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보다는 명사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계절. 겨울 숲속의 말없는 산책. 고독 속의 고독. 고독 끝의 고독. 고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 나뭇가지들은 나무를 떠나도 죽지 않았고 中, 이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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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불길이 인다. 라이터 점화하는 소리는 짧고 희미하다. 불티가 튄다. 하얗던 담배 끝이 검어진다. 시차를 두고 연회색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른다.
문 닫힌 작업실 내부는 고요하다.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도 그렇다. 매캐하게 퍼지는 담배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며 A은 고개를 돌린다. 작업실에 사람을 들이는 건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기에 가구들도 일인용이다. 벽면에 밀어붙인 소파. 하나뿐인 의자. 불을 켜지 않은 작업실이 어둡다. 손에 쥔 담배가 따닥거린다. 피어오른 연기가 눈앞에서 울렁인다. 침침한 어둠 속에서 무릇 사람은 어렴풋한 윤곽으로 보인다. B도 마찬가지다.
소파에 발 뻗고 누운 B의 테두리가 흐리다. 외곽선을 헤아리듯 천천히 움직인다. 발에서 시작된 꼭짓점 잇기는 B의 얼굴에 가닿아 멈춘다. 용기가 없다거나. 겁이 난다거나. 그런 종류의 문제는 아니라고 그는 스스로 생각한다. A은 종종 들어본 적 있다. 사람의 옆얼굴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말. 마음 깊은 곳에 침잠한, 때때로 장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한 응어리가 간혹 비어 나온다는 이야기를. 손에 쥔 담배가 딱 소리를 낸다. 감쳐문 입술에 힘이 들어간다. 숙였던 고개가 올라간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미세하게, 마치 공기의 흐름을 읽는 것처럼, 혹은 딱 그만큼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로, 흔들린다.
그림자가 져 있어. 어둡다.
A이 고개를 돌린다. 서서히 멀어진다. 적당히 떨어진 곳으로 의자를 끌고 가 앉는다. 힘이 풀리지 않는 몸을 주무르다가 튄 불티에 눈을 얼핏 찡그린다. 발갛게 일어났다가 죽은 불티와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가라앉는 손등을 내려다본다. 한숨은 쉬지 않는다. B를 깨우고 싶지 않다.
잠든 B는 조용하다. 모든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B에게도 잠이란 살아있는 죽음과 비슷하게 작용한다. 죽은 사람이 말이 없고, 움직임이 없고, 물성이 없듯 B 또한 그러하다. 말이 없다. 규칙적으로 희미하게 들썩이는 가슴팍을 제한다면, 움직임이 없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A은 타들어 가는 담배를 대신 들여다보며 생각한다. 불씨가 하얀 담배를 천천히 불사르는 광경을 눈에 담으면서.
이틀 전 벌인 한바탕 싸움판에서 손가락이 삐었다. 붕대를 대강 둘러 고정해 두었다. B에게는 말하지 않는다. B 또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그런 명징함보다 불분명하고 희미한 주제를 주로 다루지 않나, 하는 게 A의 생각이다. 안다는 이유로 내뱉기에는 부족한 근거들과 말하지 않으니 모른다고 취급하는 행위가 켜켜이 쌓이고 있지만. 점차 두꺼워지는 것 같지만. A은 그 사실이 마냥 나쁘지는 않다. 페인트를 겹겹이 쌓는 일보다는 성스럽고 신중하게. 단순한 주먹질보다도 거침없고 막힘없이. 그렇게 직접 쌓은 시절, 시간, 추억, 낭만, 청춘.
다만 조금 더 밝은 불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는 문득 생각한다.
거리는 멀지 않다. 단지 담뱃불로는 몰아낼 수 없는 어둠이 문제다. 형체 없어야만 통과할 수 있는 관문들 또한 그렇다. 딱딱하게 굳은 육체로는 잡지 못하는 문 같은 것들. 잠시나마 흐려졌던 초점이 점차 또렷해진다. 데생을 준비하는 화가의 연필처럼 꼿꼿이 세운 담배가 B를 등진다. 타오르는 연기가 연필의 획이라면. 멈춤 없이 그려낸 산물을 담배 너머 들여다보던 A의 입에서 실소가 흐른다. 바람 빠지는 소리보다도 희미하게.
연결하지 못한 점. 붉게 일어났다가 죽는 불. 겹겹이 쌓이는 알맹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연기 같은 것들. A은 B를 본다. 점을 잇지 않은 옆얼굴을 본다. 감은 눈 너머에 잠겨 있을 빨강을 떠올린다. 두껍고 짙게 올린 미완성의 성벽을 상상한다. 연기가 시야를 가린다. 반대쪽 손으로 허공을 내리치듯 연기를 흐트러트린다. 숨통을 옥죄듯 매연이 단숨에 밀려온다. 순간적으로 기침이 터진다. B가 뒤척인다. 나직이 앓고는 욕지거리를 씹는다.
그리고 다시 멈춘다.
형체가 있어서야 넘지 못하는 벽이라는 것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말없이, 미동 없이, 그러나 여전히 단단한 물성을 지닌 채 잠든 B가 있다. 담뱃불로는 밝히지 못하는 그림자 속에 파묻혀 있다. 연결하지 못한, 어쩌면 영원히 잇지 않을, 공백으로 남은 옆얼굴을 지닌 채 잠든 B가 있다.
그리고 잠들지 않은 A. 성질 따위 바뀌지 않은 채. 담배를 태우는.
연기를 분다. 가닿지 않은 숨이 보인다. 간격을 두고 A이 움직인다. 단단한 손바닥에 불씨를 짓누른다. 주홍 불이 꺼진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만 같다고, 그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