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명명백백해졌다. 영웅의 시신이 도난당했다.
실없이 뺨을 문지르며 그라하는 텅 빈 관을 내려다보았다.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어서 오히려 놀랍지도 않았다. 정신이 아득해지기는 했지만 뭐랄까, 두려움이나 분노라기보다는 그냥 영 멍했다. 살살 저리기 시작한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며 직전 제가 읊었던 말을 살짝 고쳤다.
명명백백했다. 영웅의 시신이, 따지고 보자면 대략 반쯤, 도난당했다. 아니, 반의반? 반의반의 반?
“무슨 생각해?”
“도난이라는 단어가 이 상황에 어울리는지 모르겠어.”
곧이곧대로 대답하자 상대가 킬킬 웃었다. 퍽 즐거워 보였다. 유감스럽게도 그라하는 분위기에 동참할 수 없었다. 삽을 대신했던 주술봉을 질끈 쥐며 그는 눈을 찌푸렸다. 텅 빈 관과 제 앞에 우두커니 선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결론을 내리려 애썼다.
첫째. 관에 안치되었던 영웅의 시신이 사라졌다. 이것은 명징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둘째부터 뭔가 좀 이상해졌다. 사라진 영웅이 그라하의 눈앞에 우뚝 서 있었으니까. 바로 거기서부터 이 모든 사건이 어지럽게 뒤섞이기 시작했다.
경위는 대강 이러했다. 새로운 논문 발표에 앞서 그라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요 며칠 새벽에 잠드는 것이 거의 일상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밤 열두 시 정각에 그라하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온갖 증빙 자료와 참고 문서로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필사적으로 이겨내며 자신을 침대로 이끌고자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현관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대개 무슨 일이 벌어진 사람 혹은 상황이 아니라면 밤 열두 시 정각에 타인을 찾아오지 않았다. 노크 소리를 들었을 때 그라하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대형 사고였다. 그는 이맘때쯤 일어날 수 있는 사고, 이를테면 고위 마물 출현 같은 것을 상상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기껏해야 총사령부 전령의 성마른 재촉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거기에는 예상치 못한 사람이 있었다. 목 잘린 영웅이 경쾌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넨 것이다.
소름 끼치는 경험이었어. 꼿꼿하게 선 귀를 만지작거리며 그라하는 영웅을 힐끔 바라보았다. 첫 조우 이후로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그들은 대화를 나눴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을 때 영웅은 당최 알 길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가벼웠으나 거짓을 고하는 사람처럼 들리지는 않았기에 그라하는 우선 넘어갔다. 혼란에 빠져 말을 잃은 그라하를 향해 영웅이 건넨 건 짧은 한마디였다.
그런데, 나 목이 없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건. 안다고 대답한 직후 그라하는 난처해졌다. 두 눈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영웅은 그라하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며 다시 한번 말한 것이다. 눈을 떴는데 눈이 없었어, 라고.
그들이 야심한 새벽 세 시에 로브를 휘감고 산을 오른 건 전부 그 때문이었다. 그라하는 영웅의 증언을 몹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죽은 사람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라하는 확인해야만 했다. 육 플름 아래에 묻혀 있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영웅의 관은 들짐승이 파헤친 것처럼 지상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채였다. 약간의 속상함과 큰 의심을 품고서 그라하는 손을 뻗었다. 심호흡하고서 뚜껑을 열었고, 지금 이 사태를 마주했다.
그라하는 생각을 정리하고자 애썼다. 그러니까, 목 없는 영웅은 정말로 ‘영웅’인 모양이었다. 관뚜껑에 박아 넣었던 대못은 온데간데없었고, 접합부는 헐거웠다. 정말로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한 번쯤 열었다가 닫은 모양새였다. 정황상, 하고 중얼거리며 그라하는 영웅을 힐끔 곁눈질했다. 저 목 없는 영웅이 정말로 에오르제아의 영웅, 새벽의 혈맹 최대 전력이었던 모험가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점점 굳는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째서 영웅은 목이 없는가?
영웅을 안치할 때만 하더라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영웅의 사지는 멀쩡했다. 한때 배신의 흔적이 목에 짙게 남았으나 그것이 절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되레 영웅의 몸은 훼손보다는 그 반대의 의미에 어울렸다.
그라하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는 단순히 잠든 것 같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얼굴 근육은 마치 그가 긴 단잠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보였다. 자리에서 뛰쳐나간 알리제가 관을 덮쳤을 때, 인제 그만 일어나라고 고함을 질렀을 때, 발악하는 알리제를 관에서부터 뜯어낼 때. 사정없이 흔들리던 좁은 나무 틀 안에서 영웅은 미동하지 않았다. 그라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죽음을 실감했었다.
그 평온한 얼굴은 어디 갔지. 식은 흙 한 줌만 남은 관을 내려다보며 그라하는 생각했다. 멀쩡히 잘 붙어 있던 목을 누군가가 자른 걸까. 몸은 버리고 머리만 챙겼나. 하지만 그건 망자를 향한 끔찍한 수준의 모욕이다. 영웅은 ‘영웅’이었다. 에오르제아에서 그의 이름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는 모두의 존경과 지지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묘를 파헤쳐 목을 잘라 가져간다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기실 이런 일을 방지하고자 에오르제아 총사령부에서 경비를 자처하기도 했다.
잡생각이 태피스트리처럼 얽히고설킬 때였다.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영웅이 성큼 가까워졌다. 엇, 하고 탄식하는 그라하를 지나치더니 관 근처에 쪼그리고 앉았다. 머리가 있었다면 관 안쪽을 살피는 듯한 모습이었을 행동을 몇 번 하고서 두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뜻 모를 행동의 연속에 그라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 하고 물으려는 찰나 영웅이 관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빛바랜 투구를 꺼냈다.
“좋아. 기대되는걸.”
“뭐가?”
“모험이야, 그라하.”
투구를 뒤집어쓴 영웅이 힘차게 말했다.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세차게 뛰기 시작한 탓에 반사적으로 가슴께에 손이 올라갔다. 겹겹이 덧입은 옷자락이 손아귀에 말려들어 갔다. 심장과 함께 공명하듯 떨며 그라하가 단어를 발음했다. 모험.
모험이라고?
영웅과 함께?
전율은 찰나였다. 그라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꾹 쥐었던 손에서 힘을 풀고 영웅을 바라보았다. 녹슬기 시작한 투구는 가장자리가 거뭇거뭇했다. 저걸 맨얼굴에 쓰면 간지럽지도 않을까, 쇳독이 오를 것 같은데, 하릴없는 생각이 어울리지 않는 순간에 불쑥 떠올랐다. 속절없이 한숨을 내쉬며 그라하가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안 돼.”
“왜?”
“이 상황은 그다지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려우니까. 우선은 혈맹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조금 더 조사해 보는 편이 낫겠어. 야슈톨라나 위리앙제라면 상황을 정립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흠.”
대꾸조차 되지 못한 반응과 함께 영웅이 팔짱을 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그라하는 상대가 제 판단을 불만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말 없는 대치가 짧게 오갔다. 항복 선언은 그라하의 몫이었다. 이번에도.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
“찾으러 가자.”
“뭐를?”
“내 머리.”
그러며 영웅은 손가락으로 투구를 톡톡 쳤다. 빈 깡통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데 웃음이 났다. 입꼬리를 씰룩일 때였다. 영웅이 말을 이은 건.
“머리가 있어야 원 없이 성불할 수 있을 것 같달까.”
차마 웃어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손끝이 차게 언 것을 들키지 않으려 그라하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런 말은 비겁해, 영웅.”
“그런가?”
“그렇게 말하면 수긍할 수밖에 없잖아.”
영웅이 철없이 킬킬거렸다. 지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기에 그라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걸음을 떼면서 그는 영웅을 한번 돌아보았다. 영웅은 그 뒤를 따랐다. 약속했다는 것처럼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비탈진 산길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둠을 헤치고 나서며 그라하는 종종 고개를 꺾어 들었다. 검푸른 하늘엔 별조차 없었다. 희끄무레한 달무리만이 거의 유일한 빛 같았다. 반투명한 유백색이 그들 위로 울렁거렸다. 마른 가지와 낙엽을 밟을 때마다 들리는 바스락거림 따위에 신경을 쏟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하릴없는 마음으로 그라하는 영웅을 보았다. 그가 쓴 투구를 보았다. 이렇게 보니 영웅은 정말로 ‘영웅’ 같았다. 그는 항상 투구를 썼으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살아생전에는.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그라하는 손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향수는 급작스럽고도 우악스럽게 그를 덮쳤다.
영웅은 갑작스럽게 죽었다. 손 쓸 틈조차 없었다. 라그나로크로 돌아왔을 당시만 하더라도 그는 살아 있었다. 치유 마법을 쏟아붓자 잠시나마 멎었던 심장은 도로 뛰었다. 새벽은 안심했다. 급한 대로 봉합한 상처는 올드 샬레이안을 돌아가 제대로 치료하자고 말했다.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떠났던 길을 되돌아왔다. 올드 샬레이안에 다다라 첫 승전고를 울렸다. 환호는 우렁찼다. 영웅은 천천히 배에서 내렸다. 아이테리스에 첫 발을 디뎠다. 숨을 들이켜듯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숨이 멎었다.
장례식을 끝마치고 나서 그라하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자책과 자학, 슬픔과 분노, 부정과 절박함으로 얼룩진 몇 달을 보냈다. 생각의 갈피조차 잡지 못하는 그라하에게 논문이라도 써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건 산크레드였다. 매진할 목표가 있다면 조금이나마 마음을 환기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그라하는 받아들였다. 주제를 선정하고 자료조사에 돌입했다.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반년이 넘도록.
참고 자료와 시료 속에 파묻혀 있던 그라하를 끄집어낸 건 어김없이 영웅이었다. 비록 목이 없었지만.
“어디로 가는 거야?”
영웅이 물었다. 그라하는 멈춰 서는 대신 걸음을 재촉하며 대답했다.
“경비대. 거기가 네 묘지 경비를 담당하거든.”
“인력이 남아도나?”
“그럴 리가. 네 묘지니까 그렇지.”
“흠.”
영웅은 무언가를 더 묻지 않았다. 되레 고심하는 것처럼 말이 없어졌다. 그라하는 먼저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다가 관두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안부를 묻자니 돌아올 대답이 무서웠다. 그렇다고 제 이야기를 하자니 지나치게 초라해질 것 같았다. 그들은 침묵했다. 간간이 제게 닿는 형체 없는 시선이 느껴졌으므로 그는 걸음을 더 재촉했다.
숲길을 밝히는 횃불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경비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으므로 그라하가 조금 더 빠르게 걷기 시작할 때였다. 차갑고 단단한 무엇인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영웅이었다. 투구 너머 새까만 어둠이 자신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하고 묻자 그는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사뭇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이거 봐.”
“뭘?”
영웅이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마른 나뭇가지였다. 나뭇잎이 하나 붙은 가지를 정수리에 어찌저찌 꽂아 세우고서 그라하를 바라보았다. 턱에 손으로 꽃받침까지 만들고서 영웅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머윗 요정.”
자각하기도 전에 웃음이 터졌다. 풋. 직후에 약간의 낭패감이 몰려왔다. 부끄러움은 덤이었다. 아마도 벌게졌을 뺨을 문지르며 그라하가 고개를 돌렸다. 멈췄던 걸음을 도로 뗐다.
“이럴 때가 아니야.”
“그래?”
“서둘러야지.”
그라하가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영웅이 다시 그라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마주쳤다. 각 잡힌 율동이었다. 자신의 용맹함을 정중하게 드러내는 것만 같은 춤. 절도 있게 손을 내뻗고 스텝을 밟다가 딱 소리를 내며 멈춘다. 그리고 다시, 빙그르르 한 바퀴 돌고 마저 스텝. 그라하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허공에 찌르는 바람에 그라하는 다시 한번 속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해, 영웅! 정말이지…….”
“신사의 춤인데. 웃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라하가 손으로 얼굴을 몇 번 부채질했다. 정말로 이럴 때가 아닌데. 흘기듯이 영웅을 바라보자 그는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저 결백하단 몸짓이 약간은 열받고, 또 조금은 좋았다. 입매에 묻었던 웃음은 손으로 닦이지만 한껏 가벼워진 기분은 지워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고마워.”
“뭐가?”
시치미를 떼는 영웅에게 시선을 한번 던졌다. 구태여 하나씩 열거하는 대신 그라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새벽 네 시에 다다른 시각이었음에도 경비대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횃불 옆에서 두 보초는 그라하를 발견하자마자 바짝 각을 잡고 경례했다. 그들은 그라하를 뒤따라온 영웅을 보고서 놀란 눈치였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두 쌍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라하는 자신이 안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비대는 에오르제아 총사령부에서 파견 나온 장병들이었다. 그들이라면 영웅의 외형 정도는 알 터였다. 몇몇은 장례식에 직접 참여까지 했을 것이다.
“경비대장을 만나고 싶어. 연락을 넣어줄 수 있을까?”
“아,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장병 하나가 다시 한번 경례하고는 등을 돌렸다. 남은 한 사람이 그라하와 영웅을 번갈아 힐끔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다는 것처럼 입을 오물거렸지만 군인의 본분을 잊지는 않았다. 그라하는 장병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심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경비대장이 만남의 뜻을 밝혔을 때, 그래서 마침내 집무실로 들어서게 되었을 때, 그라하는 진심 어린 감사를 담아 장병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경비대장의 반응은 장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부랴부랴 준비한 태가 났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틀어진 넥타이 같은 것이 눈에 띄었으나 굳이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경직되어 있던 경비대장은 그라하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영웅을 보고 더더욱 안색이 어두워졌다. 긴장이 역력한 경비대장을 향해 그라하는 한번 웃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새벽에 갑자기 미안해.”
“아닙니다. 마침 깨어 있었습니다.”
딱딱한 어투로 대장이 말했다. 잠시 입을 다문 그는 눈치를 보듯 조심스럽게 영웅을 곁눈질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저분은…….”
“설명하자면 복잡해서. 바로 용건으로 들어가도 될까?”
“아, 아. 네. 물론입니다. 무엇입니까?”
경비대장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라하는 입을 열기 전 영웅을 한번 바라보았다. 대장의 집무실을 찬찬히 둘러보는 듯한 영웅의 목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투구를 씌워두기를 잘했다고 그라하는 생각했다. 뭐라도 얹어두니 정말로 머리가 멀쩡히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요즈음에 영웅의 묘를 들른 사람들이 있을까?”
“으음, 조문객은 항상 많았습니다.”
“역시 그런가. 그럼, 어젯밤이나 오늘 새벽 도중에 수상한 연락을 받은 적은 없고?”
경비대장의 입매가 단숨에 굳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뒤적인 그는 곧 바짝 힘을 준 몸짓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상은 없었습니다, 하고 외치는 목소리에는 이전과 다른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라하가 눈을 살짝 찡그렸을 때였다. 뒤에서 배회하던 영웅이 슬그머니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오해한 모양인데.”
오해일까? 경비대장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이 무엇이든 간에, 그라하는 그것이 지금의 작태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일부러 죄 없는 경비대를 들쑤실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시시비비가 명확히 갈린 이후에 책임을 물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긴장한 경비대장이 거짓말을 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고.
“수호천절을 맞이해서 근래에 조문객이 평소보다 조금 늘었습니다. 따라서 경비대 또한 경비를 빈틈없이 하고 있습니다. 삼십 분 단위로 정기 보고를 받고, 이례적인 일이 발생한다면 즉시 연락을 올리도록 일정을 짜두었습니다만 기록지에는 별다른 이상이 적히지 않았습니다.”
“수호천절?”
“요맘때가 그렇다더군요.”
날이 벌써 그렇게 됐나. 뜻밖의 정보를 얻었다. 온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날짜 감각이 영 모호해진 모양이었다.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그라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요청을 받아줘서 고마워, 하고 말하니 경비대장은 각 잡힌 경례를 했다.
나서는 길에 장병이 그라하를 잡았다. 그는 영웅의 눈치를 연신 보더니 슬그머니 그라하를 끌고 영웅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영문 모를 행동이었다. 의아해하는 그라하를 향해 장병은 한껏 낮춘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심하십시오.”
“응?”
“수호천절이잖습니까. 영 신경 쓰여서 말입니다.”
뒤통수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멀지 않은 곳에 선 영웅이었다. 장병이 그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을 눈치챘는지 다가오지는 않았으나 그들을 주목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라하는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여겼는지 장병은 두 손을 질끈 쥐고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수호천절에는 온갖 마인들이 인간 행세를 하며 뒤섞여 든다지 않습니까.”
“…….”
“이맘때쯤이면 그런 신고가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인간 행세한 마인이 사람을 다치게 했다거나, 처음 보는 친구와 놀러 나간 아이가 실종되었다거나……. 설령 마인들에게 악의가 없을지언정 그들을 조심해야 하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장병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제야 그라하는 장병이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영웅을 돌아보지 않으려 그는 목에 힘을 주었다.
“영웅님과 지나치게 닮았잖습니까. 저 사람.”
“음, 뭐.”
“마인이 기승을 부리는 시기입니다. 그들의 골치 아픈 장난에 휘말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는 저게 장난인지 모욕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장병은 당부와 당부를 거듭한 끝에 떨어졌다. 격식 있는 경례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하러 돌아갔다. 그라하는 잠시간 서 있다가 걸음을 돌렸다. 영웅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약돌 하나가 영웅의 발등에서 일정한 박자로 튀었다. 지체하지 않고 그라하는 영웅의 어깨를 툭 쳤다. 그는 놀라우리만치 싸늘했지만 그라하는 어째서인지 냉기가 새삼스럽지 않았다.
“별 소득이 없었네.”
그라하가 중얼거렸다. 영웅이 그러게, 하고 말을 받았다. 그들은 잠시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푸르던 하늘이 어느샌가 완연한 검정이었다. 보이지 않는 별을 헤아리듯 한참이고 올려다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걸음을 뗐다. 그리고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입술을 길게 물고 침묵하며 그라하는 생각했다. 수호천절. 마인이 기승을 부리는 시기. 그리고 아무런 이상도 보고받지 못한 경비대.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지나치게 차가운 몸과 존재하지 않는 머리는 또 무엇을 시사할까. 그라하는 버릇처럼 손을 들어 심장께에 올렸다. 모험, 하고 입술을 오므려 속으로 발음했다. 심장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다시 영웅, 하고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확실한 박동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산발적인 박동이 단순 무식한 기쁨이나 희열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미약한 기대와 한 몸에 엉겨 붙은, 질척하게 덩어리진 감정이었다. 주먹만 한 덩어리를 내려다보면서 그라하는 스스로 물었다. 만일 영웅이 아니라면. 정말로 마인의 소행이라면. 추궁 끝에 그냥 장난이었다는 말이 돌아온다면. 그라하 티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반대는 또 어떻고. 영웅이 ‘영웅’이면. 정말로 살아 돌아온 거라면. 머리를 찾아주는 게 옳은 일일까? 잠든 그는 그토록 평안해 보였는데도?
모르겠다. 영영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그라하가 당도한 것이 바로 그러한 종류였다. 정처 없는 걸음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말아쥐었다. 어느덧 다다른 숲길 초입에서 그는 멈춰 섰다. 영웅도 뒤따라 멈췄다. 경비대가 피워둔 횃불만이 그들을 감쌌다.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투구를 뒤집어쓴 영웅을, ‘영웅’의 초상을 바라보며, 그라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응?”
“너는 누구야?”
투구가 갸우뚱 기울었다. 강철 너머에서 끔뻑이는 눈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서 그라하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영웅은 이제 없어.”
“…….”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알아야 해. 내게는 그럴 의무가 있어. 오히려 질문하기엔 지나치게 늦은 걸지도 모르지.”
잠시 뜸을 들이던 영웅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등을 돌리더니 걷기 시작했다. 그라하는 초조하게 입술을 씹으며 뒤따랐다. 타오르는 횃불이 비추는 길을 따라서 그들은 걸었다. 비탈진 길 중턱에 다다랐을 때 영웅이 평온하게 운을 뗐다.
“좀 서운한데. 못 알아보다니.”
“그렇다는 건,”
미약한 기대를 안고 되물었다. 하지만 영웅은 군말 없이 고개만 갸우뚱 기울였다. 가벼운 몸짓에 그라하의 기대도 함께 꺼졌다.
“수호천절이잖아.”
“……정말로 마인이야?”
“어때 보여?”
“장난칠 마음은 없어. 마인이라면 당장 돌아가도록 해. 이건 그를 향한 모욕이나 다름없어.”
영웅은 연기와 함께 마물로 변하거나 반투명해져 사라지는 대신 키득키득 웃었다. 가볍게 손을 휘휘 내젓는 영웅의 뒤통수를 따라가는 그라하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어느샌가 말아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알맹이가, 단단한 껍질에 쌓인 질척한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울컥울컥 역류하는 것만 같은 감각에 서서히 사로잡히면서, 그라하가 힘겹게 말했다.
“이해가 안 돼.”
“뭐가?”
“돌아온 거라면……, 정말로 돌아온 거라면.”
“…….”
“왜 모두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동료들이 보고 싶지 않아?”
영웅은 대답하거나 돌아보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이를 데 없는 초조함에 그라하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면, 누군가가 너를 소환했어? 모종의 술식 같은 게 있는 건가?”
“그건 좀 흥미로운 가설이긴 하네.”
“그것마저 아니면, 질책하는 거야? 너를 살리지 못한 우리를 향해서?”
그때 영웅이 멈췄다.
그들은 어느샌가 흐트러진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깊은 구덩이, 차게 얼어붙은 흙, 뚜껑 열린 관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그들이 떠날 적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라하가 두 손을 질끈 쥐었다. 대답이 필요했다. 채근하고자 입을 열었다. 그러나 영웅이 한발 빨랐다.
“수수께끼에 영 약하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 즐거움이 그라하의 입을 막았다. 영웅이 몸을 틀었다. 그라하를 보았다. 단단한 강철 투구, 그 속의 새까만 응시가 그라하를 향했다.
“모험, 어땠어?”
속절없이 그라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적으로 목이 메었다. 힘겹게 비틀어 열었지만 밭은 숨소리만 들렸다. 고작 한 마디였다. 단어 두 개로 이루어진 짧은 문장이었다. 그러나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 그라하의 머릿속에선 폭죽이 터지듯, 해일이 몰아치듯, 온갖 낱말이 급류를 타고 회오리쳤다. 하고 싶은 말이, 해야만 하는 말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라하 자신이 짓눌릴 만큼 아주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