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모드 토글 들여쓰기 토글
약 2천 자, 실제 작업물, 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기반 드림, 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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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4:08


리라를 켜며 앞장설 사람이 없어졌다. 그는 혼자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여자는 눈을 껌뻑였다. 바닥을 디딘 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핀다. 뺨을 몇 번 어루만졌다가 볼을 꼬집었고 미약한 통증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녹슨 철 냄새가 나는 손을 들어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기, 길을…….”


상황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길을 잃었다.


예상 밖의 사태였다. 그러니까, 여자의 단독 행동이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적어도 이 어둠 속에서는. 이건 말하자면 간단한 수습 혹은 연습, 또는 대체로 그와 엇비슷한 이름이 붙을 시도였다. 아직 일이 익숙지 않은 여자는 선임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으며 그가 하는 일을 두 눈으로 학습할 예정이었다. 애당초 들어간다던 괴담에 진입한다는 말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꾹 내리눌렀던 것도 전부 선임이 있어서였다.


괴담. 그래. 머리를 쥐어뜯던 손이 볼에 착 달라붙었다. 손톱으로 살을 긁듯이 손을 웅크리며 그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네. 괴담. 아, 어떡하면 좋지.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벌벌 떨리는 손으로 애써 숨을 삼키던 여자는 곧 직전 제가 내렸던 상황 판단을 철회했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따지고 본다면 조난일 것이다.


괴담, 어둠, 다양한 이름이 있었지만 결국 녹록지 않은 상황이라는 의미만은 같았다. 그러니 고난, 재난, 고립 따위의 표현이 잘 어울렸다. 마음을 먹는다면 탈출할 수 없지도 않을 테지만……. 속으로 뇌까리며 스스로 위로하려 애쓰면서도 여자는 제 판단에 불온한 의구심을 품었다. 정말 가능할까? 탈출, 그러니까, 어둠을 통째로 삼키거나 찢어버리거나 하는 종류의 일이 가능하다고는 건너 들어 알았다. 기실 애당초 ‘이렇게’ 되기 전 그는 연구원이기도 했잖은가.


문제는 가능 여부라기보다는 여지에 있다. 그런 식의 힘 응용은 여자가 ‘이렇게’ 변해버린 이후로, 혹은 그 이전으로도 써본 적 없으니까. 아니, 사실 가능할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울상을 지은 그가 낮게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애당초 이 어둠은 회사의 것이고, 멋대로 제압하면 안 되고, 삼켜도 안 되고, 뿌리째 뽑아버려도 안 되고, 같이 들어온 사람도, 반장님도, 제이 씨도 있고…….


정신 차려!


매서운 외침과 함께 그는 퍼뜩 눈을 떴다. 눈물로 얼룩진 낯을 두 손으로 문지르는데 머리 뒤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가만히 퍼질러 앉아 있다가 굶어 죽을 바엔 그 무거운 발을 움직이기라도 해, 멍청이야! 제 몸에 휘두르는 채찍질치고도 매서운 말들의 향연에 여자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가기 싫어, 하고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뒤통수를 후려갈기듯 울리는 고함은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널 두 쪽 내고 말겠어, 하고 선언하기에 그는 별다른 수가 없어 걸음을 뗐다.


여자는 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지 않을까? 괴담에 떨어져도 출근하고 야근하는 곳인데. 여기는. 그럼 내가 정신을 못 차려서 오염됐다는 소리야? 아니, 그게 아니라……. 정보가 있다는, 응, 그런 거지, 아주 중요하잖아. 덜덜 떨리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는 떠올린다. 신화, 신이 살던 시대의 이야기, 신과 인간, 반신과 요정, 지상과 지하, 사랑에 빠졌던 요정들의 이야기. 공통점이 전혀 없지는 않아, 하고 누군가는 속삭인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동족이었다는 거지. 신화시대에 살았던 요정, 사랑에 목맸던 요정, 하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죽고 하나는 지하로 끌려 들어가 죽고, 그러니까 하늘에서 태양을 쏘아 떨어트릴 수 없었다는 것과 리라를 켜줄 사람이 없다는 것.


그는 걸으며 생각한다. 한때, 한때에, 아주 오래전에, 그도 아니면 이곳에 들어오기 직전에, 분명히 누군가가, 옷매무시를 매만지면서, 깡마른 몸 위에 얹어두듯 입었던 옷, 그 품이 큰 외투를 매만지면서. 그때 그들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백열등 빛에 해묵은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졌고, 주의할 점과 안내 사항을 읊다가, 어둠과 신화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다가, 마치 오래 묵은 규칙이나 새삼스러운 결심을 곱씹기라도 하듯 무심한 어투로 말하기를,


도움을.


필요하면 얼마든지…….


“……케이 씨.”


 부름이 있다. 기척이 있다. 반사적으로 돌리려는 몸을 단단히 붙드는 단호한 힘이 등을 받쳤다. 망울진 숨을 들이켜는 순간 어깨를 붙든 손끝을 내려다본다. 품이 넉넉한 외투가 손등을 반쯤 덮었다. 앙상한 동시에 흉과 굳은살이 잔뜩 박인, 노련한 자의 손가락이다.


“돌아보지 마요……. 그대로 전진. 계속.”


“저, 저기,”


“지금도 잘하고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잠시 멈췄던 걸음을 느리게 떼며 여자는, A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손 떨림은 여전히 멎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다는 설명으로 자신이 지났던 공황에 가까운 당황을 뭉뚱그리면서, 여전히 멎지 않은 눈물을 두 손으로 문질러 닦으면서 중얼거렸다.


“죄, 죄송, 해요. 길, 길을…….”


“아니, 뭐…….”


“따라가려고, 해, 했는데.”


“괜찮아요……. 원래 그러기 쉬운 어둠이기도 하고. 금방 나가요…….”


미적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A이 걸음을 뗐다.


그들은 말없이 오랫동안 걸었다.


어둠이 한도 끝도 없었다. 스산한, 안개가 자욱하게 핀 길은 동서남북을 구분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A은 종종 멈춰 섰고, 용기를 내어 이곳에 맞는 길이냐고 물었으며, 그럴 때마다 등 뒤에 선 존재는 긴 말을 붙이는 대신 짧게 긍정했다. 마침표가 찍힌 후에야 A은 걸었다. 치솟는 불안을 누그러트리려 애쓰면서.


“거의 다 왔어요.”


“죄송, 죄송해요…….”


“괜찮다니까…….”


무력이라기보단 무기력에 가까운 목소리가 대꾸했다. 반사적인 사죄에 돌아온 반응을 곱씹으며 A은 입술을 짓씹었다. 멈춰 서는 대신 후들거리는 다리를 있는 힘껏 움직이기로 결심하면서. 괜찮다고 하시는데 자꾸만 사과하는 건 오히려 귀찮으실 거야, 그건 예의가 아니야, 귀찮게 할 수는 없어, 이런 마음도 들켜서는 안 돼, 속으로 끝없이 되뇌며 질끈 쥐는 주먹이 있다. 축축한 손아귀를 문질러 닦으며 삼키는 헛숨이 뻣뻣한 다리와 엇박자로 맞물렸다. 그러나 생각은, 생각만큼은 멈출 수 없다.


역시 귀찮으신 건지도 몰라. 발목을 잡아버려서.


애당초 그를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마저 실례일까? 하기야, 같이 들어간 경비반 신입이 실종된다면 이래저래 피곤해지기는 하시겠지. 그렇지만 내가 이런 종류의 부끄러움 혹은 죄송스러움을 느끼지도 않았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불쑥 솟는 충동 내지는 분노를 닮은 무엇인가가 뒤통수를 때리며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그렇다면, 뒤를, 돌아, 하고 외치는 순간.


“그.”


멀지 않은 곳에서 희끄무레한 빛이 번지기 시작한다. 목소리는 그와 함께 왔다.


“잘했어요. 부른 거…….”


“네, 네?”


“도와달라고 했던 거. 앞으로도, 음…… 그런 식으로 하면…… 될 것 같네.”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말한다. A은 반사적으로 멈췄다. 그러나 등을 부드럽게 미는 힘이 있었다. 이끌리듯이, 혹은 내몰리듯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인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그는 발을 내디뎠다.


상대에게 닿지 않기 위해 존재했던 한 요정의 부름처럼 A의 대답은 뭉그러진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존재하지 않는 리라 소리를 듣는다.


빛이 번졌다. 그래서 알았다. 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