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2천 자, 실제 작업물, GL, 포켓몬스터 기반
1
lemb 2026.06.04.  13:49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일제히 파르르 흔들렸다. 거의 동시에 A가 멈췄다. 눈을 조금 동그랗게 뜬 채로.


B와 약속이 있었다. 오후 네 시 삼십 분, 항상 가는 카페 앞에서. 카페는 쇼콜라가 맛있었으며 근처에 볼거리도 많아 약속 장소로 잡기에 알맞았다. 다만 이른 아침 A에게 급한 일정이 생겼다. 신곡 도입부 녹음을 딱 한번 더 딸 수 있냐는, 울기 직전인 담당자의 부탁을 A는 거절하지 못했다. 녹음실로 향하며 A는 B를 향해 메시지를 보냈다.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말에 B는 눈을 찡긋거리는 이브이 이모티콘을 보냈다. 괜찮다는 말이 뒤따랐다.


그리고 지금. 오후 다섯 시를 갓 넘긴 시각. A는 약속 장소인 카페가 아닌 엉뚱한 곳에서 B를 발견했다. 광장 가와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 근방에는 포켓몬 트레이너들을 위한 배틀 필드가 많았다. A와 B는 종종 카페테라스에 앉아 다른 사람들의 배틀을 분석하기도 했다. 다양한 트레이너들의 전략을 구경하고 뜯어 살피는 건 그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A의 눈이 언뜻 가늘어졌다. B는 카페에 있지 않았다. 카페에서 가장 가까운 배틀 필드 앞 벤치에 앉은 채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곁을 지키는 블래키가 어쩐지 B의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연신 빙글빙글 돌았다. 이변을 알아챈 글레이시아가 낮게 울었다.


“그러게요.”


A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는 카페를 힐끔 곁눈질했다. 고민은 짧았다. 발걸음을 뗐다. 카페를 지나쳤다. B의 앞에 서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B.”


“앗, A 언니!”


이름을 부르자마자 반응이 돌아왔다. 불에 데기라도 한 사람처럼 B가 흠칫 몸을 떨었다. 반사적으로 지은 미소에서는 채 숨기지 못한 당황이 묻어났다. 언제 왔냐며 부산을 떠는 B를 A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조금 후 시선은 배틀 필드로 향했다. 직전 배틀의 열기를 감추지 못한 필드는 관리인에 의해 막 닦이고 있었다. 블래키가 한 번 울었다. A는 발치에서 대화를 나누듯 울던 글레이시아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앉았다. 블래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그는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앗, 음.”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표정이 안 좋아서요.”


B의 뺨이 언뜻 붉어졌다. 그가 홍조가 오른 낯을 푹 수그렸다. A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옷자락을 쥔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옷이 말려 들어간 손등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우물거리던 B가 입을 열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A는 기다렸다. 재촉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A 언니가 오기 전에 말이야. 배틀 신청을 받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너무 바보 같은 판단을 내려버렸어. 전황이 한순간에 뒤집히는 바람에 그만…….”


A가 눈을 가볍게 깜빡였다. 그렇군요, 하는 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침묵이 어렸다. A는 무언가 고민이라도 하는 듯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B는 조금쯤 후회하는 중이었다. 말하지 말아야 했을까,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솜솜코처럼 떠다녔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B가 A를 연신 힐끔거렸다. 그들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소음마저 흐리게 느껴졌다. 망설이던 B가 질끈 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용감하게 튀어나온 바로 그때였다.


“저기, A 언니.”


“배틀할까요?”


A가 불현듯 물었다. 시선은 B를 지나친 채였다. B는 저도 모르게 A의 시선을 좇았다. 등 뒤의 배틀 필드를 향하고 있었다. 관리인이 막 정리를 마친 배틀 필드엔 B가 패배한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B가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배틀? 여기서? 갑자기? 당황스러운 마음에 말을 길게 끄는데 A가 일어났다. 그리고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해요. 배틀.”


정신을 차렸을 때 B는 다시금 배틀 필드에 서 있었다. 맞은편에 선 A는 여전히 담담하고도 무심한 낯이었다. 갑자기 웬 배틀이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규칙이 후루룩 지나갔다. 각 한 마리씩. 상대의 포켓몬이 행동 불능이 된다면 승리. 간단한 규칙이었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A의 글레이시아가 펄쩍 필드에 뛰어올랐다. 이마의 고리가 파르라니 빛났다. 반짝이는 눈을 한 글레이시아를 앞세운 A가 힘 있게 말했다.


“전력으로 오세요, B.”


일그러졌던 B의 얼굴에 힘이 들어갔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팩 돌아갔다. 시선의 끝에는 블래키가 있었다. 결의에 찬 두 시선이 마주쳤다. 블래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B도 주먹을 꽉 쥐었다. A가 전력이라는 말을 썼다면 그가 내세울 포켓몬도 하나뿐이었다.


“네 차례야, 블래키!”


블래키가 몸에 반동을 주며 필드에 뛰어나갔다. 바람을 타고 흙먼지가 흩날렸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먹을 질끈 쥐고서 B가 A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있었다. 패배는 익숙했지만 동시에 매 순간 쓰라렸다. A는 슬퍼하는 B의 등을 밀어주는 것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아마 이 갑작스러운 배틀도 궤를 같이할 것이다.


서서히 들끓기 시작하는 마음으로 B가 블래키를 바라보았다. 믿음직스러운 등이었다. 파트너를 믿고, 배틀을 즐길 것. B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블래키의 흥분이 언뜻 전해졌다. 같은 속도로 심장이 뛰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직감했다. 쥐었던 손을 당당하게 펼치며 B가 외쳤다.


“이번엔 지지 않을 거예요!”


블래키가 그에 화답하듯 크게 울었다. 배틀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이외의 것은 더는 중요치 않았다.


 


*


 


묘목이 자라면


사랑이 주렁주렁 맺힐 거예요


우주를 마시고 단단해질 겁니다




그것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은 마음에서 돌을 꺼내 내게 주세요


나는 그것을 깨트려 별사탕으로 만들 줄 압니다


/ 별사탕과 연금술사 中, 고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