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8천 자, 실제 작업물, 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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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3:59



“저항하라!”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린다. 광장에 한가득 모인 인파를 지나 삼 층짜리 아틀리에에 가닿을 만큼. 쩌렁쩌렁 울린 목소리를 지나 또 다른 외침이 화답하듯 울린다.


“매달아라!”




*




시가지 중심에 있는 세인트롤 광장은 마을의 모든 길이 이어지는 일종의 바다와 같은 존재였다. 길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벽을 짚고 직진하다 보면 언젠가는 세인트롤 광장에 가닿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커다란 광장에서 사람들은 제각각 친구들과 모여 뛰놀거나 대화를 나누는 등 여가 시간을 보냈더랬다. 그러니까, 이 사태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작은 대강 이러했다. 황제와 귀족들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로부터 공화국 수립을 외치는 혁명군이 탄생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벽보를 붙이거나 함께 모여 행진하는 정도였으나 이를 아니꼽게 본 황제가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두 조직의 대립은 점차 첨예해졌다. 그러다가 그날, 군대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제국군이 벽보를 붙이던 어린아이를 즉각 처분했던 어느 날, 혁명군은 대대적으로 군대 설립을 발표했다. 본격적으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


그 이후로 일 년 가까이 지났다. 왕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황제와 귀족파 높으신 분들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며 제국군은 매일 같이 숨어 있는 혁명군을 솎아 냈다. 억울하다는 외침도 함께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런 사소한 울부짖음은 무릇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스러지는 법이었다. 혁명군의 사기를 꺾여야겠다고 판단한 황제는 사로잡은 혁명군들의 공개 처형을 명령했고, 제국군 참모는 역사에 길이 남을 선택을 내렸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던, 그래서 모두가 어렵지 않게 다다를 수 있었던 바로 그곳. 세인트롤 광장 말이다.


이제 광장에선 전에 없던 피비린내가 난다. 온갖 오물과 사람들의 분변 따위로 더럽혀진 탓에 주민들의 걸음은 뚝 끊겼다. 사시사철 사람으로 붐비던 광장에 사람들이 모이는 건 오직 한때였다. 혁명군의, 적어도 제국군이 혁명군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처형식 때.


그리고 지금, 세인트롤 광장이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삼 층짜리 아틀리에 귀빈실에, B은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식기 중 금테를 두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양초에는 값진 향료를 써 은은한 꽃 내음이 났고 그 촛농은 은으로 빚은 촛대 위에 눈물처럼 떨어지길 거듭했다. B의 앞, 백년살이 고무나무로 만들었다는 큼직한 탁자에는 중동의 장인이 한 땀 한 땀 엮었다는 최고급 캐시미어가, 그 위에는 공들인 한 입 거리들이 저들만의 각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온갖 호화와 향락을 그러모아 짜낸 즙 같은 홍차가 화려한 샹들리에의 빛을 말간 붉은빛으로 받아 반짝였다.


바깥에서 소란이 인다. 벌떼처럼 몰려든 인파 사이를 우악스럽게 비집고 밧줄로 묶인 이들이 줄줄이, 마치 그물에 엮인 물고기들처럼 고개를 펄떡이며 단상에 올랐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한층 잦아든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러워진 이들, 혁명군 혹은 그렇게 일컬어지는 자들을 향했다.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제국군 하나가 단상 앞으로 한 발 나섰다. 그가 입을 크게 벌리고 무어라 외쳤다. 두꺼운 유리창으로 덧대어 방음이 훌륭한지라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정확히 닿지 않는다. 캐시미어만큼이나 부드러운 촉감을 주는 찻잔 끄트머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B이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처형식이었다, 저건. 황제는 모두가 거리낌 없이 사용하던 광장에 단두대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수없는 피를 흘렸다. 사람들은 이제 더는 광장에 나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


빠끔거리는 제국군의 입 모양을 보아 아마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B의 눈이 언뜻 좁아진다. 살짝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고 그가 어깨를 조금 더 편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자 머리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앞에 앉았던 상대가 음, 하고 작게 헛기침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B이 단상에 선 이들을 향해 눈을 좁혔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가해진 폭력으로 인해 늙고 헤져 온전히 크기를 잃은 탓이다.


“—!”


하지만 들리지 않는 외침은 분명히 존재한다.


“B.”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B은 그제야 단상에서 눈을 뗐다. 오래 지나지 않아 유리로 분리된 광장 바깥에서 비명이 들렸다. 단말마 같은 목소리들과 함께 미약하게 전해지는 떨림. 처형식이 거행되었다. 구태여 돌아보지 않은 채,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향한 미약한 씁쓸함을 삼키며 B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제 앞에 앉은 남자를 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A이었다.


B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그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핏빛 홍차가 미세한 진동에 파문을 일으킨다. 내리쬐는 샹들리에의 하얀 빛은 과도하게 시리지도, 또 지나치게 어둡지도 않다. 쾌적해, 그래. 찻잔을 천천히 들어 기울이며 B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 단어가 가장 잘 맞겠군. 이곳은 쾌적하다. 빼앗긴 광장과는 달리.


홍차를 한 모금 넘기고 잔을 내려놓았을 때 A이 그를 보고 있었다. 특유의 말간 시선이 B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지긋한 응시에서 느껴지는 집요함이 있었다. 그러니까, 의문에 관한 답을 갈구하는 자의 눈이다. B은 A을 알았고 A 또한 B을 알았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B이었다.


물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흠뻑 젖은, 액체를 흡수해 색이 짙어진 처형대가 보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웅성거리며 그곳 주위를 서성거렸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거리는 이들을 제국군은 내쫓지 않았다. 저렇게 사람들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황제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두려움과 공포로 타인을 다스릴 줄 알았다.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배웠을 테니까. 제왕학이라는 학문은 실은 나와 다른 사람을 손쉽게 언행으로써 제압하는 법을 기술한 모음집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을 B은 알고 있었다.


희미한 한숨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온다. 피로한 낯을 문지르자 A이 손을 뻗었다. 삼단 트레이 위에 켜켜이 올려둔 버터 쿠키와 케이크 따위가 B의 앞으로 훌쩍 가까워졌다. 먹어요, 하는 목소리엔 높낮이가 없었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흔들림이 없었기에 B은 저 질문이 다소간 자신에게 가하는 시험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상상을 했다. 아주 무심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마음이 심란할 때는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편이 낫지 않아요?”


“안 들어갑니다.”


그러자 A은 짧게 침묵했다. 이어진 질문은 그다지 대답하고 싶은 종류는 아니었다.


“광장 때문에?”


B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굳는다. 고개를 돌렸을 때 A은 유리창 너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으므로 B은 침묵을 택했다. 이윽고 A이 습기 찬 광장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마주했을 때, 눈이 마주쳤을 때, B은 자신이 침묵으로써 대답을 내놓았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턱을 괸 A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너무 무릅니다.”


“그렇습니까.”


“저들이 죽을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의 그 심약한 마음을 말하는 겁니다.”


“…….”


“어떤 비탄은 죄입니다, B. 모든 감정은 결국 누군가의 저울 위에 올라가 있을 뿐이에요.”


B은 입을 다물었다. 전하고픈 불분명한 마음을 정제하지 못한 단어로 엮는 대신 침묵을 택한다. 울렁이는 홍차를 내려다보다가 목구멍 안쪽에서 까끌까끌한 모래알 같은 것들을 씻어내기 위해 찻잔을 기울인다. 홍차가 끈적하게 입안에 들러붙었다. 그 향이 지독해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돕고 있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


“불필요한 죄를 짓지 마세요.”


B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잰걸음으로 아틀리에를 나섰다.


저택으로 향하는 길에 비가 내렸다. 날숨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갑작스러운 빗줄기에 사방에서 비명 같은 한숨 소리가 울렸다. 저마다 비를 막기 위해 가까운 처마로 뛰어 들어가거나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B은 걷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걸으면서 그는 벽보를 보았다. 피 같은 붉은 물감이 빗줄기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민중이여, 그다음 문장은 지워져 읽을 수 없다. 꾹 다물었던 잇새에서 뜨거운 김이 뭉글 피어올랐다. 춥다. 초가을이었다. 환절기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날씨가 변덕스러웠다. 서두르지 않으면 감기에라도 걸려 곤욕일 것이다. 땅에 눌어붙은 듯한 발을 힘겹게 떼어내며 B은 걸었다. 그러며 생각했다. 고작 가을비에 녹는 벽보가 뭐라고. 황제는.


A이 맞았다. 어떤 비탄은, 슬픔은, 좌절과 고통은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대역죄다. 내보이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그 감각도, 부피 있는 감정이 차올라 몸이 펑 터질 것 같다는 상상도, 숨통을 틀어막힌 것 같다는 고통도 아득히 머나먼 존재가 수립한 규율 앞에서는 무력하다.


그때였다.


우두커니 서 있던 B의 곁을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맹렬하게까지 느껴지는 속도로 그가 뛰었다. 청년이었다. 빗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횃불을 들고 있었다. 짧게 친 머리칼이 폭풍우를 만난 것처럼 쫄딱 젖어 있었다. 알 수 없는 인력에 따라 B이 등을 돌렸다. 청년을 보았다. 맹수의 기세로, 어두침침한 거리에서 등대처럼 빛나는 횃불을 쥐고, 당장에라도 넘어질 듯 허우적거리면서 그가 뛰었다.


광장을 향해서.


처형대를 향해서.


이변을 알아챈 제국군들이 움직였다. 매서운 기세로 청년은 그들을 헤쳤다. 누군가가 청년의 목을 틀어잡는 것과 동시에 그가 횃불을 내던졌다. 날카롭게 연마한 화살처럼 쏜살같이, 그리고 정확하게, 횃불이 날아오른다. 그렇게 목표물을 꿰뚫었다.


처형대에서 불꽃이 터진다. 동시에 청년이 외쳤다.


“담대하라!”




설리반 저택은 A이 기억하는 것보다 황폐해진 채였다. 조촐해졌다는 단어보다는 황폐해졌다는 묘사가 어울렸다. 그만큼 초라했다. 버려졌거나 버려질 예정이라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 이상은 저택이 풍기는 공허함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하다못해 마중 나온 사용인조차 없었기에 A은 스스로 마차에서 내려 제 발로 대문을 열어 저택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A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비유가 아니었다. 정말로 텅 비어 있었다. 이렇다 할 가구랄 것이 없었다. 주기적으로 내부의 가구를 전부 교체하는 사치스러운 귀족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B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유서 깊은 설리반 저택의 가구를 전부,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교체할 만한 실력자도 얼마 있지 않을 것이다. 멍청하게 입을 벌렸던 A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높은 천장을 꾸몄던 금장식, 반짝이던 커다란 샹들리에, 벽면과 바닥을 쭉 이었던 값진 은 촛대, 이백 년 묵은 자단나무로 만들었다던 탁상과 푹신한 캐시미어 카펫까지. 그것들이 모두 사라진 공간은 황량한 뼈대를 드러낸 채 굳어 있었다.


불분명한 불안감이 치솟은 건 그때였다. A은 이유 없이 B의 저택을 찾은 게 아니었다.


A이 조급해진 걸음을 뗐다. 이 저택에 이미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저택의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방을 전부 뒤지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A은 B을 알고, B은 A을 안다. 이를 악문 A이 걸음을 재촉했다. 잰걸음이었던 발이 갈수록 빨라지다가 나중에는 거진 뜀박질로 변했다. 그렇게 다다른 곳, 유일하게 닫힌 이 층 서재의 문을 힘껏 열어젖히자마자 A은 보았다.


B이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만월이 떠오른 밤이었다. 어둠에 잠긴 하늘은 고요했으나 대지는 그러지 못했다. 멀리서 몰려드는 새빨간 불길의 군집이 보였다. 깃대에서 펄럭이는 깃발에는 황가의 문양이 선명했다. 멀지 않았다. 숲을 지나면 저택은 금방이었다. 제국군의 난입을 제지할 사용인들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으리라. B은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점진적으로, 그러나 느리지만은 않은 속도로 점차 가까워지는 불길을, 마치 숲을 야금야금 태우며 가까워지는 것만 같은 제국군들을 보고 있었다.


“당신.”


A이 B을 불렀다. B이 천천히 발코니에서 몸을 뗐다. 휘영청 뜬 달을 등지자 그 역광이 쏟아지며 B의 얼굴을 가렸다. 눈을 찌푸리며 A이 신중히 다가갔다. 한 걸음.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당신의 저택에서 반출된 물건 값이 혁명군에 흘러 들어갔다는 말이 돕니다.”


“그렇습니까.”


“저들은 아마 당신에게 나와 똑같은 질문을 할 겁니다. 했느냐, 안 했느냐. 그리고 때때로 질문은 진실을 답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어떤 비탄은 죄입니다, B.”


말하면서도 A은 그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무엇을 바라는가. B이 부정하기를? 긍정하기를? 저 제국군들, 피도 눈물도, 하다못해 인간성마저 없는 작자들의 손아귀에 잡혀들어가 고초를 겪기를? 치졸한 복수심일까? 그도 아니면 동정인가? 사람의 감정이란 걸 어떻게 딱 잘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라고 해요.”


“…….”


“당신이 아니라고 해.”


A이 중얼거렸다. 표정을 알 수 없는 B에게 한 걸음 걸어가면서.


B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다. 그가 입을 열었다. 창밖을 내려다보는 시선만큼이나 무심한 목소리였다.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오히려 이질감이 들 만큼.


“내가 맞습니다.”


“…….”


“당신과 아틀리에에서 헤어진 다음 날부터 저택 물건을 하나씩 팔았습니다. 사용인들에게 일부를 쥐여주고 그들을 해고했습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혁명군에게 넘긴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단지 필요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어떤 비탄과 슬픔이 죄라면 그 죄지은 자들에게 보석금을 넘겼을 뿐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죄를 지을 생각으로.”


잠시 뜸을 들인 B이 말을 끝맺었다.


“나는 이미 죄인이었습니다, A.”


때마침 흘러온 구름이 달을 가렸다. 짙은 그림자에 역광이 사라졌다. 얼굴은 그제야 보였다. 손끝에서 간질거리는 탈력감에 A이 주먹을 꾹 쥐었다. 희미한 헛웃음이 잇새에서 새어 나왔다.


“두려워하고 있잖아, 당신.”


“…….”


“인제 와서 두려워할 각오로 당신은 무얼 이루고 싶었던 겁니까?”


그것은 질문이되 질문이 아니었다. 물음이되 물음이 아니었다. B과 A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떨어트렸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발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짙은 어둠과 그보다 짙은 그림자를 파고들었다. 그러며 같은 생각을 했다.


먼저 고개를 든 건 B이었다. 질문이되 질문이 아닌 것, 물음이되 물음이 될 수 없는 것의 답을 품고서.


“금장식도 샹들리에도, 은 촛대도 탁상도, 하다못해 캐시미어도 내게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것들은 손쉽게 팔 수 있으며 또한 저울 위에 올리기 어렵지 않습니다.”


“…….”


“하지만 누군가의 비탄, 슬픔, 좌절과 절망, 결의 같은 것들……. 우리가 존엄이라고 부르는 그 감정들의 집합은 팔 수도 살 수도 없으며 또한 저울 위에 올려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A, 사람은 슬프다는 까닭으로 죄인이 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의 비탄은 죄가 되어선 안 됩니다.”


“차라리 나랑 같이 떠나요.”


“그것을 배웠기에 나는 담대해지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바람을 타고 각을 맞춘 군화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B을 바라보며 A은 홀로 중얼거렸다. 머지않았다. 끝이. 하지만.


“같이 떠나지 않을 거라면,”


“…….”


“당신이 담대해지고자 선택했다면,”


“…….”


“그렇다면, 도망쳐.”


“…….”


“여기서 꺾이지 마요. 저지를 거라면 끝을 봐.”


“…….”


“불완전한 죄인은 그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완전한 죄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대신 죄라는 개념 자체를 뒤엎고자 하는 죄지은 자는, 때로 죄인이 아닌 시초가 됩니다.”


고개를 든 A이 B을 바라보았다. 죄인의 초상과도 같은 남자의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곧 구름이 걷힐 것이다. 역광은 다시 스밀 테고 그러면, 그러면 B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영원한 미지로 남길 바에는 불분명한 해답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고자 마음먹었으므로 A은 망설이지 않는다.


“나가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망설이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설령 당신을 짓누르는 죄의 무게가 당신의 발을 잡더라도.”


“날 붙잡지 않을 겁니까.”


“당신은 구름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비는? 바람은?”


“당신 손에라면, 어쩌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난다. A이 고개를 내저었다.


“거짓말.”


“…….”


“당신은 예전부터 지독한 거짓말쟁이였어.”


B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써 대답을 내놓았다. 저리는 손끝을 문지르며 A은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가 올려다본 하늘에서 그는 본다. 점차 걷히는 구름을. 베일 너머에서 쏟아지기 시작하는 은빛 빛살을. 역광은 그렇게 B을 천천히 살라 먹는다. 그의 낯을 가리고 A이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탈바꿈하게 한다.


“가요.”


비켜서며 A이 말했다.


“다시 만나는 날에는 당신을 이해해 볼게요.”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어쩌면 나도 변절할지 모르지. 그러니 자리는 비워둬요. 언제고 채울 수 있게.”


“이미 그랬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짧게 대답한 B이 걸음을 뗐다. 역광에 얼굴이 검게 물든 남자가 제 곁을 스쳐 지나갈 때,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복도를 따라 걸어 내려갈 때, 이윽고 사라질 때, 조금 뒤 우악스러운 굉음과 함께 제국군이 서재에 들이닥칠 때까지, A은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