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군.”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A가 고개를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낯익은 인영이 서 있었다. 구부정하게 굽혔던 허리를 바짝 펴며 A가 손을 흔들었다. 짧은 뜸을 두고서 상대가 움직였다. 신발 아래로 쌓인 눈이 밟히는 소리가 고요한 낮을 채웠다.
함박눈이 멎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낮이었다. 해는 뿌옜고 기온은 낮았다. A는 손질용 기름과 천, 무기와 함께 마루에 앉아 있었다. 주기적으로 가지는 손질 시간이었다. 총은 검보다 투박한 인상을 가졌으나 손질의 까다로움으로 따지자면 뒤지지 않았다. 몸체와 부품을 문질러 닦는 행위는 상당한 집중을 요구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상대방을 기다리며 A가 총을 내려놓았다. 새삼스럽다는 듯 그가 주위를 한번 훑었다. 마루에 막 나왔을 때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언제 멎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힐끔 곁눈질한 하늘엔 여전히 먹구름이 끼어 있었기에 A는 이것이 찰나의 공백임을 알았다.
다가온 상대가 부드럽게 웃었다. 얇은 옷을 겹겹이 껴입은 듯 행동이 어딘가 둔했다. 앉아도 되느냐고 묻는 목소리에 A는 순순히 자리를 내주었다. 거기에 앉으면 발 시렵잖여, 하며 조금 더 물러났다. 마루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았던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지는 잔웃음과 함께 그가 마루 안으로 훌쩍 들어섰다.
A는 제 앞에 앉은 남자, 사카모토 B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B 뒤로 펼쳐진 정경은 온통 눈에 뒤덮인 흰빛이었다. 하얗고 하얬다. 하얀 머리칼과 쌓인 눈의 경계가 언뜻 흐려졌다. A의 눈이 가늘어지는 찰나에 바람이 불었다. 한기를 머금은 칼바람이었다. B가 몸을 움츠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A가 바짝 다가가 앉았다. 눈이 마주쳤다. 눈을 끔뻑이며 A가 말했다.
“춥잖여. 바람이 차.”
같은 박자로 눈을 깜빡인 B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 무언가가 걸려 있었다. 마찬가지로 눈을 돌린 A가 아, 하고 탄성을 냈다. 손질하느라 반쯤 분리해 둔 총과 헝겊이었다. 손을 뻗어 그것들을 한꺼번에 끌고 왔다. 헝겊으로 부품을 박박 문지르자 B가 물었다.
“손질합니까?”
“뭐, 그렇지. 눈을 맞으면 쉽게 녹슬잖여. 시간이 날 때 미리미리 해둬야 혀.”
잠시 뜸을 들인 B가 다시 질문했다.
“만져봐도 될까요?”
A의 손이 멈췄다. 둥그레진 눈이 B에게 향했다. B는 총을 바라보고 있었다. A의 시선이 다시 제 손바닥에 놓인 무기로 떨어졌다. 비단 도검남사가 아니더라도 무기를 다루는 모든 이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쓰는 무기를 남에게 넘기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따지자면 A도 개중 하나였다. 손잡이를 묶은 끈, 장식한 술의 무게 같은 사소한 것이 승패를 가르기도 했다. 싸우다 보면 여상 같은 상태에 집착하게 됐다. 평소와 같은 몸 상태, 알맞게 손질된 무기와 다를 것 없는 대화 같은.
B도 알 터였다. 그 자신도 전사가 아닌가. A의 고개가 기우뚱 기울었다. 싫다는 건 아닌데, 뭐랄까. 조금 놀라웠다. 게다가 의문스럽기도 했다. B의 손에 들리는 총이라는 건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눈을 끔뻑이는 A를 향해 B가 한 번 더 물었다. 안 될까요, 하는 질문에 A가 퍼뜩 상념에서 헤어 나왔다. 마지막으로 손잡이를 벅벅 문질러 지문을 닦은 그가 총을 건넸다.
“안 될 건 없지. 그냥 놀라서 그려.”
총을 집어 가는 B의 손을 내려다보며 A가 말을 마쳤다.
“선생이 총에 관심 있는 줄 몰랐어.”
B가 짧게 웃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A는 흥미로운 눈으로 B의 손바닥에 올라간 총을 바라보았다. 한 몸처럼 익숙한 물건이 B에게 가자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겨울의 볕을 받아 시리게 빛나는 몸체를 긴 손가락이 만지작거렸다. 따스한 체온 덕분에 몸체 곳곳에 손자국이 남았다. 성에처럼 번지는 흔적들을 내려다보던 A가 고개를 들었다. B를 보았다.
내리깐 눈, 속눈썹 아래에 반쯤 가려진 청명한 눈동자에 총이 비쳤다. 검은 몸체가 마치 기다란 동공처럼 일렁였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처마에 쌓인 눈이 철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A는 불현듯 깨달았다. 생각하고 있었다, B는. 입이 달싹였다. 여상을 가장하는 전사들과 같은 형상으로 A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물었다.
“무슨 생각혀?”
“별건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하고 있었어요.”
“뭐를?”
“손질이요.”
B가 총을 내려놓았다. 몸체가 마룻바닥과 부딪히며 딱 소리가 났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도로 입을 열었다.
“다행이지 않습니까. 닦으면 닦인다는 게.”
뜻밖의 대답에 A가 눈을 깜빡였다. 손질. 시선은 절로 헝겊과 기름에 향했다. 손자국이 옅게 남은 총을 거치고서 다시 B를 보았다. 담담한 낯이 망막에 맺혔다.
손질이라는 행위는 대상을 최상의 상태로 고정해 두는 데에 그 의의가 있었다. A는 계절마다, 온도와 조도, 습도에 따라서 그 주기를 바꾸었다. 시선이 하얗게 쌓인 눈더미로 향했다. 겨울에 그는 한 달에 두 번씩 총을 손질했다. 눈이 오는 날에는 빠짐없이 부품을 분해해 닦았다. 겨울은 건조함 덕분에 여름만큼 자주 손질하지 않아도 되지만, 눈이 오는 날은 달랐다. 총 위에 떨어진 눈은 녹은 채로 고였다. 막 사용한 직후가 아니라면 증발하지도 않았다. 물이 되어 고이고서 그 자리에 흔적을 남겼다.
비단 총뿐이 아니었다. 손질은 일종의 증명이었다. 자신이 전사임을 명시하는 행위였다. 오래 만지지 않은, 오랫동안 손질하지 않은 무기는 녹이 슬었다. 어느 순간 태가 났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에게는 닦이지 않는 흔적이 남는다는 점이겠지.
A는 부러 B를 보지 않았다. 옆구리가 희미하게 욱신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몸에 남는, 서리는, 퍼지는 녹이 사람에게도 있었다. 닦는 대신 덮어둘 수밖에 없는 것.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 지우려면 살점을 통째로 뜯어내야만 하는 것. 편리하게 손질할 수 없는 녹물 같은 것이.
하지만 마냥 남겨둘 수는 없다. 알고 있다.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이곳에 함께 앉아 있다.
조금 뒤 B가 일어났다. A도 덩달아 일어났다. 헝겊과 기름과 총을 챙기고서 소리 없이 B를 뒤따랐다. 하던 일을 마저 해도 된다는 B의 말엔 고개를 저었다. 날이 추워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자 B는 말꼬리를 잡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았을 때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졌다. A는 손을 뻗어 B의 머리를 가렸다. 손등에 닿아 녹은 눈이 B의 어깨로 떨어졌다. 그리고 짙은 빛을 남기며 옷에 스몄다.
희고 희다
우리가 주고받은 것은 대체 무엇일까.
/ 캔들 中, 안미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