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3천 자, 실제 작업물, 판도라하츠 기반 드림
1
lemb 2026.06.04.  13:49



나는 지나가려고 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진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복이 우리를 자라게 할 수 있을까


진심을 들킬까 봐 겁을 내면서


/ 안미옥, 한 사람이 있는 정오 中




*




소나기가 장막처럼 거리를 감쌌다. 냉랭하게까지 느껴지는 습기가 뺨에 얇고 빈틈없이 스미고 있었다.


우산이 채 막지 못한 물방울들을 갑옷처럼 두른 채 A가 걷고 있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폭포 같은 빗소리에 발소리가 묻혔다. 바닥을 포장한 울퉁불퉁한 돌들에 발굽이 부딪힐 때마다 물방울 튀기는 소리가 났다. 하늘을 가린 먹구름은 밤과 긴밀하게 얽혀 이제는 두 가지를 떼어놓을 수 없었다. 사방이 깜깜했다. 사람 없는 골목 모퉁이를 꺾어 돌며 A는 생각했다. 주위가 조용해서 다행이다. 생각을 정리하기엔 그만 한 조건이 없었다.


문을 닫은 상점가를 지났다. 사람 없는 공원도 지났다. 복잡한 시내를 거침없이 주파하는 그의 앞에 가파른 언덕이 나타났다. 걸음이 잠시 멈췄다. 비에 젖어 반질거리는 구둣발을 내려다보던 그가 다시 발을 뗐다. 고르지 않은 돌길은 미끄러웠다. 언덕을 반쯤 올랐을 무렵 A는 다시 멈췄다. 이번에 그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지 않았다. 그는 앞을 보았다. 누군가가 서 있었다. 저 자신까지 새까만 근방에서 거진 유일한 색채처럼 보이는 인영이었다. 깊이 눌러 쓴 우산 아래에서 민트색 머리칼이 언뜻 바람에 일렁였다.


잠시 멈췄던 A는 다시, 이번에도 걷기 시작했다. 상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시선의 눈높이가 거의 비슷해질 때까지. 그의 곁에서 A는 다시 한번 멈췄다. 대화는 없었다. 상대는 거리를 좁히지도, 입을 열지도 않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A는 상대의 말이 빗소리에 묻힐까 염려하고 있었으나 그 또한 움직이지 않았다. 우산 살이 부딪혀 물이 튈까 걱정이었다. 우산 끝과 끝이 스치듯 맞닿았다.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상대가 먼저 걸음을 뗐다. A도 함께 움직였다.


“오즈 도련님이 돌아오셨다면서요?”


평지에 가닿았을 무렵 상대가 말했다. 동요를 찾아보기 힘든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A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말마따나 오즈가 돌아온 이후 그는 엇비슷한 질문들을 수없이 받았다. 물음의 목적은 각각 달랐으나 때때로 악의는 그러한 물음표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A가 상대를 힐끔 곁눈질했다. 우산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거라곤 드러났다가 사라지기를 거듭하는 입술뿐이었다. 대답하지 않자 상대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도 질문이었다.


“어떻게 할 셈이에요? 돌아가실 건가요?”


“그래야지. 그를 지켜야 하니까.”


“그렇네요. 하긴, A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겠죠.”


태평하게까지 느껴지는 대꾸였다. 목소리가 가벼워 빗소리에 묻힐 것만 같았다. A의 눈이 언뜻 가늘어졌다. 우산을 반대쪽 어깨에 기대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시야에 창백한 뺨이 언뜻 비치다가 가려졌다.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엷은 한숨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 사이로 녹아들었다. 대화가 다시 단절되었다. 소나기는 잠시 피어올랐던 대화의 열기를 식히기에 충분했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와 함께 찬기가 전해졌다. 우산 손잡이를 쥔 손도 붉게 얼어가고 있었다. 다물린 입 두 개에서 입김이 번갈아 피어올랐다. 모퉁이를 두어 개 꺾었을 때 A는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상대가 원래 이렇게까지 말이 없던 존재였느냐 묻는다면 A는 부정할 셈이었다. A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찰박이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엇박자로 돌길에 부딪히는 기척이 분명히 존재했다. 제 곁에 선 친구가 제 착각이나 헛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럼, 한동안 이별이겠네요.”


딱 소리를 내며 그가 멈췄다. A도 함께 멈췄다. 그가 반걸음 앞서 있었기에 비로소 우산에 가렸던 얼굴이 보였다. 여상처럼 짓궂은 미소를 띤 보라색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구부러진 시선을 마주하며 A는 문득 질문했다. 계속 보고 있었을까? 아니라면, 언제부터?


잘 연마한 미소를 지은 채 상대, B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강 배웅하러 온 걸로 치자는 능청스러운 말에 A가 미간을 찌푸렸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시감이 목구멍에서 일렁였다. B의 의뭉스러운 태도가 오늘따라 유달리 크게 다가왔다. A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연 순간이었다. B가 우산을 눌러썼다. 도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세찬 빗소리 사이로 희미한 노랫소리가 뒤섞였다.


“피 냄새가 나지 않아요?”


얼마 후 B가 물었다. 여전히 눈을 찌푸린 채 A는 제 소맷자락을 코에 가져다 댔다. 물비린내가 났다. 소나기 특유의 싸늘한 한기가 소매에 빗물과 함께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A가 대답했다.


“아니.”


“다시 한번 잘 맡아봐요.”


“B, 너…….”


“피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알면서. 원래 어떤 것들은 단순히 물로 씻기지 않는 법이잖아요?”


A가 멈췄다. B는 두어 걸음 앞서가고 나서야 멈췄다. 두 갈래 길이었다. 제가 멈췄기 때문이 아닌 갈래 길을 마주쳐 멈춘 것 같았다. B는 등을 돌린 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발을 떼는 대신 몸을 반쯤 돌렸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우산 너머에서 얼굴 반쪽이 싱긋 웃어 보였다. 우산 손잡이를 쥔 A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충동적으로 그가 움직였다. 한 걸음 내디뎠다. 구둣발이 돌길 위에서 딱 소리를 냈다.


우산과 우산이 부딪쳤다. 가벼운 저항감과 함께 밀려났다. 곧 웃음이 터졌다.


“가는 길에 무서우면 불러요, A.”


잠시 후 A는 움직였다. 앞서 있던 B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조금 나아가다 말고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매섭게 떨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한 인영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 물안개인지 정말로 B인지 알 수 없었다.


약간의 뜸을 두고서 A가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는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