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2천 자, 실제 작업물, 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기반 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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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3:53



원체 삶에 미련이라는 게 없어서 말이야. 아니, 그렇다고 죽고 싶다는 건 아니고. 에헤이, 그 두 개를 동일시하면 쓰나.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 그것들은. 죽고 싶다는 상태가 얼마나 능동적인 상태인지 알아? 한번 생각에 빠져들면 나를 둘러싼 어지간한 것들이 날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것 같다니까. 그런데 삶에 미련이 없다, 이건 살다가 기회가 될 때 아프지 않게 죽어도 그다지 아쉽지 않다는 의미에 조금 더 가깝지. 죽음으로 나를 고꾸라트리겠다는 게 아니야. 어쩌다가 죽게 되어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야.


차이를 알겠어, A아? 죽고 싶다는 게 아니라니까?


 




관자놀이에서 심장이 헐겁게 뛴다. 찢어진 피부를 타고 혈맥이 터진 탓이렷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끝을 느리게 까딱였다. 웃음이 났다. 희한하게도.


그는 땅에 뺨을 붙이고 평행하게 누워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풀벌레가 영 시끄럽게 울어댔다. 욱신거리며 이지러지는 시야와는 달리 심장은 생생하리만치 강렬하게, 부풀어 터지기 직전인 사탕 껍질보다도 맹렬하게 뛰었다. 손끝과 입가에 닿는 흙은 쓴맛이 나리만치 거슬렸으며 그렇기에 B는 자신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B는 천천히 상황을 되짚었다. 시내 한복판에 돌연 나타난 고등급 재난이었다. 조선 후기 박지원이라는 선비로부터 파생된, 그 유명한 호질虎叱이 원인 불명의 까닭으로 날뛴 것이다. 마구잡이로 뒤섞인 민간인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후 제법 시간이 지났다. A에게 민간인 신변을 인도하고 마지막으로 한 바퀴만 더 돌겠노라 이야기를 전한 그때. 소리 없이 다가온 무언가가 머리를 가격했다. 이후의 기억은 드물다.


코에 묻은 흙에서 나는 물기 어린 냄새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기습을 가한 주제에 범이란 자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기척을 숨긴 건지, 아니면 모종의 사유로 자리를 뜬 건지. 어찌 되었든 B에게는 이득인 상황이다. 이곳의 밤은 스산하고 농도가 짙지만 이보다 소름 끼치는 어둠을, 그러니까 그냥 어둠이 아닌 조금 더 고차원적인 ‘어둠’을 B는 여럿 보아왔다.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만큼 두렵지 않고 순순히 죽어줄 마음도 없다.


여기서 끝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걱정은 안 됐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죽을 때 다 돼서 얻은 방자함은 아니다. 급습을 당하기는 했으나 B는 나름대로 재난관리국의 정예였다. 이런 데에서, 이런 방식으로 시시하게 죽을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다. 특히 범을 상대로는 더더욱.


그런데도 누워 있는 까닭은 단순하다. 둔탁한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는 순간 언젠가 A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서.


A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눠왔다. 그들의 대화는 시공간에 굴하지 않고 이어졌으며 모든 낱말을 기억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렇게 불현듯 떠오르는 파편 같은 기억을 곱씹는 건 통제 밖의 의지였다.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그래서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던 사탕을 발견해 버리는 것과 같다. 설명하기 미묘한 향수를 느끼며 사탕의 껍질을 까 입에 던져넣는 것과 같은 행위.


그들은 죽음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여상과 다를 바 없었다. 재난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는 그들의 직업은 추가 수당이 책정될 만큼 단어 그대로 ‘위험’했다. 육체적으로도 그러했고 심리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몸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거듭 보아 온 사람들로서 그들의 대화는 발화했다. A는 B에게 그런 사람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었고,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고 질문했으며, 컵라면은 먹겠냐는 문장으로 말을 맺었다. 그리고 B는 A가 내놓은 문장을 달팽이관에 고이 담았다가 뇌의 복잡하고도 체계적인 전기 신호를 거쳐 대답이랄 것들을 입밖에 내뱉었고…….


아.


그래. 재난도 진화라는 걸 하지.


끙, 하고 앓는 소리가 났다. 몸을 움직이는 순간 척추를 찌르르 울린 격통에 식은땀이 후드득 떨어진다. 잘게 떨리는 팔다리로 무거운 육체를 지탱하며 B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잠깐의 심호흡.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은 여전히 짙고 스산한 어둠이 비닐 껍질처럼 싸고 있다.


속삭임으로는 안 되니 생각을 끄집어내 어지럽히는 방식으로 진화했나 보다, 호질이라는 건. 하기야 목소리를 꾸며내는 방법은 이십일 세기 현대에선 너무 고전적이지. 막 이래.


“갑자기 옛날얘기라니, 방식이 너무 낡으셨네. 그도 그래. 조선 후기면, 이야. 연세가 좀 많이 되시네. 안 그래요?”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닌 것도 같다. 사실 얻어맞은 부위랑 귀랑 너무 가까이 있는 바람에 환청인지 뭔지 확신은 안 서지만.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러 닦으며 B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끄집어낼 기억을 잘못 고르셨네. 하필 죽음이니 뭐니 할 건 뭐야.


A와 나눈 대화일 건 또 뭐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이지러지려는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함이다. 크게 심호흡을 들이켜며 감각을 곧추세운다. 관자놀이까지 밀려 올라갔던 심장을 제자리에 박아 넣으려는 마음가짐으로 발을 한 번 쿵, 굴리고서.


“이것 봐라, 청동아. 이게 죽고 싶은 사람 태도냐?”


피비린내 나는 사탕을 혀로 감싸 굴린다. 그날 보여주지 못했던 증거를 보이듯 B가 어깨를 편다. 준비한다. 대비한다. 솜털이 비쭉 서는 오싹한 감각에 무기를 틀어잡고 비쭉 웃는다. 천천히 몸을 낮춘다. 그리고 기다린다.


범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