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8천 자, 실제 작업물, 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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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3:46



꿈을 꿨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다. 곁자리는 누군가가 누웠던 흔적 없이 깨끗했다.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건 당연하다고, 꿈속의 A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하얀 침구를 정돈했다. 떨리는 손을 소맷자락에 감추고 안방 문을 열었다. B, 하고 이름을 부르며 침실을 나섰다.


집안을 전부 돌았다.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거리로 나갔다. 자주 들리던 옷 가게, LP와 악기를 산 음악 거리를 지났다. 모두가 약속한 날이라는 것처럼 아무도 없었다. B도 마찬가지였다. 새하얗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A가 뛰어 내려갔다. 무언가에 쫓기듯 비탈진 길을 달음박질쳤다.


돌길 끝에 바다가 있었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고 부서트리며 바다가 평온하게 고동쳤다. 잠시 허리를 짚은 A가 비틀비틀 섰다. 머리칼이 제멋대로 휘날렸다. 오빠,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맞바람에 휘청이는 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A가 모래사장에 발을 디뎠다. 상처 하나 없는 맨발에 까슬한 모래가 닿았다.


오빠. 어디 있어.


이런 장난이라니, 어울리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당장 모습을 드러내, B!


비명 같은 고함이 바다를 찢어발기듯 울렸다. 드러내, 드러내, 드러내, 하는 메아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그를 조롱하듯 퍼졌다. 땀에 젖은 얼굴이 떨어졌다.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색채 없는 백발이 몸을 타고 너울너울 떨어졌다. 바로 그때, 시야 구석에서 바닷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흰 머리칼을 바라보며, 발등을 핥듯이 적시고 달아나길 거듭하는 하얀 포말을 보면서, 끝단이 무겁고 축축하게 젖기 시작한 유백색 원피스를 내려다보면서, 그가 문득 생각했다.


원래 이 모든 것이 이다지도 하얗던가.


그리고 다음 순간. A은 깨어났다.


반사적으로 옆자리를 살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잘게 떨리는 손이 베개를 짚었다. 반쯤 꺼진 솜이 느껴졌다. 무엇인가가, 이를테면 사람의 머리 같은 것이 눌렸다가 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처럼 푹 파여 있었다. 손가락이 말려들어 갔다. 지그시 주먹을 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느린 걸음으로 안방을 나섰다. 침실 문을 열자마자 그는 말했다.


“오빠.”


간격을 두고 모퉁이에서 B이 나타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 하나를 든 채로.


“A.”


A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그잔에서 하얗게 피어나는 김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연파랑 머그잔 위에 겹친 B의 주름진 손가락이 언뜻 움직였다.


잘 잤냐고 묻는 B에게 알기 쉬운 대답을 놓으며 A가 시선을 돌렸다. 투명한 아침 햇살이 창가 너머로 기울어 들이치고 있었다. 시리게까지 느껴지는 푸름이 일렁였다.


대화를 시발점 삼아 그들은 일상을 시작했다. 일상과 시작이라는 말이 연이어 등장한다는 건 어딘가 이질감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그보다 적합한 표현을 찾기 힘들었다. 동면에서 깨어난 이들에게는 시동을 거는 행위가 필요했다.


짧은 안부 인사를 마치고 그들은 움직였다. A는 가장 먼저 거실로 향했다. 널찍한 공간이었다. 두꺼운 카펫이 깔려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소리 없이 A는 걸었다. 벽면을 메운 통창을 지났다. 따사로운 볕이 비스듬히 흘러내렸다. 가죽 소파와 테이블을 지나쳤다. 돌아가지 않는 축음기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고운 손끝이 축음기를 한번 훑었다. 먼지는 쌓이지 않았다. 그러나 언 것처럼 차갑게 멈춰 있었다. A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짙푸른 초록이 가까웠다. 크지 않은 정원에 어설프게 심은 색색의 꽃봉오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맑은 햇살이 A의 뺨에 닿았다. 축음기에서 손을 뗐다. 습관처럼 볼을 감쌌다. 그리고 잠시 침묵.


낯선 빛에 눈이 시린 걸까.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탓에 눈이 약해진 탓일까. 피부 위를 희미하고도 얕게 달구는 열기가 생경하다. 자각하지 못한 채 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뜨거운 온도가 마치 폭죽처럼 손끝에서 알알이 터졌다. 손톱을 타고 올라와 팔목을 거쳐 어깨를, 목을 감싸고 지나쳤다. 그렇게 빛이 눈으로 모였다. 화려한 색채가, 생동하는 것 특유의 실존감이 A의 발치에서 일렁였다. 언젠가 보았던 물거품처럼 발가락을 간질이고 발등을 덮었다. 일정하지 않은 박자로 그를 적시고 말렸다.


창가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A는 한동안 서 있었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얼마 지나지 않아 B이 거실에 들어왔다. 하얀 김이 피는 머그잔 두 잔을 든 채였다. 그는 A와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멈춰 섰다. 창밖의 녹음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기다리는 듯도, 망설이는 듯도 하다가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느리고 확실한 몸짓이었다. B의 우아한 몸짓을 바라보던 A는 한 박자 늦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와 꼭 닮은 모습으로, 그러나 보다 느리고 어딘가 불안하게, 자리에 앉았다.


음악과 차, 적요와 책.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A는 생각했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는 음악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종이 한 장을 닳도록 문지르고 있다는 것을 B은 모르는 편이 나았다.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A는 애써 외면하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명징하다 못해 선명한 사실이었다. 망설이고 있는 것 같다고 A는 스스로 뇌까렸다. 느긋한 음악과 따스한 차, 말 한마디 없는 적막과 두 손에 들린 책 따위가 익숙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지도. A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음에도. 발치를 내려다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B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이 마주쳤다. 말 없는 시선이 묻고 있었다. A는 천천히, 우아하게까지 느껴지는 느린 몸짓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높낮이 없는 어투로 말했다.


“첼로나 켤까 싶어서.”


군말 없이 B이 따랐다.


첼로는 이 층 복도 끄트머리 방에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A는 제 발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걷는 건 그가 오래도록 배워온 품위 있는 행동에 어긋나는 일이었음에도 그랬다. 자신을 뒤따르는 B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A는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걸음에 따라 흔들리는 올리브색 머리칼 위로 빛이, 볕이, 유백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쏟아졌다.


그림자가 짙었다. 물을 쏟은 흔적처럼 동그랗고 진하게 A의 걸음을 따라다녔다. 첼로가 있는 방문을 열기 전 A는 멈춰 섰다. 발꿈치에 힘을 주었다. 두꺼운 카펫 위로 신발을 문질렀다. 그림자를 몇 번 지르밟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첼로와 피아노가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벽면을 따라 바이올린 여러 대가 말린 꽃처럼 늘어졌다. 방음을 위해, 비록 그 누구도 소음을 지적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데도, 이 방은 모든 창문이 단단히 닫혀 있었다.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두꺼운 암막 커튼을 덮은 탓에 사방이 다소 침침했다. 오래된 송진 특유의 눅눅한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간질였다. 답답하리만치 폐쇄된 공간이었다. 고개를 돌려봐도 탁 트인 마당 정경 따윈 보이지 않았다.


A가 첼로 현을 만지작거릴 때 B이 문을 닫았다. 딱, 하는 미약한 소리와 함께 공간은 완전해졌다. A가 천천히 활을 집었다. 손끝에 미세하게 송진이 묻어났다. 손잡이를 잡아 돌리며 활을 조금 더 팽팽히 당겼다. 첼로를 세운 채 느리게 자리를 잡을 때 B은 벽면으로 향했다.


“오빠는?”


A가 물었다. B은 간격을 두고 고개를 저었다. 무어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A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았다. 첼로를 조심스럽게 끌어안듯이 세웠다. 뛰지 않는 가슴에 묵직한 무게가 기대어 왔다.


현을 잡고 활을 들었다. 줄을 따라 첼로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진동이 전해졌다. 정확히 가슴께에서 느껴졌다. A가 미약하게 웃었다. 손끝이 둔했다. 오늘따라 첼로가 더 무거웠다. 오랜 잠에서 막 깨어난 탓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구슬픈 선율이 흘러나왔다. 조율을 마치고서 A는 손을 움직였다. 자각은 필요치 않았다. A는 망설이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음악에 온전히 몸을 던지듯이, 차라리 그렇게 되기를 바라듯이 첼로를 켰다. 울림통이 진동하며 몸에 울려 퍼지는 요동을 심박처럼 느끼면서.


발밑에 그림자가 고여 있었기에 그는 멈췄다.


단 숨이 입에 고였다. 뱉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 희미한 호흡이 흘러나왔다고 그는 느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B을 보았다. 벽면에 기대어 선 채로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것도, 그저 노래를 음미하는 것도 같았다. 기실 그가 어떤 상태인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A는 뜸을 들이다가 일어섰다. 첼로를 원 상태로 놓고 활을 기대어 놓았다. B에게 다가갔다. 소리를 집어삼키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발소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손을 뻗었다. 어둠에 파묻힌, 짙은 응달이 진, 어둡고 눅눅한 냄새만큼이나 희고 빛바래고 주름진 얼굴을 가벼이, 그러나 신중하게 쓸어내렸다.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B이 눈을 떴다. 눈꺼풀 아래서 내리깐 눈동자가 드러났다.


“A.”


B이 중얼거렸다. 숨이 섞인 목소리였다. A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떼어냈다. 등을 돌렸다. 입을 달싹이다가 그는 물었다.


“오빠가 잠든 줄 알았어.”


B의 대답을 듣는 대신 A는 걸음을 옮겼다. 뒤따르는 걸음이 느껴졌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상상했다. B은 지금 어떤 표정으로, 무슨 낯을 하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까. 두려움이나 걱정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버릇에 가까웠다. 누군가를 살피는 건 모든 장사의 기본이었다. 상대가 불쾌해하지 않도록, 꺼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다가가는 것.


B은 캐묻지 않았다. A는 나서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서 일 층으로 돌아갔다. 모퉁이를 꺾어 돌자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짙푸른 녹음과 무더기로 핀 꽃들. 길게 늘어지는 햇살과 딱 그만큼 짙은 그림자가 올리브색 눈에 비치는 순간.


A은 제게 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


 


이후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그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간만의 일상을 평화롭게, 정말 일상적으로 보내기 위해서 그는 최선을 다했다. B은 종종 A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시선에 담긴 주저는 햇살이 짙어질수록 조금 다른 감정, 이를테면 주어가 보다 확실해진 망설임이나 때를 기다리는 듯한 인내로 변모했다.


완연한 주홍이 거실을 뒤덮었을 때. 그들이 거리를 두고 소파에 앉아 있을 무렵. 넘기지 않은 책장, 손끝에 걸린 종이가 세월처럼 주름이 졌을 바로 그 순간, B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나?”


A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대답한 직후 그는 알았다. 부정이라기엔 터무니없이 빨랐다. B은 A을 잘 알았다.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


B이 그를 바라보았다. 기다리는 것 같았다. A가 고개를 떨궜다. 올리브색 머리칼 위로 주홍 너울이 울렁거렸다. 눈이 부시다. 눈가에 맺힌 빛이 곧 떨어져 흐를 것 같다. 속절없는 마음으로 A가 발에 힘을 줬다. 그림자를, 더욱이 짙어진 그림자를 문질렀다.


“색이 너무 짙어. 그래서 눈이 부셔.”


입안에 머금은 말 대신 A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색채가 너무 짙었다. 사방이 온갖 색깔로 범벅이었다. 눈이 시렸다. 꿈속에서는 이렇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곳은 온통 하얬다. 눈이 아프게 희고 깨끗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A는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도 꿈꿀 수 있냐는 논의는 무의미했다. 무방비하게 서 있다가 기차와 충돌한 사람처럼, 딱 그만큼 급작스러운 마음으로, 튕겨 나온 A는 의문점에 다다랐다. 풀이 자라고 해가 뜨고 지고 그림자가 짙은 이곳에서. 그들의 심장만큼은 뛰지 않는 이곳에서. 그들이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시작할 수 있는 까닭이란 대관절 무엇인지.


죽음의 재경험이었다. 체감의 일종이었다. 피부에 얇고 긴밀하게 스미는 좌절과 엇비슷한 감각을 체화하는 과정이었다. 일시적이었다. 하지만 B의 소멸, 혹은 공백은 A에게 질문을 던졌다. 제 앞에 있는 B이 정말 B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이 모든 게 착각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언할 수 있을까.


풀이 자라고 해가 뜨고 지는 이곳에서 그림자는 이토록 짙다.


형언할 수 없는 형체로써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가.


B이 B이 아니라면. 그저 짙은 그림자뿐이라면. A가 착각하고 있다면. 벌써 떠난 사람이라면. 그의 발치에서 일렁였던 짙은 응달을 끄집어내어 그와 같은 형태로 빚어낸 것뿐이라면, A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게 짙어지고 있었다. 주홍과 청록. 빛과 어둠. 하다못해 감정과 침묵까지도.


바로 그때 B이 일어났다. 겹겹이 쌓이는 선율, 그렇게 두꺼워지는 음악을 닮은 적요를 깨고서. 두꺼운 카펫을 밟으며 그는 다가왔다. A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림자가 없었다. 아마도 사위가 이미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더 큰 어둠에 삼켜진 탓일 것이다.


B이 무릎을 꿇었다. 조심스럽고도 우아한 몸짓으로 그가 A를 안았다. 사람이 사람과 껴안았을 때 응당 느껴져야 할 온기나 심박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형체가 느껴졌다. 물리적인 물체가 피부에 닿는 감각, 그 확실성만은 존재했다. A가 고개를 들었다. 이마를 기댔다.


“네가 말한 적이 있지 않나. 떠나기 전 한 마디 정도는 해달라고.”


“…….”


“그때 내 대답을 기억했으면 좋겠군, A.”


당신 목소리가 공간을 울린다. 마치 심장과 같은 박동으로.


A가 고개를 숙였다. 입을 다물었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멈췄다. 벌어진 입에서 밭은 숨이 새어 나왔다.


B의 그림자가 A를 덮었다. 까치놀의 주홍이 그들 위로 온전히 스몄다. 발치에서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곁눈질했다. 조심스럽게 맞닿은 그들이 꼭 한 뭉텅이처럼 보였다.


어떤 감각에서는 말이 필요치 않다고, A는 그 순간 생각하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꿈을 꿨어.”


두서없는 꿈은 이야기가 되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B은 귀를 기울였다. A는 침착하게, 적어도 그러려고 애쓰면서 말을 이었다. 온통 하얗던 세계. 색채 하나 없이 푸르도록 희고 시리던 꿈. 모든 게 똑같았어. 오빠만 없었어. 당신 하나가 없어지니 전부 의미가 없어졌어. 적어도 그렇게 보였어.


그건 일종의 고해였다. 신자가 신부에게 올리는 것과 비슷한 형태로, 그러나 그보다도 밀접하고도 은밀한, 고백이라고 말할 수 없는 속삭임.


이야기를 마쳤을 때 B은 느리게 멀어졌다. 소리 없는 걸음을 옮겼다. 축음기 앞에서 그는 멈춰 섰다. A가 그랬듯이 손끝으로 돌아가지 않는 엘피판을 천천히 훑었다. 느리고도 우아한 손짓으로 그가 축음기를 조작했다. A는 그가 축음기의 진동판 위에 바늘을 올려두는 것을, 그 바늘이 판의 굴곡을 따라 회전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노래였지, 아마.”


빙글빙글 돌아가는 엘피판에서 손을 떼며 B이 말했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다. 떠났던 것만큼이나 소리 없는 걸음으로 그가 다가왔다. 느리고도 우아하게 B은 손을 내밀었다. 까슬한 피부가 맞닿았다. 서로의 손가락이 얽혔다. 조심스러운 손이 허리를 감쌌다. 등허리를 뒤덮듯이 감고 맞잡은 손을 뻗었다. B이 걸음을 뗐다. 음악에 맞추어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익숙한 춤이었다. 언젠가 그들은 이 춤을 춘 적이 있었다. 같은 노래, 같은 장소, 같은 자세로.


오늘만큼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B이 이끌고 A가 따른다. 이것이 과묵한 남자가 드물게 보이는, 연인 간 애정이 아니더라도 결국엔 사랑으로 명명될 무언가의 표현이라는 것을 A는 알았다. 발맞추어 전진, 박자에 맞게 후진, 고조되는 음에 흔들림을 절제하며 느리게 도는 한 바퀴.


저녁놀의 주홍이 얽히고설킨 인영 위로 쏟아졌다. 짙푸르고도 선명한 빛깔이 그들의 발자취 곳곳에 스몄다. 깊고도 넓게, 물들지 않는 일말의 공간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고동색 눈에도 주홍이 있었다. 눈꺼풀 아래서 거품 같은 형태로 일어나고 가라앉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떨리는 첼로에 맞추어 B이 천천히 맞잡은 손을 들었다. 헐겁게 얽힌 채로 A가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 잠시 멀어졌던 거리가 곧 가까워졌다. 그들은 조금 더 밀착했다. 빈틈없이 캔버스를 채우려는 화가의 맹렬한 붓질에 소리 없이 수긍하는 정물처럼.


눈이 부시지 않아. A가 그 순간 불현듯 중얼거렸다. 의도치 않은 순간에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서툴게, 동시에 고대하던 진실로 입술을 축인 고행자처럼 떨며, A가 멈춰 섰다. 잘게 흔들리던 손이 얼굴을 덮었다. 쓸어내렸다. 그러더니 B에게 향했다. 주름진 얼굴, 어둠에 물든 얼굴, 비스듬한 주홍빛에 젖은 얼굴을 매만졌다.


색채에 눈이 부시지 않다. 이런 적은 몇 번이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었을 때. 생동하는 것들이 고요해질 때. 적요하고도 조도 낮은 세계에서만 찾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낸 경험은.


개와 늑대의 시간, 가느다란 시침과 분침 사이에 우두커니 선 채로 A는 담담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직감했다.


당신은 떠나지 않아.


이 세계에서 해가 지고 뜨는 한. 선연한 주홍이 우리 저택을 통째로 집어삼키기를 거듭하는 한, B는 A을 떠나지 않는다.


“파도 소리가 났다면 좋았을 것을.”


B이 작게 중얼거렸다. A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 그 안에서 부서지고 뭉치기를 거듭하며 자신을 적시는 포말 같은 색채를 오래도록 들여다보며, A가 속삭였다.


“내겐 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