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4천 자, 실제 작업물, HL, 집이 없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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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3:52




“같이 연극 보러 갈래?”


A은 대답하는 대신 눈을 깜빡였다. 책상 위에 엎어져 있던 몸이 반쯤 일어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숙덕거리는 소리가 작게, 그러나 선명히 들려왔다. 데이트 어쩌고, 둘이 무슨 사이 저쩌고. 속닥거리는 소리에 목소리의 주인, B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미묘하게 낯이 붉어졌다. 시선이 희미하게 떨렸다. 한참 뜸을 들이고 나서야 A은 B이 자신을, 그러니까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뜻밖의 일이었다. 적어도 A이 받아들이기에는 그랬다. 짧은 한마디에 짚을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첫째. B에게 연극을 보러 갈 만큼의 시간이 있을 줄 몰랐다. 그는 고등학교 삼 학년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고삼을 같은 종족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별개의 항목에 따로 분류했다. A이 보기에도 B을 포함한 삼 학년들은 바빴다. B은 특히나 더. 바라는 것도, 원하는 것도 많은 욕심쟁이들이 달라붙은 덕에 이것저것 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신경 써야 할 것이 공부뿐이 아니기에 그에게 자유 시간이라는 건 거의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딘가 미심쩍은 둘째 구석. 연극. A의 눈이 가늘어졌다. 몸을 완전히 일으키다 못해 의자에 기대듯이 늘어졌다. 맹한 눈을 부러 깜빡이며 B을 보았다. 기다림이 길어지자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기색에서 A은 망설임을 읽었다. 어쩌면 후회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연극이잖아.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연극을 본 것도 제법 오래되었다. B은 제가 연극을 기피하는 까닭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더 의외였다. 왜 하필 연극이지?


A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그리고 짐짓 순수한 낯을 지어냈다. 어렵지는 않았다. 눈이 마주친 B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을 목전에 두고 망설이는 사람처럼 집요한 시선이 A에게 닿았다. 눈을 한번 굴린 A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다. B이 A아, 하고 불렀다. 뒤따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야유인지 응원인지 모를 추임새를 던지는 동급생들을 뒤로하고 A은 반을 나왔다. 복도를 지나가던 얼굴 모를 아이의 인사에 손을 대강 흔들고 나서야 그는 물었다.


“왜?”


“응?”


“아니, 왜 하필 나인가 싶어서. 누나 친구 많지 않아?”


“아.”


B이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딘가 머뭇거리는 듯하던 그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급조한 것처럼 어색한 미소를 띤 채 B이 입을 열었다. 숨죽인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주신 티켓이야.”


의외의 말이었다. A의 고개가 다시 갸웃 기울었다. 그 사람이 어쩐 일이람. 마지막으로 보았던 B의 아버지는 뭐랄까, 제대로 된 성공을 이루지 않으면 죽는 사람처럼 목을 매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다른 때도 아닌 삼 학년, 그것도 학기 중에 연극 티켓을 줬다는 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은 연이 거의 끊겼다 해도 무방한 상황인데도. A이 눈을 굴리자 B의 말이 빨라졌다. 무언가 해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혹은 사뭇 필사적인 사람처럼 작은 목소리가 쏟아졌다.


“국어 독해나 지문 해석에도 도움이 될 거라면서 주셨어. 이런 종류의 취미에도 재미를 붙여보라고도 하셨고. 나도 조금 놀라기는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숨을 돌릴 기회가 될 것 같아서.”


잠시 뜸을 들인 B이 우물쭈물 물었다.


“안 될까?”


A은 고민했다. 다른 말로는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자신이 B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 번, 부탁이 연극과 관련되어 있음에도 그러했다는 점에서 두 번 놀랐다. 놀라움 뒤에는 까끌까끌한, 설명하기 어려운 텁텁한 감정이 뒤따랐다. 혀끝을 아리게 하는 뜻 모를 감각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술렁이는 마음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국어사전 좀 틈틈이 읽어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시 스쳤다. 낱말로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대신 A은 마음을 바꿨다. 최대한 가벼운 목소리로 그는 그러지 뭐, 하고 대답했다. 눈을 한 번 더 굴리고 창밖을 힐끔 곁눈질했다.


이틀 뒤 주말에 A은 문화회관 대극장 앞에 서 있었다. 넓게 펼쳐진 공터에 드문드문 박힌 가로등에는 전부 똑같은 홍보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극장 정문 앞에 우두커니 선 채로 A은 깃발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버스 배차 간격을 착각해 십 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붕 뜬 시간을 메꾸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그는 홀로 생각했다. A의 생각을 옹호하기라도 하듯 때에 맞춘 바람이 불었다. 뺨을 부드럽게 쓸리는 것과 동시에 깃발이 몸을 떨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66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창작극이라고 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 깃발에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아래는 주인공의 서사를 관통하는 듯한 대사가 적혀 있었다. 바람에 맞추어 흔들리고 있는 탓에 정확히 읽히지는 않았다. A이 눈을 좁혔다. 읽힐 듯 말 듯하게 깃발이 나부꼈다. 눈을 찌푸린 채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것……. 그다음은.


“A아!”


멀지 않은 곳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깃발을 노려보던 A이 고개를 돌렸다. B이었다. 노란 머리칼이 깃발과 꼭 닮은 형태로 흩날렸다. 단숨에 계단을 뛰어 올라온 B이 A 앞에서 옆구리를 짚었다. 숨을 몰아쉬는 B의 등을 두어 번 두드리는데 그가 말했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어?”


“응.”


B의 얼굴이 묘하게 하얘졌다. 미안하다는 말이 우물쭈물 뒤따랐다. 어딘가 시무룩해진 것 같은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A이 곧 고개를 저었다. 고개와 함께 몸을 돌렸다. 돌아보지 않고서 A이 말했다.


“됐어. 들어가.”


“앗, 응. 미안.”


대답하는 대신 A이 걸음을 옮겼다. 정문을 열고 발을 옮겼다. 문을 잡아주자 B은 눈을 접으며 고마워, 하고 인사했다.


그들의 자리는 무대와 거의 평행한 구석진 곳이었다. 시간에 맞추어 들어왔기에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B이 자신이 늦게 도착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불이 꺼졌다. 여자 목소리가 기계적으로 안내 문구를 말했다. 연극을 보는 와중엔 스마트폰을 포함한 전자기기를 전부 꺼주시고……. 문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 백열등이 만드는 스포트라이트에 눈이 시렸다. 한 남자가 무대에 올랐다. 부드럽게 허리를 굽힌 그가 목을 작게 가다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굵직한 목소리가 극장을 우렁우렁 울렸다.


“오, 그대, 경외하는 나의 신이시여, 어찌 나를 이리도 고뇌하게 하시나이까!”


A은 연극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생각하는 동시에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고풍스러운 대사는 어딘가 조금씩 엇나가 있었고, 조명은 극적인 연출을 위한다는 핑계로 어딘가 조잡했다. 굵직한 스토리 또한 주제가 납작했다. 알았다. 안목에 못 미치는 극이었다. 그런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커튼이 내려갔을 때 A은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박수 소리에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제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손뼉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찰나였다. 눈동자가 울렁였다. 망막에 제가 비쳤다. 손뼉을 치던 B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극장을 빠져나오자 어두워진 세상이 그들을 반겼다. 정문을 지나쳐 내려가며 B이 중얼거렸다. 재미있었다. 그렇지. A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따라오는 걸음이 없다는 걸 알아챈 B이 등을 돌렸다. 말간 눈이 A에게 향했다. 의식적으로 표정을 지우고서 A은 B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어두운 객석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스치고 지나지 않는다.


A은 불현듯 궁금해졌다. 정말로 아버지가 준 티켓이 맞을까? B의 아버지가 이런 아마추어 연극을 보라고 친히 티켓을 건네줄 작자인가? 한 장도 아니고 두 장을, 그것도 학기 중인 고등학교 삼 학년에게? 목구멍에서 쓴맛이 올라왔다. 혀끝에 남았던 깔깔한 감각과 뒤섞였다. B을 내려다보며 A이 입을 열었다. 묻고자 했다. 하지만 무엇을?


극장에서 스쳤던 시선이 떠올랐다. 인위적인 어둠 안에 잠겨 있던, 그러나 확실하게 그를 바라보던 두 눈동자. 그림자가 술렁이던, 일렁이던, 망막 안에 비친 자신만큼이나 흔들리던. 벌어졌던 입술과 그 끝에 걸려 있는 것만 같던 불분명한 질문을 상상했다. 극장 안, 먹칠을 한 것처럼 새까만 공간에서야 비로소 드러나고 명징해지는, 어떠한 질문.


속이 울렁거렸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들을 감싸안았다. A아, 하고 B이 그를 불렀다. 얼굴이 어둠에 뒤섞여 있었다. 혀뿌리에 한숨이 걸렸다. A이 발을 뗐다. 걸음을 옮겼다. 겪어본 적 없는 생경한 감각이었다. 소용돌이치는 말을 머금고서 A이 걸어갔다. B이 달려왔다. 걸음을 맞췄다. 그를 내려다보며 A은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주연 배우보다 느리고 낮게, 목소리를 긁고 손을 천장에 추어올리며, 처절하게.


오, 그대, 경외하는 나의 신이시여, 어찌 나를 이리도 고뇌하게 하시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