A이 맞이한 건 이 같은 적막에 침잠한 집안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차가운 적요가 울컥울컥 새어 나오고 있었다. 거실로부터, A에게로.


근래 A은 때때로 집에 혼자 남은 자신을 상상했다. 짝을 찾아 떠난 B을 상상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서 꽃비를 맞는 B을. 상상 속 B은 꽃잎에 얼굴이 가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B의 상대는 애지중지 키운 여동생에게 걸맞은 사랑을, 풍족함을 아낌없이 줄 수 있다는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고…….


그때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A은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두꺼운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뭉개져 거의 알아듣기 힘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얼마 후 자리에서 일어나 식자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