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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 2026.07.07.  15:56

조라쟈 님께.

조라쟈 님, 안녕하신가요? 먼 곳에서 편지해요. A랍니다!

근래 어떻게 지내고 계실지 모르겠어요. 계승 의식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곱씹을 때마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린답니다. 거리는 멀지만 소식은 빠른 법이라서, 저는 종종 무왕님께 가 계승 의식이 어디까지 진전되었는지 여쭙고는 해요. 바로 어제도 그랬어요. 듣자 하니, 조라쟈 님, 한창 오르코 파차에 계신다면서요? 황금 알파카를 단숨에 잡아 오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A도 언젠가 조라쟈 님과 함께 황금 알파카를 탈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조라쟈 님께서 투랄 대륙 곳곳을 둘러보시며 계승 의식을 치를 생각을 하면, A의 심장이 마구 두근거려요. 함께 할 수 있었다면 정말 즐거웠을 텐데,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그러고 보니, 조라쟈 님이 계승 의식을 쭉 따라가다 보면…… 야크텔 밀림에도 가게 되시겠죠? 그렇다면 언젠가 마무크에도 가실 테고요. 마무크는 그간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져요. 기억나세요? 조라쟈 님과 A가 어렸을 적에 같이 마무크를 간 적이 있잖아요. 연왕님의 시찰에 따라가겠다고 조르고 조른 결과였지요!

그때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마침내 밝힐 수 있어요. A는 사실, 마무크로 떠나던 그날, 아주 조금 슬펐답니다…….



*



짙푸른 잔광이 우거진 이파리를 뚫고 간신히 발치에 닿았다. 푸른 발광체들이 풍경 곳곳을 떠다니는 황홀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A의 입꼬리는 솟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옷자락을 질끈 쥔 손아귀는 비단 긴장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당시에는 장본인인 A마저 알지 못했다.

연왕 굴루쟈쟈의 정기 시찰이었다. 본래라면 연왕이 고른 동료만이 동행해야 했지만, 이번 정기 시찰에는 뜻밖의 인물이 몇몇 끼어 있었다. 어린아이가 연왕의 정기 시찰 무리에 합류한다는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A의 애절한 부탁과 더불어 여태 침묵하던 조라쟈의 작은 조력이 연왕의 생각을 아주 조금쯤 바꾸는 데에 기적적으로 성공한 덕이었다.

A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암석에서 손을 떼고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할 일을 처리하느라 제각기 바쁜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조라쟈를 찾기란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조라쟈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길가 한갓진 곳에 기대어 우두커니 선 채였다. 시선은 굴루쟈쟈를 똑바로 향했다. 그의 푸른 비늘이 마무크의 잔광을 받아 희끄무레한 빛으로 반짝였다.

A는 어른들을 피해 슬그머니 조라쟈에게 다가갔다. 조라쟈의 가까이에 설 때까지도 그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왕자의 시선은 명확했다. 마을 이장과 대화를 나누는 굴루쟈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굴루쟈쟈가 언뜻 비쳤다. 마무크는 빛이 잘 들지 않아 침침했지만 조라쟈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그것과 조금 다른 종류 같았다.

A가 손을 뻗었다. 대뜸 조라쟈의 품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았다. 그들은 고작 두 살 차이였지만 체격은 조라쟈 쪽이 훨씬 컸다. 완전히 끌어안았다기에는 다소간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오라버니가 단련에 들어가셔서 그럴까? 하기야, 조라쟈는 본래도 A보다 컸지만 근래 들어서는 근육이 빠르게 붙고 있었다. 그에 반해 몸이 약한 A는 성장이 지지부진했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아쉬운 마음을 채 삼키지 못하고 우물거리던 때였다. 조라쟈가 말을 걸었다.

“……뭐하는 거지?”

“앗.”

A가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조라쟈가 분명히 A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굴루쟈쟈가 아닌 A를. 황당하다는 낯이었지만 적어도 직전에 보았던 얼굴보다는 밝았다. 곧바로 떨어지는 대신 A는 조금 더 힘을 주어 조라쟈를 끌어안았다. 한 번 더 질끈 포옹하자 조라쟈가 되풀이했다.

“뭐 하는 거냐.”

“그냥……. 오라버니,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슬퍼 보이셔서요…….”

“슬프지 않다.”

“으응, 죄송해요. A가 착각했나 봐요.”

몸을 슬쩍 물리며 A가 중얼거렸다. 조라쟈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속에서 A는 제 뺨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지 말걸, 하는 후회가 슬금슬금 목구멍을 아리게 했다. 대뜸 껴안아서 오라버니가 불쾌하셨다면 어떡하지? 게다가 오라버니, 슬프지 않다고 하셨는걸. 정말로 제 착각이었던 거야. A가 질끈 주먹을 쥐었다. 옷자락이 손바닥 안으로 말려들어 갔지만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쩌면, 하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오라버니를 위로하려고 했던 포옹이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위로받고 싶었던 건…….

“조라쟈! A!”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A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연왕 굴루쟈쟈였다. 먼 곳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연왕은 다시 한번 이리로 오지 않겠니, 하고 외쳤다. A가 조라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기대었던 등을 떼고 일어서고 있었다. 일언반구 없이 그가 발을 뗐다. 두어 걸음 나아가다가 또 잠시 멈춰 섰다. 멀어진 조라쟈에 A가 허겁지겁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깨가 나란히 맞을 때까지 조라쟈는 멈춰 있었다. A가 그보다 반걸음 앞섰을 무렵 조라쟈는 다시 걸었다.

“마무크 안에서라면 둘러봐도 좋다고 한다. 그렇다고 너무 집요하게 굴지는 말고.”

“마을 바깥으로 섣불리 나가는 것도 금지입니다. 밖에는 험한 마물들이 사니까요.”

연왕에게 다가갔을 때 무예의 머리와 이지의 머리가 각각 말했다. A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예의 머리가 크게 웃었다. 너희가 벌써 시찰에 따라올 나이가 되다니, 하며 허벅지를 탕탕 쳤다. A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곧 고개를 축 숙였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건. 벌써 시찰에 따라올 만한 나이가 되다니. 조라쟈는 열 살을 조금 넘겼고, A는 그보다 두 살 적었다. 시찰에 따라 나올 만한 나이라는 것은 즉 다른 일을 할 만큼 먹은 나이라는 의미도 됐다. 그리고 A에게는 그 다른 일이라는 것이 멀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번 시찰은 A에게 허락된 마지막 외출이었다.

시찰이 끝나고 툴라이욜라로 돌아가면 A는 신전 소속이 된다. 거기서 의식을 치르고 무녀가 될 것이다.

슬프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무녀라는 역할이 제게 짐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A는 진심으로, 마음 깊이 툴라이욜라 사람들의 안녕을 빌었다. 그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어떤 힘든 일이든 달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무녀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도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마음은 끝없이 중첩되는 존재다. 다각형으로 깎이고 부스러지다가 또 새로 달라붙고 뭉그러졌다. 무녀는 신전에서 나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A가 느꼈던 절박함 또한 그 자체로 진실되었다. 무녀로 선정되었을 때 A를 웃게 했던 기쁨만큼이나 확실하고 선명하게.

무녀가 되면 툴라이욜라 사람들의 안녕을 빌 수 있었다. 하지만 무녀가 되면, 오라버니를 만날 수 없게 된다. 툴라이욜라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한 만큼, 조라쟈를 향한 애정에도 거짓이 없다. 그리고 A에게는 더는 선택이 허락되지 않았다.

“A.”

자신을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A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연왕 굴루쟈쟈의 이지의 머리였다. 온화한 웃음을 지은 그가 조심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뻗은 손이 A의 머리 위에 가볍게 얹혔다. 따뜻한 손길이 부드러운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A는 두 손을 꾹 쥔 채로 이지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연왕 굴루쟈쟈는 A가 무녀로 지목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쩌면 전례 없던 시찰 동행을 허락해 준 데에는 A를 향한 배려가 있었던 걸까?

“괜찮습니다.”

“A는…….”

“마무크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후회는 없을 거예요. 두 눈,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돌아갑시다.”

질끈 주먹 쥔 손 아래에서 헐떡이는 심장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A는 어쩐지 조라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궁금증에 사로잡혔다. 마른 입을 한번 적시고 A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 그리고 마음에 깊이.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기도문을 외듯이 연왕의 말을 곱씹었다. 두 눈,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하지만 A는 궁금했다. 그는 일전에 요카후이족의 석공 기술을 보았다. 그들은 놀라우리만치 섬세한 기술로 커다란 돌을 깎고 조각했지만 A에겐 바람에 차츰 풍화되던 과거의 유산들이 보였다. 바람과 비, 눈과 폭풍에 휩쓸려 강인하고도 조밀한 조각들은 점차 바스러졌다. 그토록 장엄하던 자연조차 별수 없었던 것들이다. 그렇다면 한낱 사람인 A의 눈과 마음에 제아무리 깊이 새긴들 그것들이 얼마나 오래 갈까?

마무크에서의 경험들이 잊히기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이 시찰 전체를 잊기에는 또 얼마나 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잊힌다면 어느샌가 오라버니마저 잊고 말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A는 고개를 거칠게 내저었다. 아니야, 하고 그는 스스로 되뇌었다. 주먹을 질끈 쥐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힘차게 연왕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네!”



*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사실 처음엔 이왕님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얼마나 불경한지!

하지만 그때의 A는 어렸지요. 미숙함은 이유가 될 수 없다지만 어떤 것은 세월이 우리를 채우기 전까진 영원한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기 마련인걸요. 두 눈,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긴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의 저는 알지 못했어요. 영구한 기억이 지나치게 흐린 데에 비해 망각은 지척이었어요. 그래서였답니다, 조라쟈 님. 그래서 A는 마무크에서 두렵고, 슬프고, 외롭고, 망설여졌어요.

A는 조라쟈 님을 잊기 싫었는걸요.

하지만 적어도, 마무크에서의 시찰이 전부 부정적인 감정에 얼룩진 것은 아니에요. 이왕님의 말은 정말로 옳았거든요. A는 그날, 마무크를 돌아보아도 좋다고 허락받았던 그날, 마무크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으니까요!

축축한 공기, 희끗하게 불어오는 습윤한 바람, 거기서 아스라하게 풍기는 젖은 흙내……. 약간 식어 미지근한 맞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 머리 위의 짙푸른 이파리들도 함께 떨렸지요. 복숭아뼈를 간질이던, 푸르게 발광하던 잎들도 함께 떨었지요. 멀지 않은 곳에서 자타카의 푸르고 붉은 나비들이 날아다닐 때 그 궤적을 따라 반짝이는 분진들이 길게 선을 남겼어요. 고요하게 찌르르거리던 풀벌레, 적막 틈바구니를 비집고 몸을 흔들던 나무전령, 널따란 풍경을 하릴없이 떠다니던 발광체들. 그 속에서 저는 맨발로 진흙을 밟으며 뛰어다녔지요.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발가락을 꾸물거리기도 했고요.

그곳은 정말이지 꿈결 같았어요.

그래서, A는 마무크에 머물던 마지막 날, 굴루쟈쟈 님께서 천막에 찾아오시기 전까지는 무녀와 관련된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답니다.



*



“무녀가 되기 싫으냐?”

무예의 머리가 그렇게 물었을 때 A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잊고 있었던 현실이 급격하게 밀려온 듯한 기분이었다. 지나치게 빠른 급류가 그의 어깨를 뻐근하게 짓눌렀다.

마무크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굴루쟈쟈가 A의 거처에 들어왔다. 마무크에서 지낸 사흘이 어땠냐고 질문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A는 들뜬 마음에 푹 젖어 있었다. 너무 좋았어요, 환상적이었답니다, 따위의 상기된 대답을 건네자 돌아온 물음이 저것이었다. 무녀가 되기 싫냐는.

이왕이 무왕을 향해 꾸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A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고개를 들 수도, 어떠한 말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이왕은 무왕의 직설적인 태도를 핀잔했지만 무왕의 질문만큼 제 상황을 명확히 꿰뚫는 문장은 존재할 수 없었다. 마무크의 환상이 차츰 물러난 곳에서 A를 간질이는 건 차가운 고독이었다. 몸 말단을 느리게 얼리는 그것들이 마치 서리처럼 전신으로 번지는 듯했다. 그렇게 입을 막고 심장을 얼릴 것 같았다.

“A.”

이왕이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A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힘껏 숨을 들이켰고 다시 내뱉었다. 그러고는 힘주어 고개를 내저었다. 잔뜩 긴장한 근육에 목덜미가 뻣뻣해졌지만 그런 것들은 더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왕이 다시 말을 잇기 전 A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외쳤다.

“아니에요!”

“A.”

“되기 싫은 것, 아니에요. A는, A는 무녀가 될 수 있어서 정말로 기뻐요. 툴라이욜라에 사는 사람들, 모두를,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그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굴루쟈쟈가 침묵했다. A는 열심히 토로했다. 진심이었다. 진심뿐인 말들이었다.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모두가 잘되기를 원하고. 애당초 그런 현실이 공상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상상을 진심으로 믿고 또 빌면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하고 싶으니까. A에게 그런 기회가 돌아왔다는 건 기쁜 일이니까.

“되기 싫은 것이 아니에요, 정말로요…….”

단지 이상한 일이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따라 물기가 차오른다는 건. 거짓 한 줌 없이도 이토록 서러울 수 있다는 건.

굴루쟈쟈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그는 툴라이욜라의 연왕이었다. 모두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은 A만큼이나, 혹은 그보다도 지극할 것이다. 어쩌면 굴루쟈쟈는 A의 눈물을 오해할지도 몰랐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다른 무엇도 아닌 마음을 오독하지 않았으면 했다. A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힘주어 눈을 부릅떴다. 숨을 크게 들이켰고 꾹 참았다. 아니에요, 하고 중얼거렸다.

그때 어깨 위에 손이 얹혔다. 굴루쟈쟈의 것이었다. 속절없이, 마치 이끌리듯이 A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A를 똑바로 내려다보는 연왕의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A. 나는…….”

그러나 굴루쟈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숨과 숨을 잇는 짧은 틈, 그 사이 간격을 틈탄 소음이 그들을 감싼 공기를 깼다. 문을 대신하는 천이 크게 펄럭였다. 따각, 하고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A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요동치는 천막 너머로 짙푸른 비늘이 일렁였다. 서성이는 듯하다가 천막이 한번 나부끼는 찰나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A가 다급한 탄성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굴루쟈쟈를 뒤로 하고서 그가 재빨리 뛰어갔다. 천막을 젖히고 밖으로 튕겨 나갔다.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이른 아침을 맞아 텅 빈 거리만이 A를 반겼다. 저도 모르게 A가 손을 모아 주먹을 쥐었다. 설마, 하는 마음이 불온하게 목구멍에서 울렁거렸다.

“왜 그럽니까?”

뒤따라 나온 연왕이 물었을 때, A는 울상이 된 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가 계셨어요.”

“뭐라고?”

“어쩌지요? 오라버니께서 이야기를 들어버린 것 같아요!”

굴루쟈쟈가 말이 없어졌다. 울상을 지은 그대로 A가 주위를 다시금 둘러보았다. 착각인 걸까? 빠르게 멀어지는 이 아득한 발소리는? 절로 이가 악물렸다. 어깨를 떨며 그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런 식으로 조라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비밀이었다. 아직은. 언젠가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미뤄온 아집의 대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울먹이는 A를 굴루쟈쟈가 붙잡았다. 인자한 연왕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A, 하고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A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 맺힌 눈가를 느리게 닦아주며 연왕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 아직 오라버니께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화가 나셨으면 어떡하지요?”

“그런 것으로 성급하게 화를 낼 녀석은 아니다. 걱정하지 마.”

“이런, 이런 식이길 원하지 않았어요. A는, A는…….”

“압니다.”

이왕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A를 쓰다듬는 손길도 함께 느려졌다.

“A, 어떤 인연은 고작 장소나 물리적인 거리 같은 것으로 잇고 맺음을 정하지 않습니다. 기억도 매한가지예요. 소중한 시간은 마음에, 우리의 심장에 깊이 남는 법입니다.”

“하지만…….”

“정 걱정이 되면 조라쟈에게 말해보는 것이 어떤가요? 약속을 거는 겁니다. 서로를 잊지 않겠다고.”

A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자 이왕은 짓궂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 종류의 약속은 생각보다 그 힘이 세답니다. 한번 건 손가락은 잘 풀리지 않는 법이거든요.”

A는 잠시 망설였고, 숨과 숨 사이에 짧은 여백을 두었고, 직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들었다. 두 손으로 주먹을 쥐고서 A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제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마을 전경을 뚫어지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찾으러 가겠어요. 오라버니를……!”



*



그렇지만 저는 실패했지요. 기억나세요, 조라쟈 님? 그날 내내 A는 조라쟈 님을 찾아 헤맸어요. 밥도 거르고 돌아다니다가 연왕님께 혼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A는 그만큼 절박했어요. 돌이켜 생각한다면, A는 어쩌면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정말로 인연의 단절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함께 지냈던 즐거운 기억, 추억, 하다못해 감정이나 마음까지도 전부 사라지게 될 거라고 믿었던 것만 같아요.

아무리 찾아도 조라쟈 님은 보이지 않는데, 날은 빠르게 저물었지요…….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 외출이 금지된 시각이 되었을 때까지도 조라쟈 님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그때 A는 진심으로,



*



절망스러웠다.

온종일 마을을 들쑤셨지만 푸른 비늘의 끄트머리도 보지 못했다. 땅으로 꺼진 건지 하늘로 솟은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연왕님께 수색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로도 역부족이었다. 갈피를 잃고 돌아다닐 즈음에 해가 졌다. 이제는 마을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게 되었다. 마을은 이미 질리도록 돌아다녔는데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니까, 하고 생각했을 때 A는 터지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질끈 깨물어야 했다. 약속을 나눌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이렇게 날아간 것이다. 해가 밝아오면 그들은 툴라이욜라로 떠난다. 그리고 완전히 헤어지게 되리라.

약속하지 않은 시간은 어떻게 되는지 A는 알지 못했다. 지금에라도 연왕님께 여쭙고 싶었지만 굴루쟈쟈는 삼십 분 전 슬슬 잠들라는 말을 남기고 거처로 돌아갔다. 시원한 코골이 소리가 거처 바깥까지 뚫고 나오는 마당에 대뜸 도움을 요청하는 건 지나치게 무례한 일이었다. 소리 내 울고 싶은 마음으로 A가 이불에 얼굴을 푹 묻었다. 시원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뺨을 간질였고, 이건 분명 A가 좋아하는 감각 중 하나였지만, 그런데도 불편한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불에 파묻힌 채로 A는 어림했다. 매일 같이 똑같은 일상이 옛 기억을 차츰 대체하기 시작하기까지는 얼마나 걸릴지. 약속하지 않은 시간이 빛바래는 데에는 얼마큼의 시간이 걸릴지. 언젠가 조라쟈가 단순히 소문 속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상상까지 가닿았을 때 눈물이 배어 나왔다. 눈가가 축축해지는 바람에 A는 조금 더 몸을 웅크렸다. 그러고 싶지 않아, 하고 중얼거렸다. A는 잊고 싶지 않았다. 마무크에서의 경험, 이 시찰에서 즐거웠던 모든 순간, 더 나아가 조라쟈와 함께 지냈던 모든 시간을.

하지만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주고받을 마지막 기회는 이미 떠났다. A는 언젠가 조라쟈를 잊는다…….

“A.”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A가 저도 모르게 튕겨 일어나 앉았다. 직전까지 눈물을 흘린 탓에 뿌옌 시야 너머로 짙푸른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두 눈을 끔뻑이며 간신히 초점을 맞추었을 때 상대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흐린 시야가 걷혔을 때는 그가 뻗은 손이 지척이었다. A는 피하지 않았다. 미지근하고 약간은 거친 손바닥이 A의 눈두덩이를 덮었다. 어두워진 사위를 뚫고 목소리가 울렸다.

“왜 우는 거지?”

나지막한 목소리에 A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로 조라쟈였다. 온종일 보이지 않았던 그가 이제야 A를 찾아온 것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명확히 감을 잡지 못한 채 A가 숨을 삼켰다. 조라쟈의 손이 떨어지고 나자 그가 또렷하게 보였다. 자신을 멀뚱히 응시하는 시선에 괜히 뺨이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직전까지 울고 있었는데. 꼴이 정말 말이 아닐 텐데. 왜 울고 있냐는 질문에 내놓은 대답도 마땅찮았다. 몰려드는 부끄러움에 A가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조라쟈가 다시 성큼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A의 손목을 잡은 그가 말했다.

“따라와라.”

“아, 저……!”

자신을 당기는 악력에 A가 얼결에 몸을 일으켰다. A가 두 발로 선 것을 확인하자마자 조라쟈는 걷기 시작했다. 앞장선 그를 따라 A가 졸졸 따라붙었다. 거처를 나가 주위를 잠시 둘러본 조라쟈가 곧 다시 걸음을 뗐다. 사람들이 잠든 마무크는 고요했다. 간헐적으로 우는 찌벌레 소리만이 이곳이 현실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발소리를 죽인 채 조라쟈와 A가 걸음을 재촉했다. 마을 입구를 빠져나온 직후 A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조라쟈는 태연했다.

“저, 오라버니……! 밤에는…….”

“괜찮다.”

“그, 으응, 그리고, A가 할 말이…….”

“가서 듣지.”

단숨에 돌아온 대답에서는 어째서인지 약간의 조급함이 느껴졌기에 A는 입을 다물었다.

조라쟈는 A를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이끌었다. 아름답고 신비롭던 숲은 빛이 저물자 어딘가 스산한 분위기였다. 나무전령이 흩뿌리는 빛에 의지하며 그들은 걸었다. 들떴던 마음이 차차 가라앉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그들은 여전히 걷고 있었다. A는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 제 심장께를 지그시 누르며 애써 숨을 골랐다.

조라쟈의 걸음은 평소보다 빨랐다. 어째서인지 그가 서두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물들 때문일까? 하지만 조라쟈는 최근 단련을 시작했다. 이런 마물들 정도라면 손쉽진 않을지언정 도망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의 꾸짖음? 오라버니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으실 텐데?

서두르는 조라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 즈음에, 그들은 멈춰 섰다. A는 처음에 그들을 가로막아선 것이 벽인 줄 알았다. 느적느적 걷던 나무전령이 벽면 가까이에서 몸을 떤 후에야 알았다. 그 짙푸른 환황광이 사위를 일순 밝혔을 때, 조라쟈는 손을 뻗었고 A는 잠시 헛숨을 삼켰다. 어둠이 물러나자 길게 늘어진 넝쿨이 보였다. 조라쟈가 얼기설기 얽힌 넝쿨들을 손으로 들추자 마침내 드러났다. 숨겨진 입구였다.

“따라와라.”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A가 먼저 들어섰고, 조라쟈가 뒤따랐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을 때 조라쟈는 걷지 않고 잠시 망설였다. A는 기다렸다. 갈등하는 듯 작게 앓은 후에야 조라쟈는 첫발을 뗐다. 뒤따르려던 찰나 A는 제 손에 겹치는 온기를 느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혔다. 딱딱한 비늘이 손바닥을 스쳤을 때 A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라쟈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한번 어둠을 헤치고 걸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A는 알았다. 조라쟈는 더는 서두르지 않았고, A는 이제 불안하지 않았다. 조라쟈의 발소리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A는 자신이 무엇인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직감했다. 그들은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었다. 느리게. 하지만 확실하게.

걸음을 따라 천천히 주위가 밝아졌다. 멀리서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공기가 차츰 서늘해졌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조라쟈가 멈춰 섰을 때, 그가 다시 한번 길을 가로막은 넝쿨을 손으로 해치며 몸을 숙였을 때, 그렇게 안쪽 공간으로 들어섰을 때, A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와아……!”

물이 흐르는 세노테 밑바닥이었다. 우거진 이끼와 풀숲, 그것들을 스치고 지나가는 얕은 물줄기 위로 긴 달빛이 늘어섰다. 그 좁고 기다란 안을 따라 짙푸른 나비들이 유유자적 날아다녔다. 그들의 궤적을 따라 반짝이는 파랑이 분분히 흩날렸다. 야크텔 밀림의 짙푸른 광이 물성으로 뭉친 듯한 광경이었다. 마치 꿈결이었다.

“이리 와라. A.”

조라쟈가 나지막이 A를 불렀다. 넋을 놓았던 A의 시선이 조라쟈를 향했다. 그는 냇가 앞에 서 있었다. 조라쟈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가 부드럽게 A를 이끌었다. 그 손길에 기대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조라쟈의 곁에 쪼그려 앉고 손으로 물살을 헤쳤다. 세노테의 물은 차가웠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환황광을 품은 어두운 냇물은 손이 닿을 때마다 짙푸른 빛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황홀경 속에서 조라쟈가 주먹 쥔 손을 건넸다. 서서히 펼친 손바닥 위에서 들꽃 반지가 바람에 달싹였다.

“약속해 주지 않겠나.”

그 흔들림을 보았다. 이파리와 꽃잎들이 바람결에 잘게 떨며 나부끼는 바로 이때.

“훗날 내가 왕이 되면, 내 비가 되어주겠다고.”

A는 직감했다. 이 순간이다. 이 순간이야말로 오래오래 심장에 남을 기억이다.

어떤 말은 쟈윤쟈 나비의 궤적보다도 곧장 심장에 꽂힌다. 삽시간에 뜨거워지는 눈가에 A가 두 손을 질끈 쥐었다. 목구멍이 따가워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목소리도 형편없을 것만 같았다. 입술을 깨문 A가 손을 뻗었다. 펼친 조라쟈의 손 위에 제 것을 올렸다. 그리고 힘을 주어 잡았다. 손바닥 사이의 꽃반지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저, 두려웠어요. 툴라이욜라로 돌아가서, 무녀가 되면, 이제 오라버니와는 영영 무슨 사이도 되지 못할까 봐……. 이대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이가 될까 봐, 그러다가 전부 잊게 될까 봐, 너무 두려웠어요.”

볼품없는 목소리였다. 갈라지고 떨렸다. 그리고 딱 그만큼 몸이 떨렸다. 젖은 숨을 삼킬 때 조라쟈가 말없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단단했다. 거기서 오는 용기는 이제껏 받아본 적 없는 크기였다. 벅차다 못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A는 다시 한번 숨을 골랐고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전해야만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다.

“하지만, 하지만 오라버니, A, 이제 더는 두렵지 않아요. 으응, 알 것 같아요. 고작 장소나 거리, 멀고 가까움으로 잇고 맺어짐을 정하지 않는 인연을……. 그만큼 오래가는 기억을, 약속을…….”

맞잡은 두 손, 거기서 느껴지는 온기, 꽃잎의 간지러움. 짙푸른 나비가 일순간 날아올라 그들을 감싸는 장막이 되었을 때 A는 조라쟈를 마주 보았다. 말 없는 시선이 허공에서 얽힐 때 A는 숨을 골랐다. 두 눈과 온 마음에 지금의 풍경을 새겨넣었다. 이것은 그들만의 비밀. 영영 누구도 알 수 없을, 오로지 조라쟈와 A만을 위해 직조된 이야기. 그리고 아마 A가 죽을 때까지 마음에 품고 살 순간이다.

그들을 비추는 환황광을 등진 채 A가 웃었다.

“그러니 오라버니, 약속이에요. 꼭 A와 결혼해주세요!”



*



그때를 여전히 기억해요.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이제는 알아요. 조라쟈 님을 내내 찾을 수 없었던 건, 조라쟈 님께서 온종일 야크텔 밀림을 돌아다니며 마땅한 장소를 찾아 헤매셨기 때문이라는 걸. 그곳을 날아다니던 파란 나비들이 쟈윤쟈 나비라는 걸. 그리고 마무쟈족에게 쟈윤쟈 나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도 전부요!

이왕님이 옳았어요. 설령 잊게 되더라도, 어떤 기억은 마음에 영원히 남아요. 떠오르지 않게 되어도 사라지지만은 않아요. A는 조라쟈 님을 잊을 자신이 없지만, 설령 함께했던 기억이 빛바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A의 마음속에서는 생생히 살아 있을 거예요. 지금도 그래요. 심장 속에서 조라쟈 님과 A의 약속이 여전히 숨 방울을 톡톡 내뱉으며 존재를 알리고 있는걸요!

A도 조라쟈 님께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쩌면 이미 되었으면 좋겠다고, 무심코 바라고 말아요.

보고 싶어요, 조라쟈 님.

남은 여정 힘내세요. 멀리서도 A가 응원할게요. 항상이요!

- A