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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3:50



보이는 것도 흰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도 흰 것일 때


겹겹의 백지처럼


어두운 곳엔 없는 기도를 했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어른이 될까


받고 싶지 않은 편지 뭉치를 받아들고서


아침에 눈을 뜨고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매일 그게 궁금했다


/ 가족의 색 中, 안미옥




B가 눈을 떴다.


젖은 바람이 불었다.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바스커빌 저택의 뒤쪽, 작게 난 샛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오는 자그마한 정원에서 아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조금씩, 점진적으로 색채를 잃어가는 하늘과 공기에 뒤섞이기 시작하는 물기가 바로 직감의 증거였다.


B는 꺾어 들었던 고개를 도로 숙였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뺨에 달라붙었다. 소매로 볼을 두어 번 문지르고서 그는 자리에 앉았다. 정원 정중앙에 지은 하나뿐인 벤치였다.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도록 돔 형태의 건축물이 벤치를 감싸고 있었다. 바스커빌 저택의 위용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회색 지대에서도 어김없다는 듯 하얗고 깨끗했다. 벤치에 앉아 돔의 기둥을 손으로 쓸어내리던 B가 눈을 굴렸다. 조금 이상한 정원이었다, 이곳은. 바스커빌 저택에 속하는 것도, 속하지 않는 것도 같은 애매한 위치며 그 외엔 사람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앉은 자리에서 B는 몸을 뒤척였다. 꽃 냄새가 진했다.


정원에는 장미가 만개해 있었다. 장미밖에 없었다. 초보 정원사가 아무렇게나 심은 것처럼 장미들이 빼곡하게, 그러나 규칙 없이 자라났다. 습한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디선가 꽃잎이 떨어졌다. 장미 향은 머리가 어지럽도록 짙었다. 이파리들이 한순간 몸을 떨며 나는 소리가 제법 근사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누군가 장미들의 합주에 끼어들었다. 아직은 젖지 않은 땅을 밟는 구둣발이 있었다. B의 눈이 살짝 뜨였다. 벤치에 기대었던 몸이 앞으로 조금 기울었다. 발걸음의 주인을 어쩐지 알 것만 같다고 그는 문득 생각했다.


“B.”


그리고 어김없이 나타나는 남자가 있다.


B가 벤치에서 뛰어내렸다. 두어 걸음을 내디뎠을 때 강한 맞바람이 불었다. B를 보고 서 있던 남자가 휘청였다. 새하얀 머리칼이 일순 파도처럼 흩날렸다. 예상치 못한 풍랑에 얼빠진 소리를 내는 상대, A를 보며 B가 킬킬 웃었다. 바람이 흐트러트린 앞머리를 대강 정리했다. 뺨을 문지르는 찰나에 A가 말했다.


“기분은 좀 어때, B?”


A가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바로 했다. B의 눈이 언뜻 가늘어졌다. A는 멀지 않은 거리에 서 있었다. 자세는 여느 때처럼 반듯하고 단정했다. 일정한 속도로 깜빡이는 눈동자나 부드러운 몸짓 같은 것들은 A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듯했다. 하지만 왜지? 거리를 좁히지 않고 B가 고개를 느리게 기울였다. 꼭 종이에 그린 것 같다. 뒤를 돌면 부피가 없을 것만 같고. 바람이 불거든 눈을 깜빡이다가 그대로 휩쓸려 날아갈 것 같다.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위태로움이나 처연함과 같은 종류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금 더 어둡고 무거운, 목덜미를 서늘하게 하는 아찔한 감각이었다. B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고개를 돌려 제가 앉아 있던 벤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침잠한다. 가라앉으며 그는 서서히 돌아온다.


B가 등을 돌린다. A를 똑바로 바라본다. 허락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양 자리에 붙박이듯 선 A를 응시한다. 느껴본 적 있다. B는 감각한다. 고민한다. 도출한다. 그렇게 깨닫는다.


바스커빌 저택에 이런 장미 정원은 없다.


B 또한 이렇게 어리지 않다.


그렇다면 이건 꿈인가. 꿈이라면 악질적인 악몽에 가깝다고도 생각한다. 생각은 꼬리와 꼬리를 이어 끝도 없이 이어지지만 눈앞에 선 A는, 혹은 A의 형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듯 눈을 끔뻑인다. 상냥한 어른을 표방한 형상이 걱정스럽다는 듯 손을 뻗는다.


좋은 어른이라는 것에 관해 B는 오랫동안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마냥 확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이었다고 그는 되짚는다. 한껏 축축해진 공기가 폐부를 누른다. 습기가 코 밑까지 차오른 밀물의 바다처럼 흔들린다. 당신, 하고 B는 입을 연다. 묻고 싶은 말은 많다. 하지만 튀어나오는 건 짧은 한마디뿐이다.


“A 씨.”


“…….”


“장미 정원은 무슨 의미야?”


다음 순간 물방울이 떨어진다. 기다렸다는 듯 뺨을 적신다. 하늘에서 빗줄기가 쏟아진다. 정원은 눅눅해진다. 누군가 하늘에서 물뿌리개로 정원에 물을 주는 것처럼 빗줄기는 제법 일정하게 땅을 적신다. B는 본다. A의 얼굴이, 이목구비가 빗줄기를 따라 검고 어둡게 녹아내리는 광경을. 장대비를 따라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장미의 빨간 색소를. 그렇게 희게, 티끌 없이 하얗게 변해가는 장미들을.


본다.


언제나 그렇듯 대답은 없다.


실망하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는 찰나 땅이 무너진다. 아찔한 비상을 마지막으로.


B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