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6천 자, 실제 작업물, HL, FF14 기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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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4:06

잊었던 기억은 불현듯, 돌부리에 걸리는 발만큼이나 무심코 되돌아온다. 좁은 사각형 연구실 안에서 A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 애당초 사람을 많이 품기 위해 설계되지도 않았다. 고작 두셋, 많아야 네다섯. 좁은 연구실 안에는 온갖 기계와 조종간이 들어차 있었다. 그것들이 일제히 짙푸른 잔광을 흩뿌리며 울렁였다. 이 연구실이 유달리 비좁은 까닭을 A는 알았다. 애당초 이곳에선 많은 사람이 환영받지 못하니까. 파문을 일으키듯 요동치는 푸른 빛이 뺨을 적시며 미지근한 열기를 전한다. 메마른 볼을 문지르며 A는 생각했다. 어쩌면 기억을 자원 삼았을 때부터 이 모든 건 예정되었는지 몰라.


A 앞에 놓인 건 일종의 저장 장치였다. 자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표백되기를 기다리는 찌꺼기 기억들이 모이는 곳. 오로지 효율만을 기대하고 설계했기에 장치 안에선 온갖 기억이 엉망으로 뒤섞이곤 했다. 주기적으로 점검하기 위해 시스템을 뜯었을 때 A는 종종 바지만 입고 하늘을 질주하는 말이라거나 분홍색 눈물을 흘리는 물망초 같은, 있을 수 없는 기억을 목격하고는 했다. 제각기 다른 파편들이 오랫동안 장치 안에서 동고동락하며 하나로 뭉친 탓이었다. 다른 시선으로 본다면 의도된 결과기도 했다.


장치는 수없는 기억을 손쉽게 표백할 수 있도록 하나로 뭉개는 역할로 변질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되었다. 기억들은 오래도록 장치 안에서 머물며 끈적끈적한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을 무렵에야 표백 시스템으로 넘어갔다. 저장 장치 안에서 기억이 오롯이 존재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을 알았기에 A는, 지금, 이 순간, 제 앞에서 피어난 기억의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홀로그램에는 ‘A’가 있었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껏해야 몇 년쯤 앳되어 보였다. ‘A’의 곁에는 마찬가지로 미세한 차이를 보이는 ‘칼릭스’가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홀로그램을 멈췄기에 ‘칼릭스’와 ‘A’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우두커니 멈춘 채였다. A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의 기억을 읽었다. 아마도 칼릭스가 부여했을 기억의 이름은 간단했다. ‘1’. 저장 시기마저 삼백여 년 전이다.


망설이던 A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재생 버튼을 누르자마자 홀로그램 기억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잡음 하나 없이 ‘A’와 ‘칼릭스’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소리는 없었지만 그들은 열성이었다. 파일철을 앞에 두고서 치열하게 의견을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종착지에서 홀로그램이 누군가를 바쁘게 빚어냈다. 스펜이었다. 아직은 왕관을 쓰지 않았다. 구현을 마치자마자 ‘스펜’이 달려왔고, 그의 손에 붙들려 ‘A’와 ‘칼릭스’는 어디론가로 끌려가다가 사라진다. 그게 끝이었다.


저장된 기억이 끝났다는 것을 직감하자마자 홀로그램은 다시 생성되었다. 그리고 직전과 똑같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미세한 각도조차 변하지 않은 기억을 다시금 재생했다. 대화를 나누는 칼릭스와 A, 나타나는 스펜, 스펜의 손에 붙들려 이끌리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그들 셋. 멈춰야 한다는 자각도 없이 A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하고 좁은 방에서 홀로그램은 지나치게 밝았다. 눈이 아프다고 그는 무심결에 생각했다.


이상했다. 자그마치 삼백 년이었다. 이름으로 추정하자면 저장 장치에 넣었던 최초의 기억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삼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게 온전한 형태를 유지했다니. 우악스럽게 몰린 기억이 뭉개지고 짓눌리다가 하나가 되기까지는 길어야 열흘이었다. 영원인들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는 막대한 에테르가 끊임없이 필요했으므로 장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는 기억을 뭉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저 홀로그램 기억은 지나치게 멀쩡하다. 무언가가 개입하거나 뒤섞인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A는 장치가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알았다. 조건을 따져 온전히 보관할 기억을 일일이 따지지 않았다. 제삼자가, 이를테면 장치의 설계자가 직접 분리해 저장하지 않는 한.


칼릭스일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었다. 시간은 많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흘렀다. 그들의 표피는 풍화되지 않았으나 알맹이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재탄생했다. 이제 A에게는 심장조차 없다. 가슴께에 올린 손이 갈피를 잃고 더듬다가 옷자락을 쥐었다. 손끝에서는 자잘한 요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A는 떨고 있었다. 잘게 흔들리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알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건. 과거에의 향수도, 그리움도, 돌이킬 수 없는 파편을 목격한 데에서 오는 무력감 같은 것도 아니었다. 콕 짚어 하나라고 말할 수 없는, 말하자면 저장 장치 안에서 엉망으로 뒤섞여버린 기억 뭉치 같은 감정이 발치에서 일렁였다. 손이 저렸다. 눈가가 달아올랐다. 목이 메었고 흉곽이 조였다. 메마른 숨을 들이켰을 때 A는 부예지는 시야를 보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닦지 않기로 했다.


때맞추어 홀로그램 속에서 칼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익숙하지만 그리운 눈을 하고서 A를 바라보았다. 입을 열어서 알 수 없는 말을 읊었다. 그러다가 약하게, 아주 희미하게, 웃는다. 홀로그램이 푸른 잔광을 흩뿌렸다.


“A.”


눈물을 닦지 않고서 A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문간에 칼릭스가 서 있었다. 홀로그램 속 ‘칼릭스’와 똑같은 옷, 똑같은 머리, 똑같은 자세를 하고서. 눈이 마주쳤다. 칼릭스는 A와 그 뒤에서 빛나는 홀로그램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와 A를 지나쳤다. 손을 뻗어 홀로그램 조작 창을 열었다. 같은 움직임을 수없이 반복하던 홀로그램은 이내 멈췄다. 막 만들어져 첫 발을 내디딘 스펜과 그를 바라보는 A와 칼릭스는 파랗게 얼어붙었다.


“여기서 뭐해.”


칼릭스가 물었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다. A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돌렸다. 발광하는 홀로그램에서 넘실거리는 파랑이 그의 얼굴을 함빡 적셨다. 눈이 시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이건 어떻게 찾았어?”


A가 대답하지 않자 칼릭스는 질문을 바꿨다. 멈춘 홀로그램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A가 대답했다.


“점검하다가.”


“아직 차례가 아니라서 저장해두었을 뿐이야. 때가 되면 저장된 다른 기억과 같아질 거야.”


칼릭스가 말했다. 그러니 신경 쓸 것 없다는 말이 뒤따랐다. 어쩌면, 하고 A는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닐지 몰랐다. 칼릭스는 철저한 사람이니까. 이 기억도 꼭 필요한 곳에 사용하기 위해 저축해둔 것일 수도 있었다. 다만 그 꼭 필요한 곳이 어디일지 A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칼릭스가 아니니까.


“삼백 년 동안?”


그래서 A는 물었다. 반투명한 홀로그램 너머에서 좁은 방이 비쳤다. 칼릭스의 입술은 반쯤 열려 고정되어 있었다. 굴곡진 뺨을 따라 기계적인 그림자가 졌다.


“앞으로도?”


“…….”


“언제까지?”


A가 중얼거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A는 마침내 홀로그램에서 시선을 뗐다. 제 곁에 선 칼릭스를 보았다. 좁은 방, 기운 그림자 속에 선 칼릭스의 발치에서 홀로그램의 푸른 잔광이 장막처럼 일렁였다. 영역을 표시하는 선처럼 선명하게 흔들렸다. 칼릭스는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A를 응시했다.


“왜 울어?”


대답 대신 칼릭스는 질문하기를 선택했다. A는 그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따라서 말꼬리를 잡지 않고, 그가 돌린 주제를 다시 꺼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손을 들었다. 멎지 않는 눈물이 뺨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닦지 않고 그저 받는다. 손바닥에 떨어지더니 천천히 고이기 시작하는 눈물을 내려다보며 A는 생각했다. 그러게. 왜 우는 걸까. 이 불합리한 행동에 대관절 무슨 의미가 있기에.


그들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였다. 육체에 구애받지 않고 죽음을 뛰어넘었다. 동력만 충분하다면 억겁을 살 수 있었다. A는 영원인이었다. 사람 이상의 존재였다. 칼릭스는 영원인을 설계할 적 부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인간에게서 불필요한 요소를 전부 삭제했다. 설계대로 탄생한 A에겐 단단한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A가 부여받은 육신에는 피가 흐르지 않고 그렇기에 심장 또한 없다.


이해할 수 없다고 A는 중얼거렸다. 영원인을 설계할 때 칼릭스는 눈물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걸까. 그래서 지우지 않은 걸까. 하지만 애당초 심장조차 없는 우리가 어떻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말이야. 심장 없는 존재가 흘리는 눈물은 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졌느냔 말이야.


너는 그 답을 알까, 칼릭스.


푸른 휘광을 머금은 눈물이 짙푸르다. 손아귀에서 흔들릴 때마다 물방울이 부딪히고 깨지며 저들끼리 뒤섞였다. 그렇게 점점 몸을 부풀A. 멈춰 선 홀로그램은 여전히 푸르게 빛나고 우리도 한때 온갖 색채로 빛났던 것만 같은데…….


“왜 만들었어?”


“…….”


“네가 꿈꾼 영원인은 눈물이 필요한 존재였어, 칼릭스?”


A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칼릭스를 바라보지 않았음에도 A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다. 단순한 존재의 자각 이상으로 공명하고 있었다. 심장이 없는데도 그들은 온전히 무심할 수 없다. A는 그럴 수 없다. 때때로 심장이라는 건 단순한 장기 이상의 것이라서. 삼백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은 끊임없이 탈피를 시도했다. 그리고 거듭해서 실패했다. 작고 옹골차게 응집한 마음은 내려놓기에 지나치게 무거웠다.


칼릭스 또한 그럴까?


이것이, 파랗게 울렁이는 홀로그램이, 온전히 보존된 삼백여 년 전의 기억이, 실패의 증명일까?


미약한 한숨과 함께 칼릭스가 다가왔다. 그가 다시금 손 뻗자 이번엔 홀로그램이 완전히 꺼졌다. 좁은 방안에 잔광조차 남기지 않고서 사라졌다. 홀로그램이 존재했던 허공을 올려다보던 A를 붙잡은 건 어김없이 칼릭스였다. 어깨를 붙들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뿌리칠 수 없는 인력에 이끌려 가까워진다. 그렇게 칼릭스가 A를 끌어안았다.


“그만하고 가.”


“…….”


“할 일이 많이 남았어. 무엇보다, 계획 실행이 지척이야. 목표를 코앞에 두고서 발목 잡힐 수는 없어.”


버릇처럼 A는 눈을 내리깔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맞닿은 가슴에 집중했다. 그리고 매일 같이 들었던 익숙한 소리를 찾으려 했다. 바짝 닿은 가슴, 그 얇은 거죽 너머에서 심장이 힘차게 박동할 때마다 몸은 함께 울렸다. 가깝게 댄 가슴에서부터 온몸으로 심장 박동을 따라 온기가 퍼지곤 했다. 때때로 맞닿은 심장은 마치 공명하듯 서서히 박자를 맞추었고, 어느 순간 하나로 뛰며 서로의 존재를 확립했다.


느껴지지 않아, 하고 A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비록 서로를 끌어안은 채지만 그들에겐 피차 심장이 없다. 삼백 년 전 그들은 심장을 버렸다. 인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들의 변화는 돌이킬 수 없음에 대한 가장 큰 반역이었다. 죽음마저 돌이킬 수 있도록 그들은 심장을 버리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눈물이 나는 건.


눈을 내리깔고서 고요히 의문을 품는다. 의도와 오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A는 흔들렸다.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느리게 돌려 홀로그램 영사기를 바라본다. 조금 전 그곳에 떠올랐던 짙푸른 기억을, 좁은 방을 적셨던 파란 잔광을 곱씹는다. 그러며 가만히 중얼거A. 슬픔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애당초 그들은 슬픔을 전유할 수 없다. 하지만 때로 눈물은 인간성을 증명하는 방식이 된다.


칼릭스. 삼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너는 한 번이라도 눈물을 흘린 적이 있을까.


네 안에 마지막 한 모금의 눈물이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제 욕심에 불과할까?


아마도 오류일 것이라고 A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동시에 칼릭스에게도 같은 오류가 존재하리라 추측했다. 그들은 같은 설계도를 공유했다. 제가 삼백 년간 흘린 눈물과 같은 양의 슬픔이 칼릭스에게도 있을 것이다. 제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슬픔은 흘러내렸을 수도, 단단하게 굳었을 수도 있다. A는 제가 모든 것을 안다고 자만하지 않았다. 그들은 밀접한 관계와 거리를 나누었으나 그게 전부가 될 수는 없으니까.


적어도 A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물기 없는 칼릭스가 맺혔다. 거꾸로 맺힌 잔상이 A를 올려다보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떨어졌다. 흰 가운을 어둡고 둥글게 적셨다. 칼릭스가 손을 뻗었다. A의 눈가를 손끝으로 천천히 훑더니 이윽고 낮게 말했다.


“돌아가자.”


고요한 목소리가 좁은 방을 울A.


잠시 후 A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