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은 순간이나 결과는 오래 남는다. 그걸 네가 모를 리 없겠지, 칼릭스.
그의 앞에 무엇이 누워 있는지 안다. 말하자면 질 나쁜 우연이 겹치고 얽혀 조성한 상황이나 다름없으므로. 그러니 이 모든 건 하릴없는 운명의 장난이라고 불러야 적합할지 모른다. 몰두한 너를 일깨우기 위해 찾아간 연구실에서, 철제 침대 위에 가로누운 홀로그램에 나를 투사하는 것을 목격한 일은.
아니, 그건 내가 아니다. 그것과 나는 태생부터 동일하지 않으며 나는 결코 그것이, 그것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너일 것이다. 본래 실험의 설계자야말로 가장 누구보다 근원에 맞닿아 있는 존재니까. 그러므로 나는 질문할 수밖에 없다.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칼릭스?
너는 충동에 휩쓸리는 부류가 아니다. 무언가를 모사한 결과물을 보고 감흥이나 감동, 혹은 그 엇비슷한 무언가를 느끼는 사람도 아니다. 너를 휩쓰는 감정들은 대체로 실체가 없으며 사백 년 전의 것, 아주 묵은 것, 낡고 헤진 것들이므로 네가 이지를 잃고 그들의 뜻을 따랐다고 보기엔 어폐가 있다. 그 사실들을 알기에 네 행동의 원동을 이해할 수 없다.
네 손이 잠시 허공을 떠돈다. 이윽고 고스란히 거둔다.
짙은 남청빛 조명이 점멸한다. 네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너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리란 사실은 어쩌면 자명하다. 네가 한 걸음 물러날 때 나는 한 걸음 다가간다. 너는 알지 못하는 우리의 거리를 좁힌다. 언제나 그랬듯이. 혹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것처럼.
네가 만들어낸 저것은 시뮬런트와 비슷하되 다른 존재다. 그리고 시뮬런트와 동치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나와도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너는 과학자이므로, 나처럼 의학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대신 그 기반이 되는 과학으로 사물을 관찰하므로, 어쩌면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질지도 모른다. 엇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어긋나는 시선, 그것이 궁금하다고 하면 너는 어떻게 반응할까.
저건 내가 아니다. 내가 될 수 없다.
과학으로 보았을 때도 동일하다. 나에겐 나의 혼이, 심장이 있다. 나를 구성하는 뼈와 피와 살은 오직 나만의 것이며 또한 고유한 기억이 존재한다. 하지만 저것은 아니다. 차갑게 식었겠지. 매섭게 굳은 얼음을 만지는 것보다도 냉랭할 테다. 심장이 없고 뼈와 피와 살 또한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 또한 네가 당도했을 것과 비슷한 모순에 다다르고 만다.
내게 뼈와 피와 살이 있던가? 뜨겁게 맥동하는 심장이 존재하던가? 그것들은 모두 사백 년 전에 버리지 않았나. 나의 미련과 두려움과 탄식과 함께. 육 플름 아래에 인간성을 사장하며 벗어던지지 않았던가. 너와 함께. 네가 버린 신념 위에 내가 버린 이념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도 썩어가고 있을진대.
그렇다면, 어째서 나야?
사백 년이 넘도록 이어진 연이다. 얽히고설킨 근육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기에 메스로조차 가르기 머뭇거려진다. 혈류와 혈맥이 뭉치고 흩어지는 그 근원은 마치 심장과도 같아 함부로 손댈 수가 없다. 끊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혹은 썩어버린 부위를 도려내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차마 건드릴 수 없는 건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때때로 어떤 인연은 있지도 않은 심장을 움키고 자란다. 너와 나 또한 그렇다.
제대로 배치하지 못한 인체 모형처럼, 엉망진창으로 꼬여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장기처럼, 이제 그들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사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지만 그것이 답이 될 수 없다. 네 등 위를 덮은 그림자가 울렁인다. 그에 맞추어 나의 의문도 몸을 떤다.
너는 무엇을 원하지?
무엇을 바라고 홀로그램에 나의 환영을 덧씌웠지?
나의 결심을 느낀 걸까. 그래서 나를, 내가 아닌 ‘나’를 조형코자 한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에 너는, 너의 뒷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는 너의 망설임은 진실되다. 너는 진정으로 머뭇거리고 있으며 그 사실은 너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라. 지금의 네게서 눈 뗄 수 없는 까닭은.
네가 뒤를 돌았을 때 나는 여전히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눈을 크게 뜬 네가 입을 살짝 벌린다. 그 표정은 순간적으로 사라지지만 내게는 너의 당혹감이 보인다. 기실 사백 년이나 같이 지낸 사이라면 뭐든 모를까. 강산이 변하고 세계가 무너졌다가 재정립되는 일까지 함께 바라보았으며 그 모든 걸 뛰어넘은 혈류로 이어져 있는데.
“언제부터 있었지?”
그러므로 나는 너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결심한다.
“기다리고 있었어. 오래.”
“…….”
“제법…… 오래.”
너는 나의 윤곽을 더듬듯 집요한 눈으로 날 살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하기 어려운 얼굴, 고뇌하는 낯으로 나를 바라본다. 잠시간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입을 닫는다. 짧은 한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돌린다.
“가자.”
내가 질문하지 않았으므로 너 또한 답하지 않는다. 어떠한 낱말도 발음하지 않은 입을 지그시 다문 채 너는 걸음을 뗀다. 그 뒤를 따른다. 네가 모사했던 나를, 혹은 탄생할 뻔했던 나를 뒤로한 채로 너는 떠난다.
다만 궁금증은 잦아들지 않았으므로 나는 선택한다. 며칠 뒤 연구실 문을 닫고 홀로그램 창을 켰다. 켜켜이 찍힌 내역은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철제 침대를 끌고 와 곁에 두고 렌즈를 그 위에 조준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손끝에 맞닿는 버석한 감각에 집중하며 너 또한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고민한다.
너의 홀로그램은 마치 진짜 같다. 뜻하지 않아도 너는 그곳에 있다.
무엇이 다르냐는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실체. 홀로그램엔 실체가 없고 우리에게는 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르지 않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네 홀로그램을 들여다보며, 그 침침한 응시에 까닭 모를 불온함을 느끼며,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칼릭스, 네가 무엇을 질문했는지 알 것 같아. 어떤 생각이 너를 이끌었는지 마침내 직감할 수 있어. 그렇기에 우리의 시간은 겹친다. 우리가 산처럼 포개어 육 플름 아래 묻었던 감정, 거기서 물음표가 마치 들꽃처럼 피어난다. 같은 질문을 곱씹다가 자연히 그것을 깨닫는다.
애당초 나는 네게 무슨 의미지?
너는 내게 무슨 의미고.
실체 없는 뺨을 쓸어내린다. 렌즈가 투사하는 빛에서부터 오는 미약한 열기가 손등을 달군다. 네게도 존재하지 않는 온기를 홀로그램이 가진 것만 같다는 고약한 모순에 웃음이, 속절없는 웃음이 난다. 자그마한 너털웃음과 손끝으로 퍼지는 열기. 눈 감은 홀로그램과 실체 없으되 진실한 너.
고개를 숙인다. 묶지 않은 머리칼이 떨어지며 장막처럼 우릴 가린다.
존재 없는 열기가 입술에서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