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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6.04.  14:12

/ 퀘스트 : 라이나의 부탁



퀘스트 : 라이나의 부탁


보상 | ㅁㅁㅁ의 기쁨


개요 | 라이나로부터 책 배달을 부탁받았다. 라이나와 함께 성견의 방으로 향하자.


*


“책을?”


그게 주인 없는 성견의 방을 차지한 채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모험가의 첫 마디였다.


모험가는 라이나가 내민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은 가죽을 덧대고 제목에 금박을 찍은 멋들어진 양장본이었다. 두께가 제법 두꺼운 데다가 무게도 상당히 나가는 듯했는데, 라이나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 이유는 꼭 무게 때문이 아닐지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수정공한테 말이지.”


“네.”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어 모험가와 눈을 마주치면서, 라이나는 한 번 더 되풀이했다. 부탁드립니다.


사건의 전말은 대강 이러했다. 모험가는 따스한 모르도나의 햇살을 맞으며 들판에 누워 있었다. 날은 선선했고 바람은 시원했으며 밀린 업무나 임무, 토벌 요청들은 휴식을 마음먹은 모험가를 물리적으로 막아설 수 없었다. 따라서 모험가는 입에 볏짚을 하나 물고 눈을 감았다. 낮잠이 어찌나 달콤했던지 그는 꿈마저 꾸었다. 커다란 샥슈카 속에 빠져서 헤엄치다가 맛있게 구운 파프리카를 솜사탕처럼 뜯어 먹는 꿈이었다.


샥슈카에서 헤엄치던 모험가를 건진 건 광란의 꽃이자 요정왕, 페오 울이었다. 모험가는 지극히 기분이 좋았고, 따라서 오랜만에 만나는 아름다운 가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사로잡혔다. 자신만만하게 페오에게 원하는 것이 있냐고 묻자 페오는 기뻐하며 대답했다.


“아이참, 이런 우연이라니! 역시 나의 어린 나무랑은 잘 통하지 뭐야?”


그러며 페오는 말했다. 라이나로부터 부탁을 받아서 왔다고. 시간이 된다면, 아니, 다소간 무례하기는 하지만 되도록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크리스타리움에 들러주면 고맙겠다고 했다며 페오는 덧붙였다. 미련 없이 떠나면서 페오는 사정없이 모험가의 단꿈을 깨트렸고, 눈을 뜬 모험가는 멍하니 자리에 드러누워 있다가 무거운 몸을 이끌어 크리스타리움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결의에 찬 표정을 지은 라이나를 내려다보던 모험가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대담하게도 요정왕을 심부름꾼으로 쓴 데다가 제 단잠을 방해해 기어코 얼굴을 맞대게 한 이유가, 고작 책 배달 때문이라는 거지.


“재밌겠는데?”


“예?”


“이리 줘.”


모험가가 라이나로부터 책을 가져갔다. 약간의 과장을 더 해 모험가가 휘두르면 둔기가 될 법한 크기와 무게였다. 이야. 짧게 감탄한 모험가가 책을 두어 번 휘저었다. 손끝에 닿는 가죽은 신경 써서 무두질한 태가 났고, 언뜻 보이는 종이 결은 집착적으로 맞춰져 있었으며, 성견의 방의 희붐한 푸른빛을 받는 금박이 뿌리는 광채는 꼭 제작자들이 쏟은 심혈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냥 배달만 하면 되는 거지?”


“아, 그것 말입니다.”


곧장 떠나려던 모험가를 라이나가 붙잡았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모험가가 등을 돌렸다. 뜻밖의 표정이 거기에 있었다. 눈썹을 찌푸리고, 미간을 좁히고, 입을 살짝 벌렸다. 부탁을 승낙받은 사람 특유의 기쁨이나 안도라기보다는 되레 난감해하는 것에 가까웠다.


“부탁이 있습니다.”


“또?”


“음, 따지고 본다면 연관이 있기는 합니다.”


떠나려던 걸음이 완전히 멈췄다. 모험가가 라이나를 향해 몸을 돌리자 라이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타리움의 위병 대장은 그 호칭과는 어울리지 않는, 약간의 망설임이 묻어나는 몸짓으로 두 손을 모았다. 맞잡은 손끝을 오랫동안 문지르던 그는 곧 상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었고 다시 모험가를 보았다. 이야기는 그제야 나왔다.


“전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책.”


“응?”


“이야기를 너무 축약했군요.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가, 짧은 한숨, 이윽고 이어지는 말은 앞선 여백만큼이나 느렸다.


“수정공께, ……할아버지께 방해가 될 것 같다면, 전해주지 않으셔도 괜찮다는 의미였습니다.”


모험가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 행위를 몰이해로 받아들였는지 라이나가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크리스타리움 주민들의 생활을 관찰하여 기록하자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기록이 가지는 순수한 힘은 시간마저 압도한다면서요. 박물진열관의 모렌이 총괄한 계획인데, 최근에 그 기록물들을 엮어서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소설이나 인문학이라기보다는 순수한 관찰 일지에 가깝습니다. 들고 계신 그게 초판본입니다.”


모험가는 그제야 고개를 내려 책 표지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금박에 눈길을 사로잡혀 제대로 읽지 않았던 제목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생활 편찬본 제 1권’.


“할아버지는 원초 세계에서 분명 잘 지내고 계실 겁니다. 저희도 잘 지내고 있다고, 몇 번인가 구두로 알려드리기는 했지만 역시 직접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방법에 관한 논의가 있었고, 베크 러그님께 자문받아 책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법을 거는 방법을 채택하여 할아버지께 전달하기로 결론이 났습니다만…….”


아하. 모험가는 그제야 라이나가 하려는 이야기를 알 것 같았다. 이것은 부담과 책임감의 관한 이야기였다.


“괜한 일을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끊이지를 않아서요.”


“응.”


“그러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작정 전달하기보다는, 음, 할아버지가 괜찮으실 것 같다면…… 그때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무작정 전달해도 괜찮다는 얘기지? 모험가는 그렇게 되묻는 대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하고 가볍게 인사한 라이나는 곧 모험가를 향해 각을 맞추어 경례했다. 그것은 이야기가 끝났다고 알리는 신호인 동시에, 모험가가 떠안은 중대한 임무의 시작을 의미하는 몸짓이었다.


원초 세계에서 눈을 뜬 모험가는 가장 먼저 링크셸을 찾았다. 새벽과 연결된 링크셸을 항상 들고 다니는 편은 물론 아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운이 따랐다. 초코보 가방 속에서 숫제 발굴해 낸 링크셸로 연락을 넣고서 모험가는 짧게 기다렸다. 길지는 않았다. 상대는 모험가를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영웅!”


여느 때처럼 들뜬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떨어졌다. 한때 수정공으로 불렸던 존재이자 라이나의 할아버지, 그라하 티아였다.


“바빠?”


“아니, 전혀! 한가해. 마침 쉬려던 참이었거든. 대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쿠루루한테 한 소리를 들었지 뭐야.”


큼, 하고 멋쩍게 목을 가다듬은 그라하가 이어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야?”


“그게 말이지. 참.”


“혹시 새로운 임무라거나, 토벌전에 함께 참여할 사람이 필요해졌다거나…….”


“그렇다기보다는, 음.”


모험가는 잠시 고민했다. 이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말하면 좋을까?


말이란 본디 지나치게 연약하고 개인적인 것이어서 그 발화와 변질은 같은 선상에 있었다. 말에 담긴 진심을 전한다는 것은 지극히 까다로운 일이었으므로 모험가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나의 고민과 염려. 그라하의 기대.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전달자가 된 모험가와 모험가가 쥔 결정적인 열쇠, 책.


제대로 전해주고 싶었다. 그라하가 크리스타리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크리스타리움 주민들이 그라하를 어떻게 걱정하는지, 모험가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므로. 입 밖으로 꺼낸 이상 마모와 풍화를 피할 수 없는 것이 말의 특성이라지만 모험가는 그것이 최대한 온전하기를 원했다. 눈을 한번 굴리고, 구둣발로 땅을 두어 번 두드렸다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서, 모험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만날래?”


“어, 지금?”


“음, 어디 보자. 크리스탈 타워가 좋겠다.”


“이렇게? 당장?”


“탑 입구에서 기다릴게. 천천히 와!”


“잠깐, 영웅,”


그리고 뚝. 잠잠해진 링크셸에서 시선을 뗀 모험가는 곧 고개를 돌렸다. 먼 곳에서 위풍당당하게 하늘을 찌르는 첨탑 같은 수정 탑과 그 너머 펼쳐진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을 뗐다.


“이런 식으로 부르는 건 곤란해. 다음번엔 적어도 약속 시각 정도는 명확히 정하는 게 좋겠어.”


그게 크리스탈 타워 정문으로 달려온 그라하의 첫 마디였다. 질책하는 듯한 어투와는 달리 두 눈은 기대감에 부풀어 반짝거리고 있었으므로 모험가는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굳게 닫힌 수정 탑의 정문 앞에서 그들은 만났다. 차라리 망자의 종소리에 있는 카페라거나 올드 샬레이안의 라스트 스탠드 같은 가게가 만남을 가지기에는 적합할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테지만, 모험가가 생각하기에 라이나의 부탁을 이뤄줄 만한 장소로는 크리스탈 타워만 한 곳이 없었다. 그는 석상에 기대었던 몸을 가뿐히 일으켰다. 옷매무시를 가볍게 정돈하며 그새 묻은 흙과 돌가루를 탁탁 털어냈다. 직후 바닥에 쪼그려 앉아 가방을 뒤적거리면서, 내가 책을 어디에다가 뒀더라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모험가는 어지러운 잡동사니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오니까 좋잖아. 이참에 결계 점검도 하고. 나쁘지 않지, 뭐.”


“…….”


“안 그래?”


대답을 재촉하기보다는 추임새에 가까운 질문과 함께 모험가는 가방 속에서 책을 발견했다. 두꺼운 책등을 잡으며 모험가는 그제야 가방에서부터 눈을 돌렸다. 기왕 부른 김에 거침없이 부탁을 해치울 생각이었다. 길게 끌어봤자 이득 볼 게 없다는 계산에서 도출한 결론이었다. 주민들이 수정공의 안부를 궁금해하듯 그라하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아무래도 거기에는 이견이 없지, 하고 중얼거리며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라하…….”


다음 순간 모험가는 입을 다물었다.


그라하는 그를 등지고 서 있었다.


고개를 꺾어 들고서 크리스탈 타워를 보고 있었다. 눈이 부시지도 않은지 미동도 없었다. 역광이 그라하의 윤곽을 따라 찢어지듯 갈라졌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붉은 머리칼과 옷자락이 흔들렸고, 그에 따라 귀가, 손끝이, 마지막으로 꼬리가 움찔 떨렸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모험가는 상상할 수 있었다. 두 눈을 뜨고서, 가만히 입을 벌린 채로, 크리스탈 타워를 올려다보는 그라하 티아를. 상상 위에는 또 다른 기억이 덮였다. 눈을 뜨고 입을 살짝 벌린 채, 침잠하듯 넋을 놓고 심려의 방을 바라보던 라이나가 거기에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실 그리움은 같은 얼굴로 오니까.


모험가는 불현듯 라이나의 말을 떠올렸다. 그라하에게 방해가 될 것 같다면 책을 전달하지 않아도 된다던 그 문장. 염려스럽던 그 말은 이런 상황을 위해 준비한 라이나의 대비책이었던 걸까?


모험가에게 있어 그리움은 그다지 비중이 크지는 않았다. 느슨한 얼개는 알았지만 단어를 이루는 행과 획에 세세히 공감하지는 못했다. 모험가가 느꼈던 그리움과 가장 가까운 감정은 허탈함 내지는 허무함이었고 그 셋은 일종의 교집합을 이루었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하며 모험가는 눈을 끔뻑거리며 생각했다. 그러므로 라이나가 옳았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 책은 정말로 그라하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가닿고서 오래 지나지 않아 모험가는 어깨를 으쓱였다. 늘어나는 생각에 짓눌려 끙끙거리는 건 그다지 성미에 맞지 않았다. 눈을 한번 데굴 굴린 그가 그라하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짙푸른 잔광을 내뿜는 크리스탈 타워를 가만히 바라보며 손가락을 두드리길 수 분, 모험가는 마침내 그라하의 상념에 거침없이 끼어들 문장에 마침표를 찍었다.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


“아, 응. 미안.”


팽팽한 실을 자르는 것보다도 간단하게 그라하가 돌아섰다. 멋쩍은 듯 뺨을 긁적이면서 그가 쪼그려 앉은 모험가와 시선을 맞췄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두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모험가는 슬그머니 잡동사니 사이로 책을 밀어 넣었다.


“영웅?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


“그럼 왜…….”


“귀여워서?”


“…….”


그라하가 모르고 또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기 직전, 모험가는 그 절묘한 틈을 비집고 섰다. 킬킬거리며 그는 잠시 크리스탈 타워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라이나를 잠시 생각하며 물었다.


“널 슬프게 할지도 모를 편지가 도착했을 때, 너는 그걸 읽을 거지?”


뜻밖에도, 혹은 당연하게도, 대답은 곧장 나왔다.


“아무래도.”


그라하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로 바꾸었을 뿐이라는 자신감의 일종이 엿보였다. 모험가가 말이 없자 그라하는 되레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고는 되묻는 것이다.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걸.”


“그렇다기보다는, 음, 글쎄. 대답이 빨라서 조금 놀랐달까.”


“아아.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진심이야.”


선언은 상쾌하리만치 깔끔했다. 으음, 하고 짧게 신음한 그라하는 곧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야. 슬픔도 분노도 좌절도 내 것이라는. 물론 그 편지에 나의 감정을 쏟을 만한 가치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것 역시 우선은 읽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잖아.”


“그건 그렇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 해. 그리고 알기 시작한 이상 나에게는 발화점에서 시작되는 감정을 소화할 책임이 생기지. 그러니 편지를 읽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야. 적어도 내게는.”


깔끔하게 말을 마친 후에야 그라하는 모험가를 보았다. 흔들림 없는 알라그의 홍안을 들여다보며 모험가는 직감했다. 그라하의 신용이 보였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예비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라하는 익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예언이나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축적된 경험에서 도출한 결론에 가까운 믿음이 망막 너머에 선명히 맺혀 있었다.


그 신뢰에 이끌리듯 모험가는 가방을 바라보았다. 어지러운 잡동사니 사이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책을 보았다. 정성들여 담은 크리스타리움 주민들의 현재가 거기에 있었다. 동시에 모험가는 라이나를 생각했다. 실없이 고개를 내저은 다음 순간 모험가는 내심 웃었다. 이것 봐, 하고 그는 말하고 싶었다. 라이나의 걱정은 지극히 타당했으나 그는 결정적인 한 가지를 간과했다. 염려해 마지않는 할아버지가 바로 그라하 티아라는 사실을.


이걸 봐. 너희의 수정공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 그는 고난에서 도망치는 법이 없으며 때때로 시련의 돌파구를 이끄는 길잡이 같은 존재였다. 수정공이었던 그라하 티아는 절망을 이겨내는 법을 알고 슬픔에서 헤어 나오는 법을 알았다. 그의 망설임은 더는 그를 좌절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그라하를 바라보면서, 손끝으로 가죽을 무두질했을 공예가의 손길을 더듬으면서, 모험가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어쩌면 주민들과 그들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영웅?”


그라하의 부름을 뒤로 하고 모험가는 책을 꺼냈다. 가방 속에서 대뜸 두꺼운 양장본이 나타나자 그라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또 뭐야, 너 무슨 사고를 친 건 아니지, 하고 말을 이으면서도 낯선 책에 눈을 빛내기 시작한 그라하를 바라보면서 모험가는 씨익 웃었다. 그라하에게 손짓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라이나에게 부탁을 받았어.”


“라이나가?”


“너에게 전해달라더라. 뭐라고 했지. 크리스타리움 주민들의 생활을 묘사한 기록물을 엮었다고 했던가.”


변화는 빠르고 점진적으로 일어났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빛나던 그라하가 아, 하고 탄식했다. 반짝이던 눈이 가라앉고 입은 다물렸다. 관심 어린 시선으로 기웃거리는 대신 그라하는 희미하게 웃었다. 책을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그는 손을 뻗었다. 해지지 않은 가죽 표지와 벗겨지지 않은 금박을 손으로 느리게 훑어내리면서 그라하가 중얼거렸다.


“다들 잘 지내나 보구나.”


“아주. 많이.”


“다행이야. 정말로.”


잠깐 뜸을 들였다가 그라하가 물었다.


“읽어봐도 될까?”


“이건 원래 네 책이야, 라하. 원하는 대로 해.”


고마워, 하고 중얼거린 그라하가 두꺼운 표지를 넘겼다. 단정한 필체로 적힌 첫 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우리의 영원한 수정공을 위하여.’


다음 순간 강렬한 빛이 번졌다.


책을 도로 덮을 틈도 없었다. 섬광탄을 터트리기라도 한 것처럼 맹렬한 빛이 그들 시야를 덮쳤다. 모험가가 반사적으로 손을 내뻗어 그라하를 잡았다. 그를 끌어당기는 것과 동시에 그라하도 모험가를 잡아당겼다.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뒤엉키던 순간 모험가는 그들을 인도하는 우악스러운 인력을 느꼈다. 벗어나야, 하며 대검을 잡으려던 바로 그때. 먼 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렸고, 모험가는 떠올렸다.


“이건, 대체…….”


제 곁에서 신음하는 그라하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고 애쓰며, 모험가는 괜히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절대 말 못 해. 라이나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법을 걸어두었다고 미리 말해줬던 걸 새까맣게 까먹는 바람에 습격인 줄 알았다는 말은 절대 못 해.


그러나 상념은 길지 않았다. 버릇처럼 주위를 둘러보던 영웅은 우두커니 멈췄다. 단숨에 밤이었다. 검은 하늘을 찌르는 드높고도 푸른 첨탑, 그 아래에 설치된 둥그런 아치 형태의 대문과 이 층짜리 에테라이트 광장이 말해주고 있었다.


여긴 크리스타리움이었다.


‘밤이 오면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은 제각기 휴식 시간을 가진다.’ 모렌과 닮은 목소리가 마치 서술처럼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동시에 사람들이 생겨나고, 또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친의 손을 잡은 아이의 웃음소리가 넓게 울렸다. 저들끼리 뛰어다니며 서로를 잡으려고 애쓰는 꼬마들, 그 풍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른들, 난간 위에서 함께 하늘을 바라보는 연인이 생겨났다.


‘어둠의 전사가 본래 세계로 돌아간 이후, 크리스타리움에서 평화란 곧 일상이 되었다.’ 그들 주위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전등이 켜졌다. 불은 밝았지만 별을 가리지는 않았다. 검은 하늘, 한때 모험가와 수정공이었던 그라하가 되찾기 위해 분투했던 밤은 이제 지극히 당연한 것이 되었다.


‘바람이 분다.’ 상쾌하게 그들을 쓸고 지나간다.


크리스탈 타워가 내뿜는 푸른 광채, 거기서 비롯된 기다란 그림자가 그들을 덮는다.


모험가는 그라하를 보았다.


“이거였구나.”


주먹을 질끈 쥔 그라하가 중얼거렸다. 말은 이어지지 않지만 모험가는 그라하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었다. 그라하와 주민들이 궁극적으로는 같은 말을 하고자 한다고 느끼는 까닭은. 그리움은 지극하여 깊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멸망에서 헤어나온 세계라고 한들 영웅의 구제는 인간 개개인에게 닿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크리스타리움 주민들은, 이 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은, 때때로 절망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할 것이다. 좌절은 영구할 것처럼 느껴질 테며 고난과 시련은 필연적으로 찾아올 테다.


그런데도 말해주고 싶었던 거였다. 이 책을 편찬한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모든 주민은. 멸망을 피한 세계에서 우리가 얻은 건 일생일대의 구원이 아니라고. 다만 일상을 누릴 기회요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한 걸음, 딱 한 걸음을 내디뎌볼 용기라고.


우리는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한다고.


그렇지만 살아가고 있다고.


그라하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모렌의 서술은 길게 이어졌다. 모험가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 앉아 그들을 스치는 맞바람을 맞았다.


책의 마지막 장이 끝나고 마법이 잦아들었을 때 모험가는 그라하를 보았다. 그는 크리스탈 타워의 대문을 향해 서 있었다. 마치 거기에 크리스타리움이 있다는 것처럼. 따스한 햇살의 갈래가 뺨을 스쳤을 때 그라하는 크게 숨을 들이켰고, 또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보며 웃었다.


“고마워.”


“뭘.”


“잘 지내고 있구나. 사람들은.”


그의 눈에서 짧은 이채가 스쳤다. 가볍게 주먹을 쥐고서 그라하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지! 언젠가 크리스타리움에 가게 된다면 라이나에게 전해줘. 책, 잘 받았다고. 앞으로 어떤 기로에 서든 간에 너희를 응원한다고 말이야!”


자신만만하게 웃는 그라하를 바라보며 모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한번 쪼그려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책을 들어 가볍게 먼지를 털었다. 책을 그라하에게 건네자 그라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확실하게 전해주었다고, 모험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야흐로 임무 종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