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4천 자, 실제 작업물, FF14 기반 드림, 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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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3:57



충동은 순간이나 결과는 오래 남는다. 그 절대불변의 진리를 새삼스럽게 곱씹으며 칼릭스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앞에 ‘A’가 누워 있었다. 냉랭한 한기가 도는 철제 침대, 짙푸른 조명이 반투명한 뺨을 투과하며 내리쬐는 광경 한가운데에. 마치 운명을 받아들이는 비운의 주인공처럼.


아니, A가 아니다. 그것은 A처럼 온기를 지니는 대신 실체가 없다. 손을 휘젓는 행위만으로도 손쉽게 관통할 수 있다. 능숙하게 감정을 투사하는 법이 없으며 하다못해 눈조차 뜨지 않았다. 희끄무레한 시선으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일도, 제 옆에서 묵묵히 할 일을 마치고 자그마하게 칼릭스, 하고 중얼거리는 일도 없다.


A의 형상을 홀로그램에 띄운 주체자인 칼릭스마저 당혹스럽게 하는 일순의 충동 그 자체였다. 철제 침대 위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누운 ‘A’를 내려다보며 그는 다소간의 당혹스러움이 목구멍에서 일렁이는 것을 느낀다. 그건 제법 오랜만, 이를테면 거의 백여 년 만에 느껴보는 낯선 감각이며 그렇기에 더더욱 난제처럼 다가온다.


심장의 열기를 가진 양 발갛고 희미한 홍조를 띤 채로, 그러나 ‘진짜’ A가 그러하듯 창백한 낯을 모사하고서 그것은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칼릭스는 손을 뻗는다. 각도에 따라 반투명하게 보이는 뺨에 손끝을 가져다 대려는 듯.


잠시간 허공에 머문다. 이윽고 고스란히 거둔다.


거둔 손을 곁눈질하며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벌인 충동적인 행위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 마음에 휘둘리는 일은 진작에 졸업한 줄 알았는데. 자신이 생각보다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사실, 혹은 예상만큼 냉철할 수 없다는 것을 천천히 곱씹으며 칼릭스가 두어 걸음 물러난다. 그러며 ‘A’를 본다.


시뮬런트와 같되 다른 존재다. 저것엔 양분이 없으므로 움직이지 않으니. 모래로 쌓은 허상, 구름으로 빚은 허구, 그러한 감성적인 서술들에 빗댈 만한 어떠한 ‘것’.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섣불리 뺨 한 번 스치지 못하겠는 마음이라는 건. 쇳내가 나는 침대 위에 부피 없이 올라가 누운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리는 존재라는 건. 혹은 그러한 모습을 원하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자연히 무엇인가를 바라게 된다는 것.


음울한 조명이 내리쬐어 일렁이는 눈으로 칼릭스는 ‘A’를 본다. 그는 오랜 계획을 수립하느라 얼마간 낮과 밤을 새웠고, 따라서 더할 나위 없이 피로했으며, 아랫배에서 미세한 잔 요동을 일으키는 누적된 피로가 옛적을 떠올리게 해 불유쾌한 상태였다. 어쩌면 그래서인가. 이런 비상식적이고 불가해한 일을 일으킨 까닭은.


내리깐 눈이 흔들린다.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며 그는 중얼거A. 애초에 난 무엇을 바란 거지. 충동의 기저에는 분명한 욕망이 있기 마련일진대. 자각하지 못하고 살았던 어느 욕구가 피로로 인해 흐려진 이성 사이를 마치 예리한 바늘처럼 꿰뚫고 올라온 것일 텐데. A를 상상한다. 그리고 ‘A’를 본다. 발치에 쌓인 미약한 감정, 자책이나 후회라고 단정할 수 없는 그것들을 즈려밟고 올라선 채로.


닿지 않은 손끝이 저린다.


어째서 A인가.


사백 년을 넘게 이어진 연이다. 단순한 이어짐이라고 서술하기에 그들은 과도히 밀접하고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 그네들의 관계는 마치 불가해한 이유로 너무 오랫동안 진행해 버린 가설 증명 실험과 엇비슷하지 않나, 하고 칼릭스는 추측한다. 처음에는 단순했겠지. 하지만 실험이라는 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난해해지는 법이다. 이것도 저것도 마땅치 않은 순간, 그러나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아집이 그를 사로잡는 찰나에 모든 건 고양이가 제멋대로 가지고 놀던 털실보다도 더한 기하학적인 무늬로 엉망진창 꼬인다.


더없이 화려하게, 그러나 적요하게, 보이지 않는 물밑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화학 반응처럼 그들의 관계도 뒤엉킨 것이 아닌가, 하고 칼릭스는 생각한다. 사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만 그것은 질문의 답이 될 수 없다. 갈피를 찾기 어려운 난해함 속에서 칼릭스는 속절없이 되풀이한다.


어째서 A지.


자신이 무엇을 바랐는지, A의 무엇이 자신으로 하여금 잊고 있던 충동적 기질을 부추기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또한 그보다도 불가해한 것은.


눈 감은 홀로그램을 내려다보며 칼릭스는 묻는다. 너는 나의 가족일까. 연인이라기엔 건조하나 가족이라기엔 뜨거운, 적정 온도를 알 수 없는 거리감을 지닌 채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간격을 두고서 우리가 타오르고 있다는 생각은 저만의 착각일까.


애당초 너는 내게 무슨 의미지.


나는 네게 무슨 의미고?


닿지 못한 손끝에서 이는 분명한 전기 신호를 해독하기에 사백 년 전 박제된 그의 뇌는 과도한 피로에 절어 있다.


결괏값을 도출하기에 그는 아직 이르다고, 아직도 이르다고, 사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이르다고, 칼릭스는 분명하게 느낀다. 온전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면 섣부르게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낫다고 오래 묵은 경험이 경고한다. 손을 뻗는다. 뺨을 지난다. 버튼을 누르면 가만히 눈 감은 채 누워 있던 ‘A’는 조용히, 모래로 쌓은 허상, 구름으로 빚은 허구처럼 조각나 사라진다.


텅 빈 침대만이 남는다. 그 위에 비친다. 어떠한 감정이라고 정의 못할 것에 휩싸인 채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칼릭스가.


짧은 한숨과 함께 뒤를 돈다. 눅진한 피로가 들러붙은 눈가를 손아귀로 지그시 누르며 한 걸음 내디딘다. 잠들거나 먹을 필요도 없는 몸뚱어리가 휴식을 요구하는 우스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 고심하며 고개를 든다.


그리고 마주친다.


A가 그의 앞에 서 있다.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는다. 실험실은 잠시간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다. 뻑뻑한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며 칼릭스는 속으로 어림한다. 언제부터지. 언제부터 있었지. 왜 부르지 않았지. 무엇을 보았고 무슨 생각을 했지? 저 투명하리만치 매끄러운, 무엇인가를 관통하거나 역설하는 하얀 눈동자 속에 맺힌 칼릭스의 군상이 미세하게 일렁인다.


다가온다. A가. 그의 입에서는 심장의 열기를 담은 희미한 숨, 뜨거운 날숨, 홀로그램은 결코 구사하지 못할 산 자의 호흡이 잇새를 타고 새어 나오고…….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목소리는 떨리거나 갈라지지 않고 평소처럼 무심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파르라운 조명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A의 눈동자 또한 무참하리만치 여상 같기에 그는 안심하지 않는다. 싸늘한 쇳내가 난다. 철제 침대로부터 올라오는 냉기가 손끝을 자그마한 바늘처럼 찌르는 순간에 그는 중얼거리듯 묻는다.


“언제부터 있었지?”


손을 뻗는다. 관통할 수 없는, 부피가 있는, 단단한 표피와 그 안에 들어찬 근육이 느껴지는 뺨이 손끝을 스친다. 제 뺨을 훑은 손을 지그시 응시한 A는 곧 속삭인다. 높낮이 없는 어투로. 그래서 속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말씨로. 이마를 맞댈 듯 가깝게 다가온 채로. 그러나 정말 닿지는 않을 만큼의 충분한 거리를 두고.


“기다리고 있었어. 오래.”


“…….”


“제법, 오래.”


칙칙한 어둠이 나앉은 낯은 그 윤곽을 더듬는 것만이 최선이다. 가까이 눈을 마주치고 있음에도 그렇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홀로그램과는 다르다. 그 순간 칼릭스는 홀로 중얼거A. 전제가 틀렸다. ‘A’에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무언가를 바랐기에 그를 띄우지 않았다. 충동으로부터 파생된 혼란이 그를 썰물처럼 한차례 쓸었으나 그 혼돈은 별개의 것이다.




그가 바란 건 단지…….




그러나 A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들은 어떠한 말도 나누지 않는다. 시선과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린 태엽처럼 아주 오랫동안 오가지만 그뿐이다. 한참 뒤에야, 어쩌면 고작 몇 초 또는 수 분 후에, 먼저 입을 여는 건 A다. 무심한 눈동자를 굴려 홀로그램 조종간을 한번, 그리고 다시 칼릭스를 한번 본다.


그리고 말한다.


“가자.”


A가 질문하지 않았으므로 칼릭스 또한 답하지 않는다. 기실 그네들의 관계는 상당수 이런 식으로 빚어진 것 같다는 깨달음은 순간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하게 그를 덮친다. 그리고 찾아온 만큼이나 순식간에 빛바랜다.


어떠한 낱말도 발음하지 않은 입을 지그시 다문 채 칼릭스는 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