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다.”
마지막 음식을 놓고서 그라하가 두어 걸음 물러났다. 현관문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놓인 자그마한 제단이었다. 갖은 음식이 그 위를 장식했다. 토르티야에 치즈와 채소를 넣어 구운 엔찰라다, 신경 써서 직접 끓인 매콤한 토마토수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볶음과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빵까지. 정성 들인 한 상을 뿌듯하게 내려다보며 그라하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이 정도라면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림자 5월의 초입이었다. 날씨는 막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온갖 열매가 영글고 하늘이 높아지는 달. 때마침 불어온 찬바람에 그라하를 스치고 지나간다. 짓궂은 바람에 옷자락이 사납게 나부꼈다. 주거지 한복판이었음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와는 다른 활기가 공기를 가득 메웠다. 곳곳에서 깃발이 흔들렸고 군침 도는 냄새가 거리를 따라 진동했다. 집집이 문간에 음식을 가득 담은 탁상을 하나씩 펼쳐두었다. 똑같이 생긴 빵을 입에 문 아이들이 저들끼리 뛰어 놀며 그라하를 스쳐 지나갔다. 그라하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서로에 질세라 달리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특별한 시기였다. 오늘부터 한동안은 이런 부산스러운 분위기일 것이다.
“그라하 씨.”
누군가 다가온 건 그때였다. 귓가에서 오래도록 울리던 아이들의 웃음소리에서 퍼뜩 깨어난 그라하가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건넛집에 사는 주민이자 빵 가게 주인인 카틀레아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고소한 냄새가 났다. 팔에 걸린 바구니에서 갓 구운 빵 냄새가 진동한다. 그라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카틀레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빵을 나눠드리려고요.”
카틀레아는 예상대로 움직였다. 바구니를 덮었던 천을 들추자 똑같은 모습의 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중에서 가장 구릿빛이 도는 빵을 집어 그라하에게 건넨 카틀레아가 웃었다. 그라하는 사양하지 않았다. 건네받은 빵을 오랫동안 내려다보다가 그 또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항상 고마워, 카틀레아.”
“뭘요. 영웅님도 마을에서 산 것보다는 직접 구운 빵을 더 좋아하실 거잖아요.”
“하하.”
그라하가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는 대신 그는 몸을 돌렸다. 먼지나 낙엽이 들어가지 않도록 얇은 덮개를 얹은 탁상 앞에 쪼그려 앉았다. 수프 위에 갓 구운 빵을 넣고서 다시 천을 덮는데 카틀레아가 말했다.
“어머, 그림이 없네요.”
“아, 이런.”
“가져다드릴까요?”
“아니야. 집에 있는 것을 쓰면 돼.”
그라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 하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카틀레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희미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스민 낯이었다. 그라하는 도로 입을 닫았다. 저런 낯을 한 사람을 그는 수십 번 보았다. 이 시기에는 더더욱 흔했다. 그라하는 카틀레아가 입에 담을 다음 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영웅님이 좋아하셔야 할 텐데.”
“좋아할 거야.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요.”
잠시 뜸을 들인 카틀레아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십 년이나 지났지만 도무지 적응되지 않네요.”
그라하는 말 없이 웃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카틀레아는 곧 옆집으로 가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서 그라하는 걸음을 돌렸다. 대문을 열고서 정원을 가로질렀다. 현관문을 열고 미약한 훈기가 도는 집안에 발을 들인다. 등 뒤로 문을 닫고서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자그마치 십 년이었다. 영웅이 죽은 지.
우주 끝으로 향했던 새벽의 혈맹과 영웅은 그곳에서 오래 묵은 절망과 맞섰다. 그들은 용맹하게 투쟁했고, 삶과 미래를 쟁취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들이 일궈낸 결실이 영웅의 목숨과 맞바꾼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라하는 그날을 소름 끼치도록 생생히 기억했다. 파랑새의 인도를 따라 돌아온 영웅은 의식이 없었다. 알리제까지 달라붙어 치유술을 쏟아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생기와 삶이 시시각각 손끝으로 빠져나가던 허무의 감각을 그라하는 그날 처음 느꼈다.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명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라하는 그날 혼절한 채로 여정을 마무리했다. 이성을 되찾았을 때 영웅은 이미 육 플름 아래에서 기나긴 잠에 빠진 후였다.
영웅은 죽었다. 하지만 기억되었다. 추모하는 물결은 에오르제아 곳곳에서 일었다. 영웅의 사망을 공고히 하고 한 달 뒤, 에오르제아 연합군의 수장들은 새벽의 혈맹을 찾았다. 그들은 깊은 슬픔에 잠긴 혈맹 사람들을 위로하며 말했다. 영웅의 날을 지정하고자 한다고. 영웅이 우리를 떠난 날로부터 한 달, 그를 잊지 않기 위해 술과 음식을 준비하자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시작되었던 영웅의 날은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조금씩 변화했다. 지금 영웅의 날은 일종의 미신과 뜻을 함께했다. 이제 사람들은 그림자 오월의 초입부터 별빛 유월의 초입까지 온갖 음식을 올린 탁상을 현관문 밖에 놓는다. 아이들은 무거운 로브를 뒤집어쓴 채로 거리를 뛰어다녔다. 이 시기에 그들은 영웅이 돌아온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영웅이 좋아하던 음식을 놓아 그를 반겼다. 영웅이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로브를 뒤집어써 자신의 정체를 숨겼고, 또 모습을 감춘 상대방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창문 아래, 빛살에 잠긴 영웅의 초상화를 집어 들며 그라하는 작게 웃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의식에 동참하게 된 건 오 년 남짓 되었다. 생각보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의 목표와는 별개로 그라하는 영웅의 날을 좋아했다.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사람들이 에오르제아 전역을 들쑤시는 것도, 손수 음식을 준비해 제단을 만드는 것도, 당신을 위한 음식임을 알리기 위해 제단 한구석에 초상화를 놓는 것마저도.
어떤 그리움은 속절없었다. 이 행위가 그라하를 근본적으로 채워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껍데기에 불과할지라도 그라하는 매년 음식을 만들고 제단을 다듬었다. 반은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영웅을 위해서, 반은 이곳에 남아 자리를 지키게 된 자신을 위해서.
밖으로 나섰을 때 그라하는 낯선 사람을 보았다.
검은 로브를 눌러쓴 사람이었다. 제단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라하가 눈을 끔뻑였다. 구경하는 건가, 하는 안일한 생각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바뀌었다. 덮어두었던 덮개가 바닥을 굴러다녔다. 그라하는 처음 보는 사람이 빵에 수프를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갈라진 속에서 김이 폴폴 올라오자 그는 앗 뜨거워,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저기.”
“응?”
“그거 먹으면 안 되는데.”
그라하가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빵을 우물거리던 남자가 멈췄다. 짧게 뜸을 들인 남자는 곧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더니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멀건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그야…….”
영웅의 날을 모르는 사람인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라하는 이렇다 할 대답을 찾지 못하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라하가 대꾸하지 않자 남자는 남은 빵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우물우물 씹어 삼키고는 말했다.
“괜찮아. 내 거라서.”
숫제 어린아이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목소리였다. 황당함을 금치 못한 그라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노는 오르지 않았다. 딱히 먹어도 상관없나, 하고 그라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음식은 어차피 만든 사람이 그날 저녁 먹는 것이 관례였다. 그라하는 그냥 천천히 다가갔다. 제단 구석에 영웅의 초상화를 세우고서 바람에 나뒹굴던 덮개를 집었다. 더러워진 천을 대강 두드려 정돈하며 그라하는 남자를 보았다.
“다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덮개는 덮고 가. 바닥에 두면 더러워지니까.”
“어디 가?”
“약속이 있어서.”
그러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빵가루가 묻은 손을 탁탁 털고는 그라하를 향해 섰다. 로브로 가린 낯 너머에서 그라하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의아해하는 대신 그라하는 덮개를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는 천을 받아 들고 또 한참 내려다보다가 제단을 덮었다. 그리고 그라하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왜 따라와?”
걸으며 그라하가 물었다. 남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갈 데가 없어서.”
그라하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였으나 그의 직감이 이끌고 있었다. 조금 뒤 그라하는 제 뒤를 졸졸 따라오는 남자를 힐끔 곁눈질하다가 다시 한번 물었다.
“이름은?”
이번에는 조금 더 긴 간격이 있었다. 대답하지 않으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을 때쯤 남자가 대답했다.
“로스 비다도스(Los Vidados).”
망자의 종소리에 다다랐을 때 야슈톨라가 그들을 반겼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직후 마녀의 날카로운 시선은 남자에게 꽂혔다. 그라하는 남자가 자신을 소개하도록 기다렸으나 남자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단지 야슈톨라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두어 걸음 물러났을 뿐이었다.
“당신은…….”
야슈톨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명을 바라는 시선이 그라하에게로 향했다. 그라하는 남자와 야슈톨라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집 앞에서 만났어. 제단에 올린 음식을 먹고 있지 뭐야.”
“저 사람이요?”
“이름은 로스 비다도스래. 자세한 건 나도 잘은 모르겠어. 설명을 안 해주더군. 하지만 위험할 것 같진 않아서.”
“로스 비다도스라.”
마녀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로브 안에 숨긴 모습을 꿰뚫을 것만 같이. 하지만 그뿐이었다. 남자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야슈톨라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발을 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면이 있어요.”
“응? 나?”
“글쎄요.”
거기까지였다. 야슈톨라는 남자에 관해 더는 묻지 않았고, 남자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빠르게 다음 주제로 넘어갔으며 그라하는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야슈톨라와 함께 그들은 걸었다. 망자의 종소리를 벗어나 천천히. 목적지는 성 코이니크 재단 조사지였다. 목적지를 향해 걸으며 야슈톨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했다. 산크레드가 위리앙제와 함께 제단을 세웠다거나, 르베유르 저택 앞에도 제단 하나가 생겨났다거나 하는 얘기들이었다. 그라하는 모든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래간만에 듣는 동료들의 소식이었다. 새벽의 혈맹은 이제 활동하지 않았으므로.
영웅의 죽음 이후로 세상은 평화를 되찾았다. 새벽의 혈맹은 존립 이유를 잃었으며 환난 속에서 빚어진 단체들은 차례차례 해체 절차를 밟았다. 이제 세상엔 거대한 고난이라거나 인류사를 적대할 만한 시련이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거라곤 개인적인 좌절과 절망뿐. 그리고 그것들은 세계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므로, 그라하는 안심하고 자신의 목표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생각은 변함없나요?”
멀리서 재단 조사지가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야슈톨라가 물었다. 숨죽인 목소리였다. 낮고 무겁게 깔린 채로 그라하를 정확히 향했다. 그라하는 땀을 한번 훔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고 답하자 야슈톨라는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웅을 되살리겠다니.”
“한 번 성공했잖아. 두 번이라고 못 하라는 법은 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당신을 응원하는 마음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그는 내게도 소중한 동료였으니까.”
그때였다. 야슈톨라가 힐끔 시선을 돌렸다. 일순간이었지만 확실했다. 그라하에서 비껴간 시선은 그의 뒤를 따르던 남자에게 향했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야슈톨라와 그가 시선을 주고받았다고, 그라하는 이상하게도 확신했다. 하지만 어째서? 두 사람이 아는 사이던가? 의아함을 숨기지 못할 때 야슈톨라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남자도 그라하도 아닌 정면을 바라보며 그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신의 계획은 무모해요. 성공률 자체도 낮고요. 지난번, 제8 재해가 영웅의 죽음의 시초가 되었던 때와는 달라요.”
“알고 있어.”
“차원을 건너뛸 것도 아니잖아요. 아예 별개의 계획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죠. 그런데도요?”
“그런데도.”
그라하가 덤덤히 중얼거렸다.
“시도하기도 전에 포기할 수는 없어.”
“별바다에서 영웅의 에테르를 감지해 끌어당기겠다니.”
기가 막히다는 것처럼 야슈톨라는 중얼거렸지만 그뿐이었다. 더는 말을 얹지 않고서 그는 마저 걸었다. 긴 침묵에서 느껴지는 배려에 감사하며 그라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재단 조사지를 지척에 두었을 때였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라하가 몸을 반쯤 돌렸다. 남자였다. 로스 비다도스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왜 그래, 하고 묻자 그는 조사지에서 멀지 않은 숲, 그 입구에서 번쩍이는 푸른 수정을 가리켰다. 수정은 땅에서 치솟은 크리스탈들 사이에서 홀로 짙푸른 잔광을 내뿜으며 일정한 박자로 점멸하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아, 하고 그라하가 짧게 탄식했다. 눈이 좋구나. 여기서 그걸 보다니. 뺨을 긁적이는데 남자가 물었다.
“저게 뭐야?”
“장치야. 정식 이름은 조금 더 길고 난잡하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에테르 감지 장치가 되겠군.”
“에테르 감지?”
“응.”
재단 조사지에서 나온 사람들이 그들 일행을 반겼다. 그라하는 가볍게 손을 내젓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말을 이었다. 남자는 여전히 로브를 깊게 눌러쓴 채였으나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영웅의 날에 참여하는 열성 주민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래된 계획이야.”
“…….”
“영웅이 죽은 이후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했어. 그가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옳은 일인지. 죽음에의 순응을 거부한 사람들이 모였지. 우리는 영웅에게 마지막 감사 인사 정도는 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걸 현실로 옮기기 위해서 노력했지.”
“십 년 동안?”
“십 년 동안.”
메마른 바람이 분다. 남자는 짧게 침묵했다가 다시 물었다.
“너도?”
“나도.”
“그렇군.”
남자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라하는 어째서인지 그가 설명을 재촉하고 있다고 느꼈다. 때마침 불어온 성긴 북풍이 그들 사이를 스쳤다. 엄습하는 한기에 몸을 살짝 떨며 그라하가 고개를 들었다. 뺨을 타고 낙엽이 스쳤다. 모르도나에도 가을이 왔다. 영웅이 죽고서 열 번째로 맞이하는 가을이다. 그가 없는데도 시간은 이토록 흘렀다.
“이론은 간단해. 일종의 소환 술식이지. 백성석에 에테르를 담는 것에서 착안했는데, 별바다로 흘러 들어갔을 영웅의 혼이 지닌 파장을 감지해서 끌어올리는 거야. 그렇게 퍼 올린 에테르의 일부를 백성석에 담는 거지.”
“…….”
“형체가 다르더라도 상관없어. 거기에 존재하는 건 명확한 영웅의 혼 일부니까.”
“불러서 뭘 할 생각인데?”
“뭘 하다니, 그냥…….”
그때였다. 남자의 손이 훌쩍 다가왔다. 그라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은 찰나, 남자가 움직였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듯 쓸어내리더니 무심히 말했다.
“머리에 낙엽.”
“아. 고마워.”
“확신이 없다면 하지 마.”
그라하가 옷매무시를 매만지는데 남자가 말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장난으로 던졌다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그라하가 눈을 끔뻑였다. 속내를 읽고 싶어도 깊이 눌러쓴 로브 탓에 알 도리가 없었다. 으음, 하고 낮게 앓은 그라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먼 곳, 숲의 입구에 선 쌀알 같은 수정을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의 의미.”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다. 거기서 투박한 다정함이 묻어났다. 낯선 감각에 그라하가 멈칫했다. 벌어진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기 전 남자가 말했다.
“얽매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남자는 이내 그라하를 스쳐 지나갔다. 미련 없이 떠나는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라하가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이상하지. 이것은 기시감이다. 질문과 손길, 그 모두에서 느껴진다. 불러서 뭘 할 생각이냐고. 그라하가 입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다. 애초에 계획을 수립하게 된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아직 영웅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듣고 싶은 이야기도. 영웅이 떠난 이후에야 그라하는 자신이 영웅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 마음이 지금까지 변치 않았던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그의 입술을 지그시 다물린다. 주먹을 질끈 쥐고서 그라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남자의 손끝이 스쳤던 머리칼을 다시 한번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얽매이는 건 어리석은 짓…….
역시 이상해.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노라면 그라하는 자꾸만 질문하게 된다.
우리가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그라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라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가쁘게 뛰어왔다. 시드였다. 그 또한 이번 계획에 자문으로서 참여했다. 반가운 낯이 떠오른 직후 그라하가 발견한 건 시드의 굳은 낯이었다. 인사를 나눌 새도 없었다. 시드가 그라하를 붙잡았다. 할 말이 있어, 하고 운을 뗀 그는 직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선이 그들에게 꽂혀 있었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염려하는 낯들이 둘을 주목한 채였다.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시드가 중얼거렸다. 그라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곧바로 걸음을 뗐다. 여상을 가장하며 겹겹이 친 천막들 사이사이를 걷는다. 그림자와 빛에 번갈아 몸을 담갔다가 으슥한 곳,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멈췄다. 그제야 표정이 무너졌다. 무슨 일이야, 하고 그라하가 묻자 시드는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에.”
“…….”
“신입 하나가 기기를 점검하다가 실수로 기기를 가동했어. 설치했던 수정들은 지시대로 행동했지. 자신들이 꽂힌 지맥을 따라 별바다로 신호를 보내서, 거기서 입력된 파장을 수색하고자 한 거야.”
불현듯 닥치는 불안감에 그라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십 년간의 계획은 단 하나의 가정에서 시작되었다. 영웅의 혼이 별바다로 흘러 들어갔을 것. 하지만,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없었나?”
“수색 결과 없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작동해 보았는데도 결과가 똑같더군.”
그라하가 주먹을 질끈 쥐었다. 아찔한 부유감이 덮쳤다. 설마.
“영웅의 혼은 어쩌면…….”
“아니에요.”
휘청거리기 직전이었다. 야슈톨라가 시드의 말을 가로막은 건.
새벽의 마녀는 해를 등지고 서 있었다. 역광 탓에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시드와 그라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성큼 걸어 그들이 있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섰다.
“영웅의 혼은 별바다로 돌아갔어요. 적어도 그때 당시에는. 확실해요.”
“하지만…….”
“네, 하지만 지금은 없지요.”
잠깐 뜸을 들인 야슈톨라가 천천히 그라하를 보았다. 그리고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십 년이에요.”
“…….”
“십 년 동안 사람들은 소원을 빌었어요. 당신들도 마찬가지였겠죠. 대지 위로 치솟은 환경 에테르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이 모르도나에서.”
“그라하 씨! 시드 씨! 큰일입니다!”
그라하는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아득한 목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사색이 된 조사원이 있었다. 무슨 일이야, 하고 묻기도 전 야슈톨라가 냉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조건인 제물은, 아마도 오늘 아침에 있었다던 신입의 실수가 충족해 주었겠죠. 맞아요, 불완전한 형태예요. 하지만 이 세계에 현현하기에는 아슬아슬하게 알맞을 만큼만 불완전했어요.”
“갑자기 웬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나타나서 설치된 수정을 모조리 부수고 있습니다! 말리려고 하는데도 말을 듣지를 않아요! 무력으로 막아설 수도 없습니다. 싸우는 방식이 너무, 마치…….”
“그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나요, 그라하?”
“마치, 영웅님 같으셔서……!”
목소리와 목소리가 겹친다.
그라하는 그 순간 제가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
기시감의 정체가 그를 전율케 한다. 아찔한 충격이 척추를 타고 온몸을 마비시켰다. 성공했다. 십 년의 바람이, 그가 그리던 형태와는 다른 모습으로, 그라하가 알지 못하던 순간에, 성공했다. 막혔던 숨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그라하가 땅을 박찼다. 있는 힘껏 뛰어나갔다. 이해했다. 그제야 야슈톨라의 말이 이해가 갔다. 지나치게 가혹한 면이 있다던 그 속삭임. 그건 그라하가 아닌 남자, 로스 비다도스, 잊혔으되 잊히지 않은 영웅을 향한 말이었다.
폐가 터지라 달려 나가며 그라하가 입술을 짓씹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단서는 많았다. 제단의 음식을 일컬어 자신의 것이라고 말한 것도. 특유의 침묵과 묵묵함도. 야슈톨라의 반응까지. 대화를 그렇게 나누었는데도 떠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뜨거워지는 눈시울에 고개를 내저으며 그라하가 이를 악물고 땅을 짓쳤다. 그러며 중얼거렸다. 제발.
나를 기다려줘.
“아!”
그러나 몸은 마음을 따르지 않는다.
낙엽에 가린 비탈을 발견하지 못한 그라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깨를 강타하는 아찔한 통증과 함께 그가 굴렀다. 바닥에 엎어진 채로 그가 가쁘게 숨을 골랐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덮친 건 그때였다. 주먹을 짚은 손으로 몸을 떨며 그라하가 일어났다. 이제는 먹먹하게 느껴지는 숨과 찢어질 것 같은 옆구리를 부여잡고서 그가 고개를 꺾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고 푸르렀다. 막힌 숨통을 두드리는 것처럼 그가 가슴께를 붙들었다. 낯을 일그러트린 채 중얼거렸다.
있지, 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